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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오늘과 만나다

나의 공포, 그의 행복 혹은 그 반대 혹은…

16세기의 이탈리아, 아름다운 베니스에는 행복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출항하는 무역선을 보며 기뻐하는 선원들과 그 가족들이다. 아버지, 남편, 아들은 멀리 인도에 가서 팔 물건을 싣고 출항한다. 잘만 하면 열 배로 남겨 먹을 수 있는 열대의 귀한 향신료와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올 예정이다. 애당초 이들에게는 자신들만의 무역선을 띄울 기회가 없었다. 베니스의 무역선은 오로지 거상 샤일록만 띄울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샤일록의 발아래로 들어가든가 영원히 가난해야만 했다. 작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천신만고 끝에 상인 조합을 만들고 마침내 배를 띄운 날 뮤지컬, 아니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베니스의 상인들》 포스터〉 (출처: 국립창극단)


안토니오, 바사니오, 그라치아노, 토마소 등등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며 이름 모를 이 배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행복한 그 자리에 나타나 산통을 깨는 인물은 바로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된 샤일록이다.

하지만 최강부자 샤일록이라고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잔챙이라고 무시해 왔던 상인 조합이 어느새 배를 사서 인도를 향한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안토니오의 실행력에 공포감을 느낀다. 잔챙이들을 비웃는 행복을 맛보려던 그의 마음이 잔챙이들의 배가 출항한다는 사실 앞에 와장창 깨져버린다. 돈 말고는 내세울 것 없는 자신과 달리 안토니오는 모든 사람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배 한 척을 띄웠다면 그다음은 두 척 그다음은 네 척이 아니란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의 머릿속에는 사람들로부터의 존경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립창극단이 2023년에 초연을 올렸고 2025년 6월 재연에 올라온 《베니스의 상인들》 속 샤일록의 종교는 더 이상 유대교조차 아니다. 그의 종교는 오로지 돈, 돈, 돈 뿐이다. 그의 신의 이름은 돈이다. 그렇기에 돈을 버는 데 방해가 될 성싶은 대상들은 모두 제거 대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그토록 비열한 방법을 써가며 안토니오를 몰락시키려 하는 이유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의 신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토록 열망하면서도 가진 사람은 비난받는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 시대의 샤일록이다.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 속 샤일록〉 (출처: 국립극장 공식 블로그)


원작에서 샤일록이 비난받는 주요 이유 중 80%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길에서 그를 만난 유대인인 샤일록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며 강요하고 고리대금업자로 욕하지만 실제로 안토니오 자신은 방탕한 나날로 빚이 없이는 방탕을 계속할 수 없는 인물이다. 샤일록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도 아니건만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안토니오는 샤일록에게 침을 뱉을 권리라도 얻은 듯이 행동한다. 샤일록은 이를 갈며 자신을 욕하는 가톨릭 교도들, 그중에서도 최악인 안토니오에게 할 수만 있다면 복수를 맹세한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쉽게 빨리 찾아온다.

안토니오가 형제와도 같다며 사랑하는 친구 바사니오가 포샤라는 부자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여성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3천 더컷이라는 거액을 내야만 한다. 그렇다고 청혼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구혼자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포샤의 어머니가 낸 문제를 풀어야만 포샤와 결혼할 수 있다. 《베니스의 상인들》의 바사니오는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이지만 포샤에게 자신이 베니스의 ‘상인’이라고 소개한다. 나중에 포샤에게 가난하다고 고백하기는 하지만 그는 베니스의 상인이 아니라 베니스의 상인이 꿈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모든 꿈은 인도로 향하는 무역선에 실어 보냈다. 그런데 공연을 보다 보면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고 실의에 빠지곤 했다.

