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난민’을 검색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난민’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피난민(避難民)으로 인식하지만 이 단어에는 전쟁이나 재난으로 곤경에 빠진 자 또는 가난하여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또 다른, 난민(亂民)이 있습니다. 무리를 지어 다니며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난민(亂民)은 지금보다 과거에 더 많이 쓴 단어입니다.
1738년 6월 23일 임금이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서원을 첩설하는 것은 금령(禁令)일 뿐만 아니라, 봉조하(奉朝賀)가 서원 건립을 청할 때에도 또한 하교한 일이 있었다. 문정공(김상헌)의 서원을 건립하는 데에 어찌 사적인 마음을 가지고 창의(倡義)하며, 또한 어찌 사적인 마음을 가지고 방해하여 공의(公議)를 무시해서야 되겠는가? 그 허락 여부는 오직 임금의 처분에 달려 있으니, 마땅히 조정에 청하여야 함이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땅히 관찰사와 고을 수령에게 청하고, 관찰사와 수령된 자는 금령이 있는 상황에서 마땅히 아뢰어 재가를 받아야 하거늘, 함부로 먼저 허락한 것은 이미 금령을 어긴 것이 되었고, 끝내는 이렇듯 전에 없었던 해괴한 일들이 있게 되었으니, 관찰사와 수령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서 다스리지 않고 또한 위로 임금에게 아뢰지 않아서 이렇게 중신(重臣)들이 상소하는 일까지 있게 하였으니 매우 한심하다. 해당 관찰사와 수령을 모두 파직하라. 그 건축한 서원이 비록 금령을 어긴 것이긴 하지만, 조정에도 이목이 있고 사림 사이에는 그곳대로 글로써 아뢰는 절차가 있거늘, 선비된 자가 수령과 백성간의 분수의 무거움을 알지 못하고 멋대로 해괴한 행동을 하여 나라에 법이 없는 것 같이 하였으니, 이는 난민(亂民)이다.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행패를 부릴 때 앞장섰던 유생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엄히 형벌을 주어 멀리 귀양 보내게 하라.”
-미상, 『법성일기(法城日記)』, 1738년 6월 23일-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풍산김씨 근전문중에서 기탁하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법성일기』〉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1738년(영조 14) 5월, 안동에서 건립 중이던 서원이 훼철(毁撤)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노론 강경파인 유척기(兪拓基)와 어유룡(魚有龍)이 경상감사와 안동부사로 부임하자, 안동의 노론계 선비들이 김상헌(金尙憲)의 서원 건립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남인은 서원 건립을 김상헌의 충절을 기리기 위함이 아닌, 안동에 노론의 근거지를 확보하여 영남 지역의 남인을 공격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세로 인식하였습니다. 이에 영남 지역의 남인이 완공 단계의 서원을 철거한 것입니다.
유척기와 어유룡은 훼철 주도자를 체포하여 그 죄를 물었고, 급기야 남인은 부사에게 항의하는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조정에까지 보고되어 당파 간의 치열한 논의로 번졌습니다. 노론과 대립 중인 소론은 남인의 편을 들어 창건 주동자의 처벌을 주장하며 철거된 서원의 재건립도 반대하였습니다. 반면 노론은 서원을 철거한 일은 선현에 대한 모독이며, 관의 명령을 부정한 일이므로 훼철 주동자를 처벌하고 서원도 재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파 간의 논쟁이 향촌사회의 심각한 갈등으로 번진 것입니다.
결국 영조는 두 세력과 향촌사회의 갈등, 그리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고도의 정치적인 수를 두었습니다. 서원 건립을 강행한 유척기와 어유룡은 파직되었고 서원의 재건립도 중단시켰으며, 훼철 주동자는 귀양 보냈습니다. 1728년 무신란[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영남의 동향에 주목하고 있던 영조는 또 다른 무신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지방관과 훼철 주동자를 모두 처벌하는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영조에게 ‘난민(亂民)’은 지방관과 훼철 주동자 모두였으며, 안동부사와 영남 지역 남인 사이에 낀 백성은 ‘난민(難民)’이 되어 버렸습니다.
