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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얘기 좋아하면
정말 귀신이 붙을까?

나는 유튜브에서 《왓섭! 공포라디오》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괴담과 실화 사연, 미스터리 사건을 소개하는 심야 라디오 콘텐츠다. 처음부터 괴담을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릴 때부터 무서운 이야기에 끌렸어요.”라는 흔한 대답도 맞지만,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워서 오히려 파고들었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무서움 뒤에 숨겨진 뭔가가 더 나를 이끌었다고 할까.


〈YouTube 왓섭! 공포라디오 섬네일〉 (출처: YouTube 왓섭! 공포라디오)


괴담이나 귀신, 나아가 무속과 오컬트를 좋아하지 않는 어른들은 말한다.

“너 그런 거 계속 보면 정신이 이상해진다.”

“무서운 얘기 좋아하면 귀신 붙는다.”

단순히 귀신, 오컬트라면 부정한 것이거나 현대문명의 과학 발전과는 상반되는 미개한 것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괴담은 오랜 과거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 의해 꾸준히 생산되고 소비 되어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억울한 죽음은 한이 되어 남는다


방송에 소개되었던 실화 사연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전라남도 무안군 회산면 일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제강점기 간척사업으로 원래 섬이던 마을이 육지가 되었고, 외지인들이 많이 유입된 시기였다. 가난한 집안의 한 할머니는 대를 잇기 위해 외지 여자에게 곡식을 주고 며느리로 들였다. 허나 아들은 나태하고 술만 마셨으며, 아내와의 정 또한 없었다. 할머니는 밥만 축내고 대를 이을 자식 하나 낳지 못한다며 며느리만 탓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언덕에서 술에 취해 떨어져 죽는 변고가 났다. 아들의 죽음에 망연한 할머니는 슬픔을 며느리에게 돌려, 모진 욕설과 학대를 퍼부었다. 이에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결국 집 앞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말았다. 그녀의 시신은 지나가던 장돌뱅이들이 거두어 수습되었을 뿐, 시어미는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았다.

“아니 내가 왜? 그 육시럴 년을 뭐 땀시? 내 새끼 잡아먹은 것도 부족해서 내 집 앞에서 목매단 것을 내가 왜?”

이후 그 소나무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소나무 주변 콩들만 자라지 못해 시들하니 재수 없다며 일꾼들에게 나무를 베게 시켰지만, 베려고만 하면 연달아 사고로 죽는 일이 생기더니 급기야 귀신을 봤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나무 옆에서 여자가 우는 모습을 봤다.”거나 “나무에서 뻘건 핏물이 줄줄 흐르더라.”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그 한이 얼마나 강한지 굿을 하던 무당도 다치는 일이 생겨 내빼기 일쑤였다. 그러다 할머니도 점점 이상해졌고, 그 땅을 차지한 후손들도 잇따라 죽거나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건 소나무에 깃든 며느리의 원혼 때문이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터만 남았으나, 그 땅에 얽힌 원한의 이야기는 여전히 남아돌고 있다.

이 이야기를 단순히 옛날 괴담 정도로 치부하긴 어렵다. 한국의 수많은 설화와 괴담에는 공통된 흐름이 있다. 바로, “억울한 죽음은 한이 되어 남는다”라는 것.

대표적으로는 『아기장수』 설화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힘을 지녔으나 부모의 두려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후 원귀가 되어 마을에 재앙을 내린다는 이야기다.

또 『장화홍련전』도 마찬가지다. 두 자매 장화와 홍련은 새어머니의 모함과 학대 끝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그 뒤로 자매의 원혼이 나타나 진실을 알리고, 결국 새어머니는 벌을 받게 된다. ‘장화와 홍련’ 이야기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고전 설화지만, 지금까지 영화와 드라마로 수없이 변주되고 있다. 그만큼 억울한 죽음과 사회적 부조리, 가족 안의 위선과 폭력이라는 주제가 시대를 뛰어넘어 울림을 준다는 뜻이다.


〈『장화홍련전』과 영화 《장화,홍련》〉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청어람)


이런 이야기들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히 ‘귀신이 무섭다’는 공포를 넘어서 있다. 핵심은 ‘억울하게 죽은 자의 목소리’를 세상이 외면했을 때 어떤 파장이 생기는가에 대한 경고다. 그리고 또 하나, 타인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 누구나 존엄한 존재로서 살아야 한다는 삶의 교훈이 담겨 있다.

