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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보릿고개 넘기기


비가 오지 않은 지 벌써 오래라, 망허촌 사또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봄철에서 여름철로 넘어가는 이때는 춘궁기라 불린다. 가을에 수확한 쌀이 똑 떨어지고 겨울에 파종한 보리는 아직 수확할 수 없는 때인지라 이 시기를 넘기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는 연이은 기근과 양반, 탐관오리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19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출처: ㈜ 쇼박스)


목금이도 눈치가 좀 보이긴 했지만 점심, 저녁을 백이네 집에 죽치고 앉아서 먹어치우곤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은 굶고 나오는 것이니 사실상 하루 끼니를 모두 백이에게 의지하는 셈이었다. 물론 망허촌에서 제일 큰 집인 정 진사네 입장에서 여자아이 입 하나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날이 이렇게 가무니, 보리농사 다 망할까봐 다들 혀가 바짝 타고 있다더라.”

목금이 바깥소식을 백이에게 전했다.

“관에서 환곡은 아직이라니?”

“환곡은 벌써 지난달에 다 풀었지. 그나마 그거라도 있어서 미음이라도 먹었다는 집들이 태반이야.”

백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을되면 환곡이 그렇게 무섭다는데, 다들 아무 생각도 없는 건지 그걸 다 받아먹었구나.”

“그런 게 아니지. 지금 안 먹으면 가을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먹은 것뿐이야.”

백이의 얼굴도 그 말에 심각해졌다. 두 소녀는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015년, 극심한 가뭄에 안동 와룡면 지리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출처: 영남투데이)


“비라도 오면 마음이 좀 편해질 텐데.”

“참, 목금아, 사또 나리가 기우제를 지낸다는 말이 있던데, 그래도 소용없나 보지?”

목금이는 괜히 얼굴을 붉혔다.

“몰라. 사또 나리가 뭐 하시는지는.”

그때였다. 밖에서 삼월이가 말했다.

“목금 낭자, 주인마님이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널 왜 찾는 거지?”

찾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식객 처지에 주인이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목금은 냉큼 사랑채로 달려갔다. 백이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목금과 함께 갔다.

“부르셨습니까?”

섬돌 아래서 인사를 올리니 정 진사가 사랑채 문을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었다.

“그래, 왔느냐? 이리 올라오너라.”

두 소녀가 자리를 잡자 정 진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뭄이 극심하여 참으로 걱정이 크구나.”

목금이 대답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런 가뭄은 본 적이 없다고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올해 드디어 목화를 수확할 해가 되었다고 연초에 기대가 많았는데, 이래서야 목화가 열리기나 할지 걱정이구나.”

목화는 물을 많이 필요로 한다. 지독한 가뭄으로 물이 말라버렸으니 목화가 열릴지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목화보다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들도 다들 기진맥진해서 축 늘어져 있는 실정입니다.”

“환곡이 더 나올 가능성도 없는 것 같고. 사또는 철 모르고 기우제나 올린다고 산속을 돌아다니기만 하니… 쯧쯧쯧.”

그러다 정 진사는 문득 정색을 하고 목금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수고해 줄 일이 있다. 하필 지금 마름이 배탈이 나서 꼼짝 못 하고 있구나. 우리 소작인들이랑 외거노비의 형편이 어떤지 좀 살펴보고 와 다오.”

백이가 이의를 제기했다.

“아버님, 그거라면 돌쇠를 시키시면 되지 않아요?”

“돌쇠는 글을 모르잖아. 집집 사정을 적어 올 수가 없어서 안 된다. 돌쇠는 목금이랑 같이 다니라고 할 생각이다.”

목금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들 형편이 어려우니 제가 빨리 알아보고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너만 믿겠다. 형편이 너무 어려운 집은 어떻게든 도와야겠지. 그러니 잘 살펴보고 와다오. 옛날 영조 대왕께서 계비 간택 때 후보 아기씨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가 무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다들 여러 고개 이름을 댔는데, 정순왕후께서 보릿고개라 답하셨단다. 사람들이 넘기 제일 어려운 고개가 보리가 미처 여물지 않은 바로 이때라는 이야기지.”

“당부 명심하겠습니다.”


