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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남자들, 가장

담담 웹진 4월호 「백이와 목금」에서는 사또에게 억울한 죽음을 고하는 배씨 자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또는 계모를 처벌하여 자매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부모의 학대로 자녀가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인데도, 계모의 악행과 처벌만 언급되고 다른 부모인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이 집의 가장인 아버지 배씨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에겐 아무 책임도 없었을까요? 배씨 자매는 장화와 홍련으로 생각됩니다.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에서도, 이 고전을 변주한 여러 창작물에서도 아버지 배씨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계모와 딸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바깥’ 어른인 배좌수에겐 책임을 물을 수 없었을까요?

이수진 작가님은 「가부장이 가장 노릇마저 못하여」에서 아버지 배씨에게 책임을 묻고자 합니다. 창극 ≪장화 홍련≫에서도 아버지 배씨는 자녀를 돌보지 않았지만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극이 ‘호러물’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호러’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던 가장 배씨가 아닐까요? 이 작품에서 가장 큰 호러는 “가족을 지킬 의지가 없는 아버지”였고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던 “가부장제가 바로 비극”이었다고 합니다. 가부장제는 그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가장이 가족을 열심히 돌보고 지켜야만 제대로 작동하는 제도인 것 같습니다. 작가님은 뮤지컬 ≪숲속에서≫를 소개하면서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배좌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신데렐라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빵장수는 아내를 잃는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가 돌보고 지켜온 이들과 가정을 꾸리고 다시 가장이 됩니다.

가정을 꾸리고 유지하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살림’입니다. 이 살림을 살아야 하는 이가 조선시대에는 가장이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가장의 살림살이가 궁금해집니다. 김명자 교수님은 「18세기 대구 양반 최흥원의 가정경영 분투기」에서, 최흥원(崔興遠)이 『역중일기(曆中日記)』에 기록한 가장의 살림살이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농사로 얻은 수확물이 주된 수입원이었던 시대라서, 최흥원은 농사 경영과 그 수확물의 나눔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또 제사 주재로 사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혼인과 교육으로 집의 품격을 올렸으며, 의학지식으로 가족을 질병에서 구하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과 ‘식구(食口) 돌보기’입니다. 최흥원 선생이 돌보는 이들은 집안 가족에만 한정되지 않고 식구와 빈객에게까지 확장된다는 것, 선생이 그들을 돌봄에는 나눔과 정성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정성과 나눔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음식’입니다. 최흥원 당신은 거칠고 절제된 식사를 하였지만, 선생이 어머니께 드리는 음식에는 온갖 정성을 기울여 어머니 건강을 지켰습니다. 봉제사접빈객에 쓰는 음식에도 정성을 기울여 유교적 질서와 가치를 지켰습니다.

여기에 실용적인 사고를 겸한 김유(金綏)와 김령(金坽)은 『수운잡방(需雲雜方)』이라는 조리서를 집필하였습니다. 실용서는 실제로 활용하였을 때 생명을 얻습니다. 조윤서 작가님은 『수운잡방』의 내용과 이 귀한 고조리서를 활용하여 브랜드웹툰을 제작했던 이야기를 「조선 양반가의 손님 초대 요리는 미슐랭 부럽지 않은 귀한 맛이다」에 담아 주었습니다. 웹툰 ≪안동 선비의 레시피≫는 안동 양반가의 음식을 주제로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소통, 조선시대와 현대 사이의 소통, 그리고 고조리서의 현대적 이해와 활용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수운잡방』의 집필자들이 ‘봉제사접빈객’과 확장된 ‘식구 돌보기’에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 알 수 있습니다.

식구(食口)의 확장과 그들에 대한 가장의 돌봄은 「백이와 목금-보릿고개 넘기기」 속 정진사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보릿고개에 가뭄까지 닥치자, 정진사는 집 안팎 뿐만 아니라 고을 사람들 형편을 두루 살피고, 곳간을 열고 곡식을 내어 이들을 먹입니다. 정진사에겐 식객인 목금이 뿐만 아니라 고을 사람들 모두가 돌보아야 할 식구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호에 이어 6월호에도 배씨 자매가 나타납니다.