회산면 이야기도 그렇다. 가난한 집안에 시집온 외지 여자는 가족 안에서 보호받지 못했다. 고된 삶 속에서도 위로 한마디 없는 남편의 방탕함과 시어머니의 학대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졌다. 그 죽음조차 외면했고, 장례 한 번 치러주지 않았다. 그러니 그 ‘원한’이 땅에 깃들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하지 말라


또 다른 사연도 살펴볼까.

여름방학을 맞아 글쓴이는 외가를 찾아갔다. 옆집 삼촌이 재미있는 걸 보여준다기에 가보았더니 뱀술 담글 채비를 하고 있었다. 솥을 걸고 불을 지핀 뒤, 산에서 잡아 온 뱀을 쌀 위에 얹어 삶기 시작했다. 솥 안에서는 뱀이 튀며 몸부림치고, 쇳소리 섞인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은 오싹한 기운을 떨칠 수 없었다. 며칠 후, 삼촌의 어린 아들이 문득 말했다.

“그 뱀이 밤마다 살아 움직여요. 소리도 내고요.”

처음엔 아이의 상상쯤으로 여겼으나, 그 뒤로 삼촌 집에는 불길한 징조들이 잇달았다. 집안 어른들이 뱀에 물리고, 밭마다 뱀이 창궐하였다. 가장 기이한 일은 삼촌에게서 비롯되었다.

삼촌은 밤이면 진열된 뱀술 앞에 앉아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혀를 날름거리며 밤을 지새웠다. 몸은 점차 뱀처럼 휘어지고, 팔과 다리를 몸에 붙인 채 기어다니기까지 하였다.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더는 버틸 수 없어 무당을 청해 굿을 벌였다.

용한 무당은 삼촌의 몸을 보더니 말했다.

“이 뱀은 신이 될 기운을 지닌 자였으나, 삶아 술로 담그는 참혹한 일을 겪고 말았다. 게다가 알까지 함께 죽어 원한이 크다. 어미는 이제 돌려보낼 수 있으나, 말이 통하지 않는 새끼들은 남아 삼촌을 붙들고 있다.

굿은 날이 새도록 이어졌다. 무당은 병 속의 술을 하나씩 깨뜨리며 뱀의 혼을 풀어주었으나, 어미 뱀과 일부만 떠났을 뿐, 새끼들은 떨쳐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삼촌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으나, 혀를 날름거리는 기이한 버릇은 남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삼촌은 가정을 꾸렸으나, 자식들과는 끝내 화합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YouTube 왓섭! 공포라디오 사연 ‘뱀이 된 남자’〉 (출처: YouTube 왓섭! 공포라디오) 더보기


이 사연과 비슷한 이야기로는 관절에 좋다는 고양이를 삶아 먹은 어느 할머니가 계단 구석에 웅크려 앉아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기이한 일도 있었고 이무기가 살고 있던 마을 우물가에서 개를 잡아먹은 뒤 당사자는 물론 마을 전체에 줄초상이 난 사연도 있었다.

이 이야기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뚜렷하다.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하지 말라.” 그것이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존재라 해도 말이다.

한국의 수많은 괴담과 설화에서도 이러한 교훈은 반복된다. 그 속에 담긴 자연에 대한 경외, 생명에 대한 존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비슷한 설화로 『구렁덩덩 신선비』가 있다.

한 가난한 집에 구렁이가 찾아와 사람의 딸과 혼인하게 된다. 처음에는 짐승이라며 경멸하지만, 알고 보니 그 구렁이는 신선의 화신이었다. 반대로 사람들은 구렁이를 해치거나 죽이면 큰 화를 입는다는 민담도 많다. 옛사람들은 마을에 사는 구렁이를 ‘집 지키는 신령’으로 모시기도 했다.

또 하나 주목할 이야기는 도깨비 설화다. 도깨비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도 하고, 때로는 재물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나 장난으로 도깨비를 속이거나 물건을 빼앗으면, 그 뒤로 도깨비가 화를 내며 해코지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물론, 정령 적 존재조차도 존중하지 않으면 화를 입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 설화 속에서는 “무심코 한 행동이 큰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교훈이 반복된다. 특히 쾌락이나 재미 삼아 생명을 해하는 경우, 그 업(業)이 더욱 크다고 여겼다.

뱀술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생존을 위한 사냥이 아닌 재미 삼아 생명을 고통스럽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원한이 깊어졌고, 결국 사람에게까지 화(禍)가 미친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과 합리로 무장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을 경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괴담은 옛사람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

“살아있는 것엔 혼이 깃들어 있다.”