임금께서 파천해 계시니 시일을 기다릴 수만도 없으며, 더구나 역당이 망명해 달아나서 뿌리를 뽑지 못했음에랴. 천안(天顔)의 한 방울 눈물은 천만 신하가 배를 갈라도 속죄하기 어렵고, 대월을 벗어나신 옥보(玉步) 두어 걸음은 억만 백성이 뼈가 가루되어도 미칠 수 없다. 왜놈이 다시 떼로 들어오니 그 행동이 망측한지라, 군사를 엄밀히 단속하여 대기해서 실수 없도록 하자.
하물며 머리 깎은 수령들의 행패도 여전하고, 또 개화당의 발악도 여전하다고 한다. 귀신이나 사람이나 똑같이 분히 여기는 바이거늘, 충신과 역적이 어찌 열을 나란히 할 수 있느냐? 공을 시기하고 정의를 방해하는 행동은 역적의 무리로 규정지으며,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의(義)는 이미 글월에 밝혔으니, 통문이 도착하는 즉시 빨리 날짜를 정하여 각기 소속 관하에서 대의에 호응하는 민병(民兵)을 모집하되, 선비들은 그 규율을 봉행하고, 이교(吏校)들은 그 두령에게 복종하라. 지휘와 절제는 스스로 계획을 정하고 궁시(弓矢)와 총칼을 모두 대비해서, 난폭한 자를 제거하여 이 위급한 내란을 밝히고, 왜놈, 양놈을 몰아내어 영원히 외적의 수모를 막아내기로 하자. 우만(宇萬)은 비록 자격이 모자라서 하진(下陣)에 있지만, 자원해서 채찍을 쥐고 전구(前驅)가 되겠다. 통문이 도착하면 그대로 시행하고 속히 회답을 바란다.’
-이병수(李炳壽),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1895년 1월 15일-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단발하는 안동부 관원의 모습을 재구성한 삽화〉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1895년(고종 32)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유림은 서양세력과 일본, 개화세력의 폭거에 저항하여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병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른바 을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충청도에서 시작한 을미의병은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에 따라 12월 30일 단발령이 선포되면서 민중도 호응하여 곧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듬해 2월,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며 정국은 혼란으로 치달았습니다.
을미의병은 지방 관아를 점령하고 일본인을 공격하였으며, 단발령에 앞장선 관리와 참여한 자들을 붙잡아 참수하였습니다.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철회하고 해산권고조칙을 내리자 을미의병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여겨 자진 해산하였습니다. 이들에게 ‘난민(亂民)’은 개화파와 일본, 서양 모두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난민(難民)’이 된 대한제국의 백성이 남았습니다.
〈영양 출신 의병장 김도현이 의병을 일으키는 모습을 그린 재구성한 삽화〉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1919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3·1 운동은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당초에는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만세시위를 하는 것으로 계획되었지만, 폭력 사태를 우려한 민족대표의 결정에 태화관으로 장소가 변경되어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과 탑골공원 만세시위로 전개되었습니다.
전국으로 확대된 3·1 운동은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이 퍼져 3월 2일에는 하루 만에 1만여 명이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는 3·1 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폭도로 규정하며 강경 진압하였고, 급기야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사태가 속출했습니다. 무단으로 식민통치를 자행한 ‘난민(亂民)’에 의해 우리는 ‘난민(難民)’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 현대사에 남을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대통령이 ‘야당의 입법 독재로 국정이 마비되었기에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바로 세우고 야당의 반국가 행위를 멈추기 위해서’라고 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에 야당은 비상계엄을 헌법에 위배되는 독재 행위로 보고 대통령을 내란수괴범으로 탄핵심판대에 올렸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내란주동자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날씨이지만 우리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탄핵정국의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는가 하면 출처를 알 수 없는 가짜뉴스에 여·야마저도 부화뇌동하고 있습니다. 여·야는 여전히 정쟁(政爭)을 멈추지 않고 대통령은 법적 절차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을사년(1905)에 난민(難民)이 된 우리는 광복을 통해 주권을 되찾았습니다. 다시 을사년(2025)이 된 지금, 우리를 ‘난민(難民)’으로 만든 ‘난민(亂民)’은 누구일까요.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