〈「사창절목(社倉節目)」. 사창은 조선시대 각 촌락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마을 사람들 상황은 정 진사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목금이가 보고한 것에 따라 정 진사는 곡식 창고를 열어 소작인들에게 곡물을 풀었다. 정 진사가 이렇게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김 생원도 따라 해야만 했다. 사또는 두 가문의 선행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고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까지 했다.

물론 공짜로 푼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자는 받지 않고 가을 추수 후에 내준 것만 받기로 했다.

“아버지, 이렇게 하다가 우리도 굶는 거 아니에요?”

백이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투정하자, 정 진사는 엄한 얼굴로 답했다.

“소작인들이 없어지면 농사는 누가 짓는단 말이냐? 당장 눈앞의 이익만 보고 행동했다간 큰 낭패를 보게 마련이다.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세상이니 그런 말은 농으로라도 해서는 안 된다.”

공연히 농담 한마디 했다가 야단맞은 백이는 시무룩해져서 홀로 집을 나왔다. 목금이나 보러 가려고 생각하고 세책방으로 가는데, 문득 등허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불돌이가 따라왔나?”

불돌이는 영물 양수지조(陽燧之鳥)로 불길을 끌고 다닌다. 백이네 구들장 밑에서 살고 있었다.

“아니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불돌이는 뭔가 편안하게 따스한 불기운을 보내는데, 지금 느껴지는 것은 화상이라도 입힐 듯이 따가운 느낌이었다.

“위험해!”

목금이 달려오며 외쳤다.

“몸 숙여!”

목금의 말에 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땅바닥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머리 위로 뜨거운 불길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뭐, 뭐야?”


〈《운룡도(雲龍圖)》. 용 그림은 비를 내리게 한다는 믿음으로 기우제에 자주 사용되었다.〉
(출처: 갤러리조선민화)


“강철[罡鐵]이야.”

헉헉대며 달려온 목금이 백이를 부둥켜안으며 가쁜 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강철?”

“사람에 따라서는 용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무기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괴물이야. 강철이 나타나면 연못이고 강이고 다 말라버리고 온갖 재해가 일어난다고 해. 오죽하면 강철이 지나가면 가을도 봄이 되어버린다고 할 정도야. 가을 추수할 게 하나도 남지 않아 씨도 뿌리기 전처럼 되어버린단 이야기지.”

“어쩌냐? 그럼 빨리 내쫓아야지!”

“용을 무슨 수로 내쫓아?”

목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백이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이렇게 하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호랑이도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진 않아. 배가 고프니까 그러는 거잖아. 강철이 어떤 일로 화가 나서 이러는 거라면 그걸 풀어주면 되지 않을까?”

“네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러려면 먼저 강철을 만나기라도 해야…”

그때 공중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맹랑한 꼬맹이들이구나! 네까짓 것들이 내 화를 풀어보겠다고?”

얼마나 큰 소리였는지 두 소녀는 얼른 귀를 막았다. 고막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목금이 외쳤다.

“이러나저러나 얼굴 좀 보고 말하면 안 될까요?”

“좋다. 하지만 내 화를 풀지 못하면 잡아먹을 테다.”

그러더니 흙바람이 무시무시하게 일어났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커다란 황소 한 마리가 흉폭한 눈빛으로 두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이가 목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용이라더니, 소였어?”

“크하하하! 나를 뭘로 보는 거냐? 너희들과 이야기하기 편하게 소 모양을 한 것뿐이다. 그럼 이런 모양으로 말해주랴?”

빛이 번쩍하더니 황소는 땅바닥에 엎드린 괴물로 변했다. 긴 주둥이와 촘촘히 박힌 엄니, 칼도 안 꽂힐 것 같은 딱딱한 등가죽 위로는 뾰족한 돌기가 솟아있었고 커다란 꼬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목금이 입을 딱 벌렸다.

“으… 저건 악어라는 괴물이야. 책에서 그림으로 본 적은 있는데, 이렇게 눈으로 볼 줄은 몰랐네.”

다시 한번 빛이 번쩍이더니 강철은 다시 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목금이 말을 걸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크하하하! 인간 따위의 잘못으로 내가 진노했단 말이냐? 턱도 없는 소리.”

백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지 이유라도 말씀해 주세요.”

