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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가부장이 가장 노릇마저 못하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가부장제란 “가장인 남성이 강력한 가장권을 가지고 가족구성원을 통솔하는 가족 형태 또는 가족구성원에 대한 가장의 지배를 뒷받침해 주는 사회체계를 일컫는 제도”로 “가부장제적인 가족 형태와 사회체계는 서로 규정하고 재생산하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 둘은 분리해서 고찰될 수 없고 종합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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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생계와 직결되는 ‘바깥’일이고, 가장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책임지며 가족의 중대사를 결정한다. 그렇기에 남성들이 바깥에서 생계와 직결되는 중대한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여성들은 집에서 사소한 일을 담당하는 것으로 치부되어왔다. 이런 가부장제에서 가장으로서의 최고 아웃풋은 자기 가족을 최대한 ‘바깥’의 위험으로부터 지키면서 안으로는 소중하게 보듬는 사람이다. 공과 사가 분명하여 밖에서는 도를 지키고 안에서는 온정을 베푸는 이런 가장들은 종종 섬세하게 일기를 남기기도 하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곤 하지만 존재감 제로에 도전하다 못해 땅 파고 들어가는 케이스도 있기 마련이다.


〈뮤지컬 《숲속에서》(1987)의 오리지널 포스터〉 (출처: Wikipedia)


미국 브로드웨이가 자랑하는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 《숲속에서》(1987)에는 존재감 시들시들한 빵집 주인과 아예 실종된 빵집 주인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그림형제의 동화 가운데 『신데렐라』, 『라푼젤』, 『빨강 두건』, 『잭과 콩나무』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다.


〈영화화 된 《숲속에서》(2014)의 한 장면〉 (출처: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1막에서는 주요 등장인물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숲속으로 달려간다. 신데렐라는 구박받던 신세에서 벗어나 한 번만 왕자의 파티에 가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라푼젤은 자신을 가둔 엄마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고, 빨강 두건은 할머니께 갓 구운 빵을 가져다드리기 위해, 잭은 하나뿐인 친구인 암소 밀키 화이트를 시장에 내다 팔아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숲으로 향한다.

그런데 여기에 의외의 설정이 하나 살짝 끼어든다. 원작인 동화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물인 빵장수 부부다. 빵장수 부부는 간절하게 아이를 원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아이가 생기질 않는다. 이웃집에 사는 무시무시한 마녀가 이들에게 불임의 저주를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간절히 애원하는 빵장수 부부에게 마녀는 세 가지 물건을 가져오면 저주를 풀어 주겠다고 말한다. 옥수수수염처럼 노란 금발, 우유처럼 하얀 암소, 금색 구두.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신데렐라가 파티가 열리는 성으로 출발하던 그날 밤, 빵장수와 그의 아내는 동화 속의 숲으로 뛰어들어 동화를 휘저으며 세 가지 아이템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금색 구두는 신데렐라의 발에, 노란 금발은 라푼젤에게, 하얀 암소는 잭에게 있다. 이들이 숲속을 이리저리 헤맨다면 똑바로 자신의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유일한 인물은 빨강 두건을 쓴 소녀다. 식탐이 남다르지만, 할머니께 빵을 가져다드리기 위해 옆을 보지 않고 달리던 이 소녀에게는 늑대가 찾아온다. 수많은 동화 속 인물이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면서도, 1막은 그럭저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신데렐라와 라푼젤은 왕자를 찾았고, 잭은 보물을 챙겨 거인의 나라에서 도망쳤고 거인은 추락해서 죽었다. 빵장수 부부에게 걸린 저주가 풀렸으며, 그 덕에 마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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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막에는 수많은 떡밥들이 널린 채로 이 해피엔딩이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그리고 2막은 추락한 거인의 아내가 남편의 복수를 위해 아랫 세상에 나타나 잭을 내놓지 않으면 다 부숴버리겠다고 날뛰는 것으로 시작한다. 왕실은 자기들만 살자고 백성들을 버리고 앞장서서 달아나는데, 그중에는 바람둥이 신데렐라의 남편도 있다. 거인의 아내는 잭의 집을 부수었고 잭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다. 아이가 생긴 이후 다른 아이들이 남 같지 않은 빵장수 부부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잭과 빨강 두건을 챙겨가며 살길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빵장수는 자신의 아내를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정도 잠시 아내는 거인의 아내에게 밟혀 세상을 떠나고 남은 이들은 힘을 합쳐 거인의 아내를 물리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신데렐라는 바람둥이 남편을 떠나고 빵장수는 자신의 갓난 아이를 기르면서 고아가 된 잭과 빨강 두건을 쓴 소녀를 거둔다. 가정에서 존경받는 가장이고 싶었던 그는 가장 원치 않는 방식으로 그 바람을 이루게 된다.