그 모든 모습을 보아온 안토니오건만 이번만은 진심이라는 바사니오의 말에 원수와 다름없는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러 간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 건 아닌 바사니오와 안토니오는 부탁을 하러 간 상황에서도 샤일록에게 정의를 설파하다 비웃음만 사는데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샤일록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복수의 순간이 왔음을 예감한 그는 안토니오의 빚 담보로 안토니오 가슴살 1파운드를 제안한다. 바사니오는 이 무서운 제안을 거절하지만 웬걸 안토니오가 덥석 받는다. 배만 들어오면 3천 더컷은 금방 갚는다며. 하지만 그 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 속 안토니오〉 (출처: 국립창극단)


자, 그 배가 문제다. 그 배에는 선원들이 탔다. 그 배에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 행복한 날 항구에서 행복한 미래를 기대했던 가족들의 아버지, 남편, 아들들이 배와 함께 사라졌다. 값진 물품을 가득 싣고 돗만큼이나 가슴이 부풀어 돌아오던 배를 습격한 것은 샤일록의 지시를 받은 마르코가 탄 배다. 해적선의 소행으로 위장했지만 죽어가면서도 마르코의 두건을 거머쥔 선원 덕분에 샤일록의 행실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 공연 장면〉 (출처: 국립창극단)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 2막 13장, 다시 배가 나아간다! 공연 장면〉
(출처: YouTube 문화포커스)  더보기

하지만 그렇게 드러나기 전, 샤일록은 가슴살 한 파운드를 받겠다며 칼춤을 추는데, 포샤가 제안한 열 배의 3만 더컷도 거절하고 원하는 것은 오로지 안토니오의 가슴살뿐이란다. 아니면 상인 조합의 권리를 자신에게 넘기든가. 그렇다면 상인 조합의 권리가 3만 더컷 이상이란 뜻인가?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가슴살 한 근 앞에서 이성을 상실한다. 그의 신은 돈이건만 그는 어째서 복수의 화신이 되었는가. 안타깝게도 이 작품에서 그 이유를 알기란 무리다.

원작에서 셰익스피어가 구구절절 유대인에 대한 인종 혐오를 바탕으로 쌓아 올린 울분과 고통의 나날들이, 딸에게서마저 버림받은 아버지의 초라함이, 이 작품에서는 사라졌다. 이 작품에서 샤일록에게 남은 거대부는 거대악이라는 단순한 도식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도식이 먹힌다! 사람들은 이제 너무 큰 부와 권력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까?

샤일록의 반대편에 서 있는 안토니오가 정말로 너무나 정의롭고 인망이 좋아서 상인 조합을 조직해 무역을 한다고 치자. 유대인 혐오는 애초에 올리비에 로렌스가 깨부순지 오래니 이제 현대의 신인 금권만능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치자. 샤일록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수심으로 깨진, 배의 선원들의 가족들의 나날은 산산히 부서진다. 희망이 남아 있었을 때는 행복한 내일을 꿈꿀 수 있었다. 하지만 샤일록은 이들의 미래에도 목숨에도 관심이 없다. 이런 인물과 엮인다면 내일 따위는 없다. 불안과 공포, 내일은 무엇을 빼앗길 것인가 하는 두려움뿐이다. 희망의 자리를 체념이 대신한다. 이 체념이 들어서는 가장 강렬한 장면이 바로 극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는 법정 장면이다.

포샤가 남장을 하고 변호사로 변장하여 등장해 샤일록에게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가슴살 1파운드 뿐이지 기독교도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된다!” 고 외치는 장면이다. 원작에서는 이 장면에서 어떤 비난과 고난과 욕설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샤일록이 마침내 무릎을 꿇는다. 비굴하게 그럼 3천 더컷이라도 받겠다고 노선을 바꾸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 창극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바사니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포샤의 변론이 아니라 샤일록이 살인을 사주했다는 증거다. 샤일록의 부하 마르코가 상인 조합의 배를 습격했다는 증거인 마르코의 두건. 샤일록이 증정했다고 명백하게 수가 놓아진 그 두건. 포샤의 회심의 핏방울 변호가 샤일록의 돈에 의해 막히고 재판관이 가슴살 도려내기를 진행하라고 외칠 때 이 작품은 비로소 현대적 결말로 향한다. 돈으로 관료와 법정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법은 같은 판결을 내려주지 않는다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라고.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작의 키맨이었던 포샤는 작은 엔터테인을 담당하는 인물로 전락한다.