“좋다. 그다음에 너희를 아작아작 씹어서 삼켜주마. 나는 망허산 밑의 연못 망허소에서 천 년을 수련한 이무기다. 드디어 여의주를 얻게 되어 승천할 수 있었지. 그런데 올라가던 중에 망허산에 쓰러진 시체를 보고 만 거다. 호랑이에게 물어뜯긴 사람의 시체였지. 그런 흉한 것을 보고 말았으니 어찌 상서로운 승천이 가능했겠느냐? 나는 그대로 추락해서 다시 망허소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이쿠, 맙소사. 목금과 백이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사람을 죽인 호랑이들은 모두 노승 호랑이가 인도해서 멀리 떠났는데, 그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날 줄이야.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호랑이놈들은 내가 처벌하러 갈 줄 알았는지 잽싸게 내뺐더군. 그래서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게 된 거야! 알겠냐? 이 천지벌거숭이들아!”

강철은 말하다가 다시 화가 났는지 있는 대로 고함을 질렀다. 목금과 백이는 나무둥치를 붙들고 날아가지 않게 버텼다. 목금이 고함을 쳤다.

“그럼 여의주는 어떻게 되었나요?”

강철은 그 말에 약간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망허소 안에 떨어진 모양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나타나질 않아. 누군가 낼름 훔쳐 간 거지. 그래 좋다! 그걸 가져올 때까지 이 땅을 지글지글 태워주마!”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통구이가 될 뻔했다. 열기가 두 소녀를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할게요! 할 수 있어요!”

열기가 멈췄다.

“뭐라고?”

“여의주 찾아다 드릴게요.”

목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백이는 목금이 뭘 믿고 이러는지 몰라 걱정이 태산이었다.

“말미를 사흘만 주세요. 사흘 후에 망허소에서 말씀드릴게요.”

*

그리고 사흘 후. 목금은 강철을 만나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여의주를 건네주었다.

“어, 어떻게 이걸…”

“물속에 떨어진 걸 연못 밑의 커다란 메기가 삼켰더라고요. 이제 찾아 드렸으니 이번엔 잘 승천하시고요. 우리 마을에 비도 내려주셔야 해요.”

“물론이다! 그러고말고.”


〈김홍도의 《벼타작》〉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다음 날, 마른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더니 시원하게 비가 쏟아졌다. 백이가 약과와 유밀과를 들고 와 목금에게 내밀었다.

“여의주는 어떻게 찾은 거야?”

목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연못 속을 훤히 아는 배씨 자매한테 부탁했지.”

배씨 자매는 억울하게 살해돼 연못 속에 버려졌는데, 목금이 그 원한을 풀어주었었다. 배씨 자매가 그 은혜를 이렇게 갚아준 것이다.

“망허소에 떨어졌다고 하는 순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와, 진짜!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이 어떻게 나니?”

“그거야 이렇게 맛있는 간식을 가져다주는 좋은 친구가 있으니까?”

백이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네 간식은 내가 평생 책임진다.”

“무르기 없다.”

“그럼, 그럼. 우린 세상에서 제일 높은 보릿고개를 같이 넘어간 사이니까.”

두 소녀가 마주 보며 웃었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딸의 혼례식-신랑과 신부가 잔을 주고 받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3월 26일~3월 27일

1616년 3월 26일, 잔치를 위해 요리사[숙수(熟手)] 이복(李福)이 김택룡의 집에 와서 이진동과 함께 요리를 했다.

다음 날 27일, 김개일과 김경건이 신랑 집안의 손님들을 맞기 위해 택룡의 집으로 왔다. 잠시 뒤 혼서(婚書)가 도착하였는데, 사위의 이름은 ‘근오(謹吾)’였다. 택룡은 언복(彦福)을 시켜서 사위를 마중하도록 했다. 오후 세 네 시쯤 되자[신시(申時)], 사위가 도착했다. 신랑을 수행하여 함께 온 사람[요객(繞客)]은 참봉 권호신과 그 아우 즉 신랑의 아버지 준신, 그리고 중방(中房) 이지남(李智男)이었다.