사실 이 작품 안에서 가장 게으른 가부장은 신데렐라의 아버지다. 신데렐라의 아버지는 어떻게 각색해도 골치 아픈 존재다. 이 작자는 새로 맞이한 아내와 그 딸들이 자신의 친딸을 구박하고 하녀처럼 부려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자다. 이 자는 그래서 각색에 따라 이야기가 시작될 때 아예 저승에 보내거나 언급도 제대로 하지 않기 일쑤다. 그만큼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친아버지라는 인물은 골치 아픈 존재다.


〈고전소설 『장화홍련전』〉 (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우리나라 고전 중에도 가부장으로의 최소의 인정도 없는, 처리가 골치 아픈 가장이 있다. 바로 장화와 홍련의 아버지다. 계모 이야기의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치밀한 내용이기도 하거니와 실화가 바탕이라는 실감 나는 설명이 곁들여져 더 으스스하다. 장화와 홍련은 영민하고 아름다워 마을에서 칭송이 자자한 딸들인데 그들의 아버지 배씨는 아내를 잃은 후, 단지 아들을 잘 낳는다는 것에 눈이 멀어 박색인 허씨를 아내로 맞는다. 허씨는 아들을 줄줄이 낳아 배씨를 기쁘게 하면서, 뒤로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장화와 홍련을 구박한다. 결국, 허씨는 장화와 홍련이 시집 갈 때 가져갈 지참금이 아까워 혼인을 앞둔 장화에게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우물가에 밀어 죽이고 이어 언니의 부정을 믿지 않았던 동생 홍련까지 죽여버린다. 이때, 앞장서서 일을 처리한 것은 허씨가 낳은 큰아들 장쇠이다.

억울한 두 사람의 혼령은 마을 원님이 부임할 때마다 귀신으로 나타난다. 부임한 원님들마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강심장의 지원자가 나선다. 이 원님은 자매의 혼령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도리어 자매의 하소연을 듣고는 마침내 허씨 모자와 아버지 배씨를 불러 모든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우물에 빠져 있던 자매의 시신을 거두어 제를 지내준다. 허씨와 장쇠는 벌을 받지만, 아버지 배씨의 결말은 버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배씨가 어진 새 아내를 맞이하고 죽은 장화와 홍련이 그들의 딸로 다시 환생한다는 결말도 있고, 배씨가 참회하며 살아간다는 내용도 있지만 어쩐 일인지 모든 잘못은 허씨에게 돌아갈 뿐 배씨는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애초에 아들을 향한 배씨의 집착과 묵인이 아니었다면 일어날 일이 아니건만 모든 책임은 계모인 허씨와 장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때로 장쇠는 허씨가 데리고 들어온 아들로 이야기가 바뀌기기는 할지언정 배씨의 묵인에는 변함이 없다.


〈국립창극단에서 제작한 《장화 홍련》(한태숙 연출, 2012)〉 (출처: 국립창극단)