정진사처럼 가까이에서 식구들을 돌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독선생 부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객식구’가 되어 있습니다. 독선생은 모처럼 행옹선생과 부자상봉하였지만, 자신의 처지에 오히려 서글퍼진 것 같습니다. 대물림된 체한 증상과 그에 대한 태화탕 처방으로, 태화탕의 김처럼 ‘모락모락’ 올라오는 부자 사이의 정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났다 헤어지면 고향과 가족이 더 그리워지고 걱정도 깊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고향과 가족에게 돌아가게 되면, 집에 “오헌(吾軒)”이란 편액을 걸어둘 것 같기도 합니다.

「즐거운 나의 집 오헌(吾軒)」에 소개된 집주인 박제연(朴齊淵) 선생은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면서 내내 고향집과 가족들을 그리워하였고 돌아갈 날을 꿈꾸었습니다. 그에게 고향 영주에 있는 오헌은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고픈 곳이기에 <오헌유거(吾軒幽居)>란 시에 돌아가 조용히 살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을 담았다고 합니다.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면서도 내내 가장의 책무를 내려놓지 않았던 선생이 귀향해서 바람대로 살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최흥원과 김유 두 분 선생처럼 가장의 살림살이에 여전히 분주하셨을 것만 같습니다.




편집자 소개

글 : 조경란
조경란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수료한 후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들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아까워서 드라마 역사 자문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참여했던 작품이 “세작-매혹된 자들”, “붉은 단심”, “옷소매 붉은 끝동”, “녹두꽃”, “장영실”, “징비록”, “정도전” 등 20여 편 정도 됩니다
“딸의 혼례식-신랑과 신부가 잔을 주고 받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3월 26일~3월 27일

1616년 3월 26일, 잔치를 위해 요리사[숙수(熟手)] 이복(李福)이 김택룡의 집에 와서 이진동과 함께 요리를 했다.

다음 날 27일, 김개일과 김경건이 신랑 집안의 손님들을 맞기 위해 택룡의 집으로 왔다. 잠시 뒤 혼서(婚書)가 도착하였는데, 사위의 이름은 ‘근오(謹吾)’였다. 택룡은 언복(彦福)을 시켜서 사위를 마중하도록 했다. 오후 세 네 시쯤 되자[신시(申時)], 사위가 도착했다. 신랑을 수행하여 함께 온 사람[요객(繞客)]은 참봉 권호신과 그 아우 즉 신랑의 아버지 준신, 그리고 중방(中房) 이지남(李智男)이었다.

곧 합근례를 행하고, 예작(禮酌)을 차려 베풀었다. 택룡의 아들 김숙도 참여하여 행했다. 저녁이 되어 혼례식이 끝나고 신랑 집안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이 날 광주의 성안의가 택룡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택룡이 혼례 때문에 너무 바빠서 답장을 못했다. 다만 심부름꾼을 시켜 사정을 직접 전달하게 하고 더불어 호도와 포육(脯肉)을 보냈다. 혼례에 손님으로 온 생원 홍이성의 처와 그 아들 · 김개일의 처와 그 아들 · 남석경의 처 · 이여의 처가 택룡의 집에 남아 모두 모였다.

“아버지와 봉황의 꿈”

최흥원, 『역중일기』, 1738년 7월 11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책을 보는 선비에게도 농사를 돌보는 것은 집안의 급무이다”

남붕, 『해주일록』,
1932년 10월 10일~10월 13일

1932년 10월 10일. 남붕은 아침에 아이 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후 머슴들을 시켜 똥거름과 재거름 위에 미려에 심을 보리 종자를 쌓아 놓았다. 내일 보리 파종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미려의 논에 보리를 파종했는데, 남붕은 새벽 일과를 마치고, 아침에 아이들을 가르친 후 올해 시전에 관해 논의하는 문제로 종파에 편지를 써서 부치느라 아침에 다소 분주했다. 그리고 백일동 어머님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오후에야 미려의 논에 나가볼 수 있었다.