곧 합근례를 행하고, 예작(禮酌)을 차려 베풀었다. 택룡의 아들 김숙도 참여하여 행했다. 저녁이 되어 혼례식이 끝나고 신랑 집안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이 날 광주의 성안의가 택룡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택룡이 혼례 때문에 너무 바빠서 답장을 못했다. 다만 심부름꾼을 시켜 사정을 직접 전달하게 하고 더불어 호도와 포육(脯肉)을 보냈다. 혼례에 손님으로 온 생원 홍이성의 처와 그 아들 · 김개일의 처와 그 아들 · 남석경의 처 · 이여의 처가 택룡의 집에 남아 모두 모였다.

“아버지와 봉황의 꿈”

최흥원, 『역중일기』, 1738년 7월 11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책을 보는 선비에게도 농사를 돌보는 것은 집안의 급무이다”

남붕, 『해주일록』,
1932년 10월 10일~10월 13일

1932년 10월 10일. 남붕은 아침에 아이 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후 머슴들을 시켜 똥거름과 재거름 위에 미려에 심을 보리 종자를 쌓아 놓았다. 내일 보리 파종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미려의 논에 보리를 파종했는데, 남붕은 새벽 일과를 마치고, 아침에 아이들을 가르친 후 올해 시전에 관해 논의하는 문제로 종파에 편지를 써서 부치느라 아침에 다소 분주했다. 그리고 백일동 어머님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오후에야 미려의 논에 나가볼 수 있었다.

머슴과 일꾼들이 보리 파종할 땅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다듬은 후 보리를 파종했는데, 일꾼이 몇 명 안 되어 겨우 일을 마치기도 했지만, 남붕이 가기 전까지 해놓은 일이 온전하지 않아 일이 늦기도 했다. 남붕이 보아하니 새로 흙을 갈아엎어 놓긴 하였으나 주먹만 한 흙덩이가 바둑알처럼 어지럽고 별처럼 깔려서 이 상태로는 보리 종자를 넣을 수 없었다. 남붕은 결국 머슴과 일꾼에게 다시 써레질로 곱게 부시게 하고 그런 뒤에 보리를 파종하게 했다.

남붕은 만약 자신이 이때 나가 보지 않고 거친 땅에 이미 파종을 한 다음에 나갔거나, 머슴에게 맡겨놓고 나가보지 않았다면 이번 보리농사는 허사가 되어 심하게 후회할 뻔 했다고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는데, 남붕은 이제 겨우 한 번 나가서 보리농사를 감독했는데 일이 이와 같았다.

다음날에도 파종하는 일로 소란스러워 남붕은 종일토록 공부를 접었다. 독서하는 선비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고수하면서 전혀 농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농사에 힘쓰는 한 가지 절차는 집안의 급무이고, 배우는 자가 세상은 알지 못하면서 오래도록 책만 보는 것은 집안을 보전하는 양책이 아니다.

“든든한 아들과 함께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년 4월 18일 1635년 6월 20일

1635년 4월 18일, 김광계는 기제사를 준비하러 지례(知禮)로 떠났다. 원래는 김광계의 마을에서 지낼 기제사였으나 김광계의 넷째 아우 김광악(金光岳)의 부인 권씨가 4월 11일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마을이 불안하여 지례로 제사 장소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지례로 가는 길에 아들 김렴이 따라왔다.

4월 25일에는 아들과 함께 『심경心經』을 강독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김광계 홀로 운암사(雲巖寺)에 갔는데, 곧 염이 따라와 김광계와 함께 머무르며 『상서』를 강독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운암사에 있다가, 4월 30일에는 함께 배를 타고 침락서재로 갔다. 5월 2일에도 역시 아들 염을 데리고 광산 김씨의 묘소들이 있는 거인(居仁)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5월 20일, 6월 20일에도 염은 자신의 사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러 와서 며칠간 머무르다 갔다.

그 뒤에도 끊임없이 제사와 성묘가 있었기 때문에 염은 자주 김광계를 만나러 와야 했으며, 김광계 역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길 때 염을 데리고 다니며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염은 서서히 김광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든든한 존재로 성장해 나갔다.