국립창극단에서 제작했던 호러 장르로서의 창극 《장화 홍련》(한태숙 연출, 2012)은 어떠한 경우에도 해학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판소리의 미덕에서 웃음기를 쏙 뺐다.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호러가 될 법하지만, 호러 창극 《장화 홍련》은 각자의 욕망이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충돌하면서 비극이 발생한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에는 사이코패스인 아들이 어머니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정체를 일찌감치 깨닫고 의무를 다하되 사랑은 주지 못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사람의 감정은 이성만으로는 어떻게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극 속의 새어머니는 의붓딸인 장화와 홍련을 구박하기는커녕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만,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었고, 장화와 홍련 역시 새어머니를 친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아내로서 거리를 두고 대하면서 비극이 일어난다. 영민한 장화는 약혼자와 유학을 떠날 예정이고 홍련은 그런 장화를 따라 유리 감옥 같은 집을 떠날 생각에 들뜬다. 하지만 장화보다 지능이 떨어지고 사회적으로 출세할 길이 막힌 듯이 보이는 장쇠가 장화를 죽여버리고, 어머니 허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 편에 서서 증거인멸을 위해 홍련마저 죽인다.

2014 국립창극단 장화 홍련 재공연 홍보영상   더보기




호러 창극 《장화 홍련》은 온통 어두운 검은 무대 위에 유일하게 빛났던 장화의 결혼식 베일은 빛을 잃고, 장화와 홍련이 복수를 향해 나아갈 때는 장화와 홍련이 더 무서운 인물처럼 그려진다. 애정이라고는 없이 한 집안에서 한정된 재산을 나눠 써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닥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가정 내 살인을 다뤘다. 이 작품은 판소리에 그리스 비극처럼 깊고 무거운 코러스 기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귀신으로 나타나 원을 푼다는 고전적인 드라마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 또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조차 아버지는 전통적인 수수방관의 아이콘이다. 모든 일은 등장하는 여성 간의 질투와 알력으로 일어나고 아버지는 이리저리 우유부단하게 부평초처럼 떠돌아 관객에게 고구마를 선사할 뿐이다. 어쩌면 이 작품 안의 가장 큰 호러는 아버지라는 가부장제의 테두리가 가족을 지킬 의지가 없는 사실이다.

신데렐라든, 장화와 홍련이든 가장 큰 비극은 가부장제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조선 후기에 확립된 장자 중심의 가부장제는 가족제도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체계로 여전히 공고한 지위를 누린다. 특히나 아버지가 누렸던 ‘아내’로서의 어머니를 보고 자란 현재의 청년들에게 있어서 여성은 그 형태를 벗어나는 것이자 남성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규정되면서 남녀 간의 갈등도 극대화되는 추세다. 결국 이 비합리적인 체계는 이야기 속에서 가장 중심을 잡아야 할 인물인 아버지부터 무너지게 하고 그 아래의 가족이 살해되는 결말에 이른다. 오늘의 현실에서는 그 아이들이 아예 태어나지도 않는 시점에 다다랐다.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면 이 단단한 가부장제를, 이제쯤은 버릴 때도 되었건만.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딸의 혼례식-신랑과 신부가 잔을 주고 받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3월 26일~3월 27일

1616년 3월 26일, 잔치를 위해 요리사[숙수(熟手)] 이복(李福)이 김택룡의 집에 와서 이진동과 함께 요리를 했다.

다음 날 27일, 김개일과 김경건이 신랑 집안의 손님들을 맞기 위해 택룡의 집으로 왔다. 잠시 뒤 혼서(婚書)가 도착하였는데, 사위의 이름은 ‘근오(謹吾)’였다. 택룡은 언복(彦福)을 시켜서 사위를 마중하도록 했다. 오후 세 네 시쯤 되자[신시(申時)], 사위가 도착했다. 신랑을 수행하여 함께 온 사람[요객(繞客)]은 참봉 권호신과 그 아우 즉 신랑의 아버지 준신, 그리고 중방(中房) 이지남(李智男)이었다.

곧 합근례를 행하고, 예작(禮酌)을 차려 베풀었다. 택룡의 아들 김숙도 참여하여 행했다. 저녁이 되어 혼례식이 끝나고 신랑 집안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이 날 광주의 성안의가 택룡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택룡이 혼례 때문에 너무 바빠서 답장을 못했다. 다만 심부름꾼을 시켜 사정을 직접 전달하게 하고 더불어 호도와 포육(脯肉)을 보냈다. 혼례에 손님으로 온 생원 홍이성의 처와 그 아들 · 김개일의 처와 그 아들 · 남석경의 처 · 이여의 처가 택룡의 집에 남아 모두 모였다.