“죽음엔 책임이 따른다.”

“쾌락으로 생명을 해하지 말라.”

이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가 종종 동물 학대 뉴스에 분노하고, 생명 존중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겉으로 보기엔 하찮고 두려운 짐승일지라도, 그 속에 어떤 신적 기운이 깃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경고


다음으로는 금기에 대한 괴담이다.

글쓴이가 군대에서 겪은 기묘한 이야기이다. 행군 중의 산에서 볼일이 급해 대충 아무 곳에서 용변을 해결하게 되었다. 속을 비웠으니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던 그때, 밤나무 하나가 눈에 띄어 발로 차봤지만, 밤은 떨어지지 않았고 장대라도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리니 살짝 높은 지형이 보여 그곳에 올라가 기어코 밤을 따 먹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 계속 악몽을 꾸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계속 빠지는 이상한 일을 겪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밟고 올라섰던 그곳은 사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묘지였던 것이다. 나는 묘지 앞에 서서 사죄하며 주변을 정리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 후로는 악몽을 꾸는 일도 살이 빠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YouTube 왓섭! 공포라디오 ‘군대 실화괴담’〉 (출처: YouTube 왓섭! 공포라디오)


비슷한 다른 이야기로는 모형 총기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펜션에 놀러 갔다가 아이가 열이 오르고 구토하며 기력이 떨어졌는데 아이의 부모 역시도 이유 없는 통증과 열감이 느껴져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 밤을 보냈다.

영적 능력이 있던 다른 멤버를 통해 뒤늦게 알게 된 원인은, 모형 총으로 쏜 탄알 몇 발이 무덤 쪽으로 튀었고, 제수씨가 “귀신은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일이었다. 묘의 주인으로 여겨지는 존재는 기운이 강한 제수씨에게 직접 다가가진 못하고, 대신 상대적으로 약한 글쓴이 가족에게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술과 안주를 차려놓고 사죄하고 다음 날이 되자 아들과 글쓴이의 상태도 서서히 호전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글쓴이는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심기를 무심코 건드리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날벼락’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가 센 사람 옆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보호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YouTube 왓섭! 공포라디오 ‘무덤, 묘지 괴담’〉 (출처: YouTube 왓섭! 공포라디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중심인 세계에서 살아간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은 신화나 미신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문득,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깨닫는다. 세상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교훈을 얻었다. 무덤은 단순한 땅이 아니다. 그곳엔 죽은 자의 안식이 깃들고, 그 안식은 살아있는 자에게도 일종의 ‘예의’를 요구한다. 무심코 오르거나, 장난삼아 흔들거나, 심지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조차도 그들에겐 모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무작정 해를 끼치거나 악의로 가득 차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이 사과하고 성의를 다하면, 그들은 물러나거나 이해하려 한다. 중요한 건, 그 경계를 인지하고 존중하려는 태도다. 그것은 인간 사이의 예의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한 최소한의 존중이기도 하다.

두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생각보다 섬세한 질서 위에 놓여 있다는 경고다. 그리고 그 질서를 지키는 첫걸음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자리 아래 누가 있을지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일이다.

이러한 《전설의 고향》 급 사연 외에도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괴담이나 미신, 금기들을 접하고 산다. 어린 시절 말을 안 들으면 망태 할아범이 잡아간다거나 이놈 아저씨, 홍콩 할매 등을 이용해 겁주는 방식으로 통제하거나 집에 일찍 귀가하도록 교육용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영화 《전설의 고향》 포스터〉 (출처: 프라임엔터테인먼트)


병원 근무자들이 “오늘은 환자가 없네.”라고 말하는 것, 경찰서에서도 “오늘은 한가하네.” 등의 말을 하면 부정 탄다는 말도 있고 버려진 물건을 함부로 주워 오지 말라거나 이름은 빨간색으로 쓰지 말라는 것, 장례식장에 다녀올 적엔 어딘가를 들렀다가 오고 집에 들어가기 전엔 굵은 소금을 뿌리고 들어가라는 것 등 미신처럼 행해지는 규칙들이 일상에도 꽤 있다. 이는 부정 타거나 나아가 동티가 나는 행위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으로 풀이된다. 조심해서 나쁜 것은 없으니까.




괴담이 전하는 교훈


지금 우리는 예전만큼 귀신 이야기를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괴담과 설화가 여전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영화와 드라마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우리가 여전히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고,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마음 아파하며, ‘사람답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기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 우리의 삶에도 울림을 주는 교훈이다.