이 명백한 사실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은 보는 사람의 수많은 눈, 그리고 여론뿐이라는 것. 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유죄판결을 받고 가진 재산을 다 빼앗긴 샤일록은 돈이 다시 세상을 지배할 때 다시 태어나 그보다 더한 삶을 살겠다고 하는데, 관객들은 그에게 열광하며 박수를 친다. 찜찜하지만 할 수 없다. 배우가 노래를 너무 잘 부르는 데다, 가장 멋진 대목마다 샤일록에게 몰아주었으니 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살아남은 선원들에게는 큰돈과 보상이 주어 지지만 돈으로도 죽은 동료들을 살릴 방법은 없다. 한 사람의 추악한 욕망으로 인해 꽤 단란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일상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이야기, 흔한 옛날이야기 같지만 현대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어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조금만 더 나아가자면 안토니오의 상인 조합이 인도에 ‘무역’을 하러 간다는 것도 어불성설 아니던가. 싸구려 물품을 가지고 가서 자신들의 나라에서 비싸게 팔리는 물품을 그보다 더 싸게 사 와서 비싸게 팔아치우는 이들, 그리고 인도를 마치 누구의 땅도 아닌 것처럼 점령군의 기세로 침략했던 사람들의 행렬에 안토니오와 그토록 행복을 바랐던 상인 조합의 개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도인들에게는 필경 불행이었을 것이고 공포였을 터였다. 자, 이제 누가 악이지? 대답할 수 있을까?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 공연 장면〉 (출처: 국립극장 공식 블로그)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 〈뮤지컬 스토리〉, <밤새도록 뮤지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살인죄로 형문 받는 거창수령”

노상추, 노상추일기, 1825년 2월 9일~3월 26일

거창(居昌) 수령 이재연(李載延)이 살인을 저질러 선산부에 구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상추는 이재연에게 위문 편지를 보냈다. 심지어 칼[枷]까지 쓰고 갇혀 있다고 하는데 법전의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노상추는 진심으로 이재연을 동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 주어야 할 것인데. 이재연은 형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재연이 저지른 잘못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달인 2월에 이웃마을의 상놈 최가가 그의 며느리를 구박해서 연못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 최가 놈은 며느리의 시체를 이재연의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까운 곳에 묻었다. 이를 알게 된 이재연은 최가 놈을 잡아들여 때린 다음에 마당 근처에 있는 연못에 집어넣었다. 최가 놈이 덜덜 떠는 모습을 본 이재연은 마음이 누그러져서 최가 놈을 물 밖으로 꺼내 따뜻한 곳에 두게 하였다. 그런데 최가 놈의 동생이 형에게 밥도 주지 않고 치료하지도 않아 그대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이 이재연에게 있다고 고발하여 이재연이 잡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과연 이재연은 어떤 처분을 받게 될 것인지. 노상추는 염탐을 위주로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는 관찰사가 이재연에게 유리한 처분을 해 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살해하여 잡아먹은 도적, 이웃사람으로 밝혀지다”

김령, 계암일록, 1608년 11월 18일

1608년 11월 18일, 들으니, 선산(善山)에 89살 먹은 노인이 있었다고 한다.

난리 뒤에 굶주림이 심한 때, 아들이 그의 아비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도적을 만났다. 도적이 돌연 자기의 아비를 가로채어 죽여 잡아먹었다. 그는 기겁해서 달아났다. 그 도적의 얼굴을 식별해 보니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이었다.

아들은 천병(명나라 군대)에 투신하여 걸식하며 시졸이 되어 요동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다시 당장(명나라 장수)을 따라 건주위로 가서 노추(누르하치)를 구경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옛날 살던 집에 이르러 원수가 아직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는 것을 알고는 바로 인동 수령에게 가서 그 사유를 알렸다. 원수는 바야흐로 좌수(座首)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를 잡아서 심문하니 정말 죄를 자백했다.

이 일은 아주 기이한 일이라 기록할 만하다.

“홧김에 남의 집을 때려 부순 가짜 유생”

노상추, 노상추일기, 1826년 3월 21일~3월 27일

암자에 갔다가 집에 온 노상추는 집 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회당(永懷堂)의 창후 두 짝이 산산 조각나서 구멍으로 바람이 숭숭 드나들고 있었다. 노상추가 노해서 감히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저질렀냐고 집안사람들에게 묻자, 울진(蔚珍)에서 본면(本面) 송천리(松川里)에 들어와 살고 있는 신(申)가 놈이 이래 놓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상추의 집 남자종 복만(卜萬)과 술을 마시다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는데, 복만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하면서 영회당에 와서 다짜고짜 창을 때려 부수었다는 것이다.