“아버지와 봉황의 꿈”

최흥원, 『역중일기』, 1738년 7월 11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책을 보는 선비에게도 농사를 돌보는 것은 집안의 급무이다”

남붕, 『해주일록』,
1932년 10월 10일~10월 13일

1932년 10월 10일. 남붕은 아침에 아이 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후 머슴들을 시켜 똥거름과 재거름 위에 미려에 심을 보리 종자를 쌓아 놓았다. 내일 보리 파종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미려의 논에 보리를 파종했는데, 남붕은 새벽 일과를 마치고, 아침에 아이들을 가르친 후 올해 시전에 관해 논의하는 문제로 종파에 편지를 써서 부치느라 아침에 다소 분주했다. 그리고 백일동 어머님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오후에야 미려의 논에 나가볼 수 있었다.

머슴과 일꾼들이 보리 파종할 땅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다듬은 후 보리를 파종했는데, 일꾼이 몇 명 안 되어 겨우 일을 마치기도 했지만, 남붕이 가기 전까지 해놓은 일이 온전하지 않아 일이 늦기도 했다. 남붕이 보아하니 새로 흙을 갈아엎어 놓긴 하였으나 주먹만 한 흙덩이가 바둑알처럼 어지럽고 별처럼 깔려서 이 상태로는 보리 종자를 넣을 수 없었다. 남붕은 결국 머슴과 일꾼에게 다시 써레질로 곱게 부시게 하고 그런 뒤에 보리를 파종하게 했다.

남붕은 만약 자신이 이때 나가 보지 않고 거친 땅에 이미 파종을 한 다음에 나갔거나, 머슴에게 맡겨놓고 나가보지 않았다면 이번 보리농사는 허사가 되어 심하게 후회할 뻔 했다고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는데, 남붕은 이제 겨우 한 번 나가서 보리농사를 감독했는데 일이 이와 같았다.

다음날에도 파종하는 일로 소란스러워 남붕은 종일토록 공부를 접었다. 독서하는 선비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고수하면서 전혀 농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농사에 힘쓰는 한 가지 절차는 집안의 급무이고, 배우는 자가 세상은 알지 못하면서 오래도록 책만 보는 것은 집안을 보전하는 양책이 아니다.

“든든한 아들과 함께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년 4월 18일 1635년 6월 20일

1635년 4월 18일, 김광계는 기제사를 준비하러 지례(知禮)로 떠났다. 원래는 김광계의 마을에서 지낼 기제사였으나 김광계의 넷째 아우 김광악(金光岳)의 부인 권씨가 4월 11일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마을이 불안하여 지례로 제사 장소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지례로 가는 길에 아들 김렴이 따라왔다.

4월 25일에는 아들과 함께 『심경心經』을 강독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김광계 홀로 운암사(雲巖寺)에 갔는데, 곧 염이 따라와 김광계와 함께 머무르며 『상서』를 강독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운암사에 있다가, 4월 30일에는 함께 배를 타고 침락서재로 갔다. 5월 2일에도 역시 아들 염을 데리고 광산 김씨의 묘소들이 있는 거인(居仁)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5월 20일, 6월 20일에도 염은 자신의 사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러 와서 며칠간 머무르다 갔다.

그 뒤에도 끊임없이 제사와 성묘가 있었기 때문에 염은 자주 김광계를 만나러 와야 했으며, 김광계 역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길 때 염을 데리고 다니며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염은 서서히 김광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든든한 존재로 성장해 나갔다.

“들판에는 목화 집안에는 돼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2년 8월 15일~26일

그리 점잖은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으나 집안 살림 경영은 힘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노상추의 집안 살림은 그리 넉넉지 않았고 가끔은 곤궁하다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였다. 노상추가 서울에 올라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을 돌본 것은 조카들과 아들이었다. 이들이 해 놓은 집안일이 노상추의 눈에는 영 마뜩잖았다. 그래서 노상추는 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집안 살림을 효율적으로 경영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농사란 것은 사람이 아무리 애쓴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흉작을 면키 어려웠다. 올해도 목화가 흉작이었다. 처음 시장가격은 30근에 1백 동이었다. 모름지기 흉작이라면 그 가격도 오르기 마련이건만 올해 목화는 너무나도 헐값이었다. 듣자 하니 수령이 농민들에게 성전(城錢)을 빌려주고 3할의 이자를 거두기로 하였는데, 시장이 한 번 열릴 때마다 이자를 마구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농민들이 이자를 내기 위해 목화를 마구 팔아야 해서 목화 값이 헐값이 된 것이다. 덕분에 노상추의 목화 값도 똥값이 되었다.