“사람답게 살라.”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하지 말라.”

귀신도 살아있을 때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사는 이야기이다.

단순한 괴담에 무슨 대단한 교훈을 찾느냐?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 귀신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의 의미 없는 논쟁보다 그저 재미로 즐기면서도 자연스레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사람의 생각과 행동, 말 하나하나에도 힘이 있다고 한다. 부정적인 생각과 거친 욕설만 달고 사는 사람과 늘 긍정적으로 버텨내며 희망의 말을 하는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은 너무 다르다. 무서운 거 많이 들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다거나 귀신이 붙는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아, 그런데 귀동냥으로 들은 말로는 귀신들이 자기 얘기 하면 호기심에 다가오긴 한다더라. 지금도 실컷 귀신 얘기를 떠들어 댔으니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의 뒤에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진 않을까?




집필자 소개

왓섭! (장경섭)
장경섭
‘세상 모든 기묘한 이야기’라는 테마로 2015년부터 꾸준히 각종 괴담과 미스터리, 실화 사연을 1인 다역 오디오 드라마 형식으로 풀며 현재 구독자 25만, 누적 조회 수 2억 5천만 회를 돌파했다. 그 외에도 영화, 방송, 도서, 오디오북 등 모든 영역에서 공포 콘텐츠를 널리 알리며 공포 장르 1인 크리에이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살인죄로 형문 받는 거창수령”

노상추, 노상추일기, 1825년 2월 9일~3월 26일

거창(居昌) 수령 이재연(李載延)이 살인을 저질러 선산부에 구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상추는 이재연에게 위문 편지를 보냈다. 심지어 칼[枷]까지 쓰고 갇혀 있다고 하는데 법전의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노상추는 진심으로 이재연을 동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 주어야 할 것인데. 이재연은 형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재연이 저지른 잘못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달인 2월에 이웃마을의 상놈 최가가 그의 며느리를 구박해서 연못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 최가 놈은 며느리의 시체를 이재연의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까운 곳에 묻었다. 이를 알게 된 이재연은 최가 놈을 잡아들여 때린 다음에 마당 근처에 있는 연못에 집어넣었다. 최가 놈이 덜덜 떠는 모습을 본 이재연은 마음이 누그러져서 최가 놈을 물 밖으로 꺼내 따뜻한 곳에 두게 하였다. 그런데 최가 놈의 동생이 형에게 밥도 주지 않고 치료하지도 않아 그대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이 이재연에게 있다고 고발하여 이재연이 잡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과연 이재연은 어떤 처분을 받게 될 것인지. 노상추는 염탐을 위주로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는 관찰사가 이재연에게 유리한 처분을 해 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살해하여 잡아먹은 도적, 이웃사람으로 밝혀지다”

김령, 계암일록, 1608년 11월 18일

1608년 11월 18일, 들으니, 선산(善山)에 89살 먹은 노인이 있었다고 한다.

난리 뒤에 굶주림이 심한 때, 아들이 그의 아비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도적을 만났다. 도적이 돌연 자기의 아비를 가로채어 죽여 잡아먹었다. 그는 기겁해서 달아났다. 그 도적의 얼굴을 식별해 보니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이었다.

아들은 천병(명나라 군대)에 투신하여 걸식하며 시졸이 되어 요동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다시 당장(명나라 장수)을 따라 건주위로 가서 노추(누르하치)를 구경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옛날 살던 집에 이르러 원수가 아직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는 것을 알고는 바로 인동 수령에게 가서 그 사유를 알렸다. 원수는 바야흐로 좌수(座首)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를 잡아서 심문하니 정말 죄를 자백했다.

이 일은 아주 기이한 일이라 기록할 만하다.

“홧김에 남의 집을 때려 부순 가짜 유생”

노상추, 노상추일기, 1826년 3월 21일~3월 27일

암자에 갔다가 집에 온 노상추는 집 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회당(永懷堂)의 창후 두 짝이 산산 조각나서 구멍으로 바람이 숭숭 드나들고 있었다. 노상추가 노해서 감히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저질렀냐고 집안사람들에게 묻자, 울진(蔚珍)에서 본면(本面) 송천리(松川里)에 들어와 살고 있는 신(申)가 놈이 이래 놓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상추의 집 남자종 복만(卜萬)과 술을 마시다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는데, 복만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하면서 영회당에 와서 다짜고짜 창을 때려 부수었다는 것이다.