머슴과 일꾼들이 보리 파종할 땅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다듬은 후 보리를 파종했는데, 일꾼이 몇 명 안 되어 겨우 일을 마치기도 했지만, 남붕이 가기 전까지 해놓은 일이 온전하지 않아 일이 늦기도 했다. 남붕이 보아하니 새로 흙을 갈아엎어 놓긴 하였으나 주먹만 한 흙덩이가 바둑알처럼 어지럽고 별처럼 깔려서 이 상태로는 보리 종자를 넣을 수 없었다. 남붕은 결국 머슴과 일꾼에게 다시 써레질로 곱게 부시게 하고 그런 뒤에 보리를 파종하게 했다.

남붕은 만약 자신이 이때 나가 보지 않고 거친 땅에 이미 파종을 한 다음에 나갔거나, 머슴에게 맡겨놓고 나가보지 않았다면 이번 보리농사는 허사가 되어 심하게 후회할 뻔 했다고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는데, 남붕은 이제 겨우 한 번 나가서 보리농사를 감독했는데 일이 이와 같았다.

다음날에도 파종하는 일로 소란스러워 남붕은 종일토록 공부를 접었다. 독서하는 선비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고수하면서 전혀 농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농사에 힘쓰는 한 가지 절차는 집안의 급무이고, 배우는 자가 세상은 알지 못하면서 오래도록 책만 보는 것은 집안을 보전하는 양책이 아니다.

“든든한 아들과 함께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년 4월 18일 1635년 6월 20일

1635년 4월 18일, 김광계는 기제사를 준비하러 지례(知禮)로 떠났다. 원래는 김광계의 마을에서 지낼 기제사였으나 김광계의 넷째 아우 김광악(金光岳)의 부인 권씨가 4월 11일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마을이 불안하여 지례로 제사 장소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지례로 가는 길에 아들 김렴이 따라왔다.

4월 25일에는 아들과 함께 『심경心經』을 강독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김광계 홀로 운암사(雲巖寺)에 갔는데, 곧 염이 따라와 김광계와 함께 머무르며 『상서』를 강독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운암사에 있다가, 4월 30일에는 함께 배를 타고 침락서재로 갔다. 5월 2일에도 역시 아들 염을 데리고 광산 김씨의 묘소들이 있는 거인(居仁)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5월 20일, 6월 20일에도 염은 자신의 사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러 와서 며칠간 머무르다 갔다.

그 뒤에도 끊임없이 제사와 성묘가 있었기 때문에 염은 자주 김광계를 만나러 와야 했으며, 김광계 역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길 때 염을 데리고 다니며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염은 서서히 김광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든든한 존재로 성장해 나갔다.

“들판에는 목화 집안에는 돼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2년 8월 15일~26일

그리 점잖은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으나 집안 살림 경영은 힘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노상추의 집안 살림은 그리 넉넉지 않았고 가끔은 곤궁하다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였다. 노상추가 서울에 올라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을 돌본 것은 조카들과 아들이었다. 이들이 해 놓은 집안일이 노상추의 눈에는 영 마뜩잖았다. 그래서 노상추는 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집안 살림을 효율적으로 경영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농사란 것은 사람이 아무리 애쓴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흉작을 면키 어려웠다. 올해도 목화가 흉작이었다. 처음 시장가격은 30근에 1백 동이었다. 모름지기 흉작이라면 그 가격도 오르기 마련이건만 올해 목화는 너무나도 헐값이었다. 듣자 하니 수령이 농민들에게 성전(城錢)을 빌려주고 3할의 이자를 거두기로 하였는데, 시장이 한 번 열릴 때마다 이자를 마구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농민들이 이자를 내기 위해 목화를 마구 팔아야 해서 목화 값이 헐값이 된 것이다. 덕분에 노상추의 목화 값도 똥값이 되었다.