노상추는 목화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먼저 상수리나무와 잣나무를 심어서 도토리와 잣을 수확해 보기로 했다. 조카 기엽을 수월산에 보내서 상수리를 심어놓은 것을 살펴보게 했고, 또 집 뒤 언덕에 심어놓은 잣나무도 살펴보았다. 상수리는 심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수확할 것이 없었으나 잣나무는 열매를 맺어서 18송이를 딸 수 있었다. 이 잣나무는 무술년(1778) 봄에 대곡사 인근 잣나무 숲에서 딴 잣을 심어놓은 것이었다. 벌써 25년이 흘렀는데, 크게 자란 잣나무가 17그루이다. 노상추는 수확한 잣을 사당에 올렸다.

또 돼지도 한 번 쳐 보기로 했다. 많이 길러서 그 고기를 팔면 어떨까 싶어서 돼지우리도 지었는데 과연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3년 12월 28일

1763년 12월 28일. 계미년도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흐린 날씨에 간간이 눈발이 뿌리는 날이었고, 어머니 병환도 어제와 같은 정도였다.

최근 딸아이가 부쩍 몸이 쇠하여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무언가 기운이 날 만한 보양 음식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 한탄스러웠다. 얼마 전 아들을 잃고 난 최흥원은 남은 딸들마저 허약한 몸으로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걱정이 부쩍 늘었다. 그리하여 어제는 사람을 시장에 보내어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좀 사 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장에 보낸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즘 시장에 어물 귀하기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청어도 1냥이나 하고, 생대구도 1냥 정도는 줘야 구할 수 있습니다. 어물 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여서 꿩 한 마리도 7전이나 나가니, 도저히 그 가격으론 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최흥원이 들어보니 정말로 그 정도의 가격이라면 쉬이 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파리한 딸의 얼굴을 보며 최흥원은 고민에 빠졌다. 무리를 해서라도 보양이 될만한 생선이나 꿩을 좀 사다가 딸아이에게 먹여야 하는지... 한편으론 아프신 어머니 반찬거리를 대기도 어려운 형편에 무리한 처사인가 싶어 최흥원은 쉬이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힘든 하인을 격려하고 동네의 작은 잔치를 열며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6년 3월 9일~1859년 6월 21일

1846년 3월 9일, 서찬규는 회시에 합격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닷새 안에 가야 해서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달려가니 신석룡은 뒤따라 갈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천천히 오라고 하고, 덕우와 함께 갔다. 연일 길을 재촉했더니 노복들은 힘들다고 하고 창졸들도 발이 부르텄다고 했다. 서찬규는 밤에 개를 삶도록 하고 술을 사서 하인배들을 배불리 먹였다.

1849년 3월 4일에는 남산의 족형 재씨·자형 평선씨 등 모두 10여 이 술을 가지고 수레를 타고 공부하고 있는 서찬규를 찾아 암자로 왔다. 그들은 함께 예계동으로 들어가 화고를 삶고, 오후 늦게 암자로 돌아와 함께 묵었다.

서찬규는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1850년 4월 29일에 산격의 선영에 가서 성묘하고, 이종 원규[자는 선장(善長)]씨 집으로 갔다. 그가 먼 길에서 돌아왔다고 개고기를 삶고 술을 마련해 주었다.

1859년 5월 5일, 서찬규는 여러 친구들과 뱃놀이하며 개를 삶아 먹고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50~60인이 되었다.

6월 21일에는 서찬규의 부친이 연신제의 말애 폭포로 목욕을 하러 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동네 사람이 거의 다 모였다. 오후에는 구암서원에 가서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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