노상추는 이미 신가 놈이 양반으로 모칭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괘씸한지고. 노상추는 남자종의 이름으로 관아에 소장을 올렸다. 관아에서는 소장에 언급된 복만과 신가 놈을 잡아올 것을 명했다. 노상추는 집안에 화를 끌고 들어온 복만을 잡아 넘겼다. 신가 놈도 곧 잡혀온 모양이었다. 노상추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손자 명숙(明璹)의 이름으로 또다시 소장을 올리려고 했으나 수령이 만류하였다. 수령은 노상추의 화를 풀어주려고 다독이면서 장방(長房)에 신가 놈을 구속하고, 복만은 태(笞) 10대를 때리고 석방하였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한 노상추는 다시금 명숙의 이름으로 소장을 올렸다. 하지만 수령은 뇌자(牢子) 사령이 말하길 신가 놈이 설사병이 심하다고 했다면서 그를 풀어주고 대신 신가 놈의 아들을 잡아두었다. 이는 분명 신가 놈이 뇌자 사령과 서로 짠 것이다. 계속되는 노상추의 소장에 수령은 “이번에 엄히 처벌할 것임” 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노상추는 상놈이 유학으로 모칭한 것 역시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수령에게 신신당부했다. 이에 수령은 ‘신가 놈을 관아에서 좌부(座夫)로 등급을 낮추어 정해서 포(布)를 납부하게 하고 그의 아들은 통인(通印)의 보인으로 채워 정할 것’이라 처분하였다.

후련해진 노상추는 목수를 불러와 부서진 창호를 수리하였다. 하지만 역시 부서진 창호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나서 “미친놈이 부순 창을 어서 수리해라.” 라고 목수에게 거칠게 내뱉었다.

“관고에서 은잔을 훔친 윤효빙은 어떻게 탈옥하였을까”

황사우, 재영남일기, 1519년 6월 14일~1519년 9월 22일

1519년 6월 14일, 황사우가 성주에 도착하니 겸직어사 남세준(南世準)이 성주에 머물며 감사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세준은 강중진(康仲珍)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개인 사정으로 사람을 죽인사건, 윤효빙(尹孝聘)이 안음현감으로 있을 때 부정을 저지른 사건, 고령에 사는 최씨가 몰래 저지른 간악한 사건 등을 추고하기 위해 내려와 있었다.

6월 21일, 안음현에 도착하니 안음현감 안우가 왕명을 맞이하였다. 훈도(訓導)는 전 현감 윤효빙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윤효빙이 은잔을 훔쳤는데 이웃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떠벌리자 되 갖다 놓은 사실이 적발되어 수감되었던 것이다.

9월 6일, 의령현에 머물고 있을 때 윤효빙이 감옥에서 도망쳤다는 기별을 듣게 된다.

9월 9일, 함안군에 머물고 있을 때 윤효빙이 탈옥했다는 첩정(牒呈)이 왔기에 즉시 찾아서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9월 16일, 철성. 황사우는 윤효빙이 전에 안음현감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재물을 축적해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떼거리를 이루어 50여 명이 진주 감옥을 습격해서 도주하였다는 윤효빙 탈옥사건의 대강을 알게 된다.

9월 21일, 진산에 머물고 있을 때 어사 남세준이 감사의 방의로 갔다. 진주목사 신영홍(申永泓)이 윤효빙이 탈옥하여 도망간 사건 때문에 조정이 놀라고 동요하여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을 보내 잡아 오라 하였기 때문에 함께 들어와서 만나게 되었다.

9월 22일, 어사 남세준이 아침 일찍 출발해서 황사우는 미처 뵙지 못하였다. 윤효빙의 탈옥 사건이 놀라우니 감사가 찾아서 체포하라는 유지(有旨)가 왔다. 그래서 즉시 사근도 찰방과 단성현감에게 이 일을 맡겨서 의심 가는 곳을 찾아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후 윤효빙이 체포되었는지에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윤효빙 탈옥 사건의 전말은 어사 남세준이 죽고 난후, 그의 죽음을 논하는 사신의 글에서 밝혀진다. 윤효빙이 갇혀있던 진주감옥의 진주목사는 신영홍이었는데, 그는 효빙과 교분이 있어 은밀히 남세준과 동의하여 일부러 효빙에게 옥을 넘어 도망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세준이 세상을 떠난 1533년 1월 16일 실록의 기록이다. “이조 참판 남세준(南世準)이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안음 현감(安陰縣監) 윤효빙(尹孝聘)이 금전을 훔쳐 쓴 일이 발각되어 진주(晉州)의 옥에 갇혔다. 세준이 경차관이 되어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추문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진주목사 신영홍(申永泓)은 효빙과 교분이 있어 은밀히 세준과 동의(同議)하여 일부러 효빙에게 옥을 넘어 도망하도록 하였다. 세준은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고 영홍을 파출하자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효빙은 범장(犯贓, 뇌물을 받거나 공금을 횡령하는 것)의 처벌을 모면하였고, 영홍은 사사로이 하찮은 신의를 세웠으며, 세준은 조정을 속이고 봉명 사신의 체통을 크게 실추시켜서 왕법(王法)이 행하여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비난하였다.”