“들판에는 목화 집안에는 돼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2년 8월 15일~26일

그리 점잖은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으나 집안 살림 경영은 힘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노상추의 집안 살림은 그리 넉넉지 않았고 가끔은 곤궁하다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였다. 노상추가 서울에 올라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을 돌본 것은 조카들과 아들이었다. 이들이 해 놓은 집안일이 노상추의 눈에는 영 마뜩잖았다. 그래서 노상추는 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집안 살림을 효율적으로 경영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농사란 것은 사람이 아무리 애쓴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흉작을 면키 어려웠다. 올해도 목화가 흉작이었다. 처음 시장가격은 30근에 1백 동이었다. 모름지기 흉작이라면 그 가격도 오르기 마련이건만 올해 목화는 너무나도 헐값이었다. 듣자 하니 수령이 농민들에게 성전(城錢)을 빌려주고 3할의 이자를 거두기로 하였는데, 시장이 한 번 열릴 때마다 이자를 마구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농민들이 이자를 내기 위해 목화를 마구 팔아야 해서 목화 값이 헐값이 된 것이다. 덕분에 노상추의 목화 값도 똥값이 되었다.

노상추는 목화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먼저 상수리나무와 잣나무를 심어서 도토리와 잣을 수확해 보기로 했다. 조카 기엽을 수월산에 보내서 상수리를 심어놓은 것을 살펴보게 했고, 또 집 뒤 언덕에 심어놓은 잣나무도 살펴보았다. 상수리는 심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수확할 것이 없었으나 잣나무는 열매를 맺어서 18송이를 딸 수 있었다. 이 잣나무는 무술년(1778) 봄에 대곡사 인근 잣나무 숲에서 딴 잣을 심어놓은 것이었다. 벌써 25년이 흘렀는데, 크게 자란 잣나무가 17그루이다. 노상추는 수확한 잣을 사당에 올렸다.

또 돼지도 한 번 쳐 보기로 했다. 많이 길러서 그 고기를 팔면 어떨까 싶어서 돼지우리도 지었는데 과연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3년 12월 28일

1763년 12월 28일. 계미년도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흐린 날씨에 간간이 눈발이 뿌리는 날이었고, 어머니 병환도 어제와 같은 정도였다.

최근 딸아이가 부쩍 몸이 쇠하여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무언가 기운이 날 만한 보양 음식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 한탄스러웠다. 얼마 전 아들을 잃고 난 최흥원은 남은 딸들마저 허약한 몸으로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걱정이 부쩍 늘었다. 그리하여 어제는 사람을 시장에 보내어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좀 사 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장에 보낸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즘 시장에 어물 귀하기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청어도 1냥이나 하고, 생대구도 1냥 정도는 줘야 구할 수 있습니다. 어물 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여서 꿩 한 마리도 7전이나 나가니, 도저히 그 가격으론 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최흥원이 들어보니 정말로 그 정도의 가격이라면 쉬이 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파리한 딸의 얼굴을 보며 최흥원은 고민에 빠졌다. 무리를 해서라도 보양이 될만한 생선이나 꿩을 좀 사다가 딸아이에게 먹여야 하는지... 한편으론 아프신 어머니 반찬거리를 대기도 어려운 형편에 무리한 처사인가 싶어 최흥원은 쉬이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힘든 하인을 격려하고 동네의 작은 잔치를 열며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6년 3월 9일~1859년 6월 21일

1846년 3월 9일, 서찬규는 회시에 합격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닷새 안에 가야 해서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달려가니 신석룡은 뒤따라 갈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천천히 오라고 하고, 덕우와 함께 갔다. 연일 길을 재촉했더니 노복들은 힘들다고 하고 창졸들도 발이 부르텄다고 했다. 서찬규는 밤에 개를 삶도록 하고 술을 사서 하인배들을 배불리 먹였다.

1849년 3월 4일에는 남산의 족형 재씨·자형 평선씨 등 모두 10여 이 술을 가지고 수레를 타고 공부하고 있는 서찬규를 찾아 암자로 왔다. 그들은 함께 예계동으로 들어가 화고를 삶고, 오후 늦게 암자로 돌아와 함께 묵었다.

서찬규는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1850년 4월 29일에 산격의 선영에 가서 성묘하고, 이종 원규[자는 선장(善長)]씨 집으로 갔다. 그가 먼 길에서 돌아왔다고 개고기를 삶고 술을 마련해 주었다.

1859년 5월 5일, 서찬규는 여러 친구들과 뱃놀이하며 개를 삶아 먹고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50~60인이 되었다.

6월 21일에는 서찬규의 부친이 연신제의 말애 폭포로 목욕을 하러 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동네 사람이 거의 다 모였다. 오후에는 구암서원에 가서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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