노상추는 목화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먼저 상수리나무와 잣나무를 심어서 도토리와 잣을 수확해 보기로 했다. 조카 기엽을 수월산에 보내서 상수리를 심어놓은 것을 살펴보게 했고, 또 집 뒤 언덕에 심어놓은 잣나무도 살펴보았다. 상수리는 심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수확할 것이 없었으나 잣나무는 열매를 맺어서 18송이를 딸 수 있었다. 이 잣나무는 무술년(1778) 봄에 대곡사 인근 잣나무 숲에서 딴 잣을 심어놓은 것이었다. 벌써 25년이 흘렀는데, 크게 자란 잣나무가 17그루이다. 노상추는 수확한 잣을 사당에 올렸다.

또 돼지도 한 번 쳐 보기로 했다. 많이 길러서 그 고기를 팔면 어떨까 싶어서 돼지우리도 지었는데 과연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3년 12월 28일

1763년 12월 28일. 계미년도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흐린 날씨에 간간이 눈발이 뿌리는 날이었고, 어머니 병환도 어제와 같은 정도였다.

최근 딸아이가 부쩍 몸이 쇠하여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무언가 기운이 날 만한 보양 음식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 한탄스러웠다. 얼마 전 아들을 잃고 난 최흥원은 남은 딸들마저 허약한 몸으로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걱정이 부쩍 늘었다. 그리하여 어제는 사람을 시장에 보내어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좀 사 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장에 보낸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즘 시장에 어물 귀하기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청어도 1냥이나 하고, 생대구도 1냥 정도는 줘야 구할 수 있습니다. 어물 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여서 꿩 한 마리도 7전이나 나가니, 도저히 그 가격으론 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최흥원이 들어보니 정말로 그 정도의 가격이라면 쉬이 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파리한 딸의 얼굴을 보며 최흥원은 고민에 빠졌다. 무리를 해서라도 보양이 될만한 생선이나 꿩을 좀 사다가 딸아이에게 먹여야 하는지... 한편으론 아프신 어머니 반찬거리를 대기도 어려운 형편에 무리한 처사인가 싶어 최흥원은 쉬이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힘든 하인을 격려하고 동네의 작은 잔치를 열며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6년 3월 9일~1859년 6월 21일

1846년 3월 9일, 서찬규는 회시에 합격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닷새 안에 가야 해서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달려가니 신석룡은 뒤따라 갈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천천히 오라고 하고, 덕우와 함께 갔다. 연일 길을 재촉했더니 노복들은 힘들다고 하고 창졸들도 발이 부르텄다고 했다. 서찬규는 밤에 개를 삶도록 하고 술을 사서 하인배들을 배불리 먹였다.

1849년 3월 4일에는 남산의 족형 재씨·자형 평선씨 등 모두 10여 이 술을 가지고 수레를 타고 공부하고 있는 서찬규를 찾아 암자로 왔다. 그들은 함께 예계동으로 들어가 화고를 삶고, 오후 늦게 암자로 돌아와 함께 묵었다.

서찬규는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1850년 4월 29일에 산격의 선영에 가서 성묘하고, 이종 원규[자는 선장(善長)]씨 집으로 갔다. 그가 먼 길에서 돌아왔다고 개고기를 삶고 술을 마련해 주었다.

1859년 5월 5일, 서찬규는 여러 친구들과 뱃놀이하며 개를 삶아 먹고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50~60인이 되었다.

6월 21일에는 서찬규의 부친이 연신제의 말애 폭포로 목욕을 하러 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동네 사람이 거의 다 모였다. 오후에는 구암서원에 가서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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