“홍수 중에 작업에 동원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4년 10월 15일

올해는 비가 많이 왔다. 선산부(善山府)에서는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서쪽에 새로 보(潽)를 쌓아 놓았었는데, 7월에 내린 큰비 때문에 이 보가 무너졌다. 이에 관아에서는 동부(東部)와 서부(西部) 사람들을 보를 새로 쌓는 역(役)에 동원하였다. 그런데 아직 보를 새로 쌓기에는 비로 불어난 강물이 조금도 줄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불어난 물이 좀 빠진 뒤에 작업하자고 요청하였지만, 보를 쌓는 일을 감독하기 위해 나온 좌수, 이방, 군관, 장교들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작업을 독촉하기만 했다. 마침 선산부사도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좌수 이하 사령들은 더욱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하지만 불어난 물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강으로 누구도 선뜻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것이 뻔했다. 모인 장정들이 모두 뒷걸음질을 치자 좌수는 지금 물에 들어가 작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곤장을 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곤장에 맞아 죽느냐, 물에 빠져 죽느냐였다. 공권력 앞에 버틸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거센 강물로 들어갔다. 불어난 물은 깊었고, 그 기세는 거셌다. 그날 작업자 중 네 사람이 수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예견된 결과였다.

이날 목숨을 잃은 네 사람의 가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다. 호소를 들어줄 선산부사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참사가 일어난 뒤로부터 3개월 뒤인 10월, 새로운 선산부사가 부임하였다. 그제야 유족들은 7월에 있었던 참사를 일으킨 당사자들을 고발하여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초례날 호랑이에게 물려간 신랑”

노상추, 노상추일기, 1815년 12월 28일~1816년 1월 8일

어제 김양채가 노상추를 보러 와서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그의 표정이 내내 편안하지 않기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는데, 나중에 듣자 하니 그의 막내아들이 주륵동에서 초례를 치르고 머무르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었다고 한다.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놀랄 만한 일이다. 노상추는 곧바로 남자 종을 보내 김양채를 위문하였는데, 돌아온 남자 종의 말로는 호랑이에게 물린 사람이 살아날 길이 없어 보인다고 한다. 불쌍하기 그지없다.

다음날, 결국 부고가 전해졌다. 호랑이에게 물린 아이가 기어코 죽었다고 한다. 관아에서는 사람을 문 호랑이를 잡기 위해 인근의 포수들을 모두 모았다. 포수들은 곧 법화동에서 호랑이를 잡아 왔다. 잡힌 호랑이가 바로 사람을 문 호랑이라고 한다. 이렇게라도 원수를 갚고 고을을 안정시켰다고는 하나 죽은 아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김양채의 슬픔이 덜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다”

오희문, 쇄미록, 1597년 3월 7일

1597년 3월 7일, 오늘 오희문은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어젯밤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뒷산 인가에 들어와서 자는 사람을 잡아갔다고 한다. 사람을 물어 가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찾아가보니 사람의 반을 먹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분통한 노릇이었다.

호랑이가 마을 사람을 해친 것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달 26일에는 관아에 소속된 관비가 범에게 물려갔다고 한다. 관비는 범에게 물려갈 때 살려달라고 사람들을 애타게 불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서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관비를 물고 달아날 때 관아 뒤를 지나갔다고 하던데,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데도 두려워서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고약한 인심이라 할 만 하였다.

요사이 호랑이들이 많이 돌아다녀서, 혹은 대문을 부수고 울타리를 헤치고는 인가로 들어온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었다. 악독한 맹수가 성하게 다니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도, 이것을 잡아 없애지 못하고 사람마다 두려움에 질려서 해가 넘어가자마자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를 않는 상황이었다. 오희문은 또 한 가지 걱정거리가 늘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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