노상추는 이미 신가 놈이 양반으로 모칭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괘씸한지고. 노상추는 남자종의 이름으로 관아에 소장을 올렸다. 관아에서는 소장에 언급된 복만과 신가 놈을 잡아올 것을 명했다. 노상추는 집안에 화를 끌고 들어온 복만을 잡아 넘겼다. 신가 놈도 곧 잡혀온 모양이었다. 노상추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손자 명숙(明璹)의 이름으로 또다시 소장을 올리려고 했으나 수령이 만류하였다. 수령은 노상추의 화를 풀어주려고 다독이면서 장방(長房)에 신가 놈을 구속하고, 복만은 태(笞) 10대를 때리고 석방하였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한 노상추는 다시금 명숙의 이름으로 소장을 올렸다. 하지만 수령은 뇌자(牢子) 사령이 말하길 신가 놈이 설사병이 심하다고 했다면서 그를 풀어주고 대신 신가 놈의 아들을 잡아두었다. 이는 분명 신가 놈이 뇌자 사령과 서로 짠 것이다. 계속되는 노상추의 소장에 수령은 “이번에 엄히 처벌할 것임” 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노상추는 상놈이 유학으로 모칭한 것 역시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수령에게 신신당부했다. 이에 수령은 ‘신가 놈을 관아에서 좌부(座夫)로 등급을 낮추어 정해서 포(布)를 납부하게 하고 그의 아들은 통인(通印)의 보인으로 채워 정할 것’이라 처분하였다.

후련해진 노상추는 목수를 불러와 부서진 창호를 수리하였다. 하지만 역시 부서진 창호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나서 “미친놈이 부순 창을 어서 수리해라.” 라고 목수에게 거칠게 내뱉었다.

“관고에서 은잔을 훔친 윤효빙은 어떻게 탈옥하였을까”

황사우, 재영남일기, 1519년 6월 14일~1519년 9월 22일

1519년 6월 14일, 황사우가 성주에 도착하니 겸직어사 남세준(南世準)이 성주에 머물며 감사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세준은 강중진(康仲珍)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개인 사정으로 사람을 죽인사건, 윤효빙(尹孝聘)이 안음현감으로 있을 때 부정을 저지른 사건, 고령에 사는 최씨가 몰래 저지른 간악한 사건 등을 추고하기 위해 내려와 있었다.

6월 21일, 안음현에 도착하니 안음현감 안우가 왕명을 맞이하였다. 훈도(訓導)는 전 현감 윤효빙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윤효빙이 은잔을 훔쳤는데 이웃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떠벌리자 되 갖다 놓은 사실이 적발되어 수감되었던 것이다.

9월 6일, 의령현에 머물고 있을 때 윤효빙이 감옥에서 도망쳤다는 기별을 듣게 된다.

9월 9일, 함안군에 머물고 있을 때 윤효빙이 탈옥했다는 첩정(牒呈)이 왔기에 즉시 찾아서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9월 16일, 철성. 황사우는 윤효빙이 전에 안음현감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재물을 축적해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떼거리를 이루어 50여 명이 진주 감옥을 습격해서 도주하였다는 윤효빙 탈옥사건의 대강을 알게 된다.

9월 21일, 진산에 머물고 있을 때 어사 남세준이 감사의 방의로 갔다. 진주목사 신영홍(申永泓)이 윤효빙이 탈옥하여 도망간 사건 때문에 조정이 놀라고 동요하여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을 보내 잡아 오라 하였기 때문에 함께 들어와서 만나게 되었다.

9월 22일, 어사 남세준이 아침 일찍 출발해서 황사우는 미처 뵙지 못하였다. 윤효빙의 탈옥 사건이 놀라우니 감사가 찾아서 체포하라는 유지(有旨)가 왔다. 그래서 즉시 사근도 찰방과 단성현감에게 이 일을 맡겨서 의심 가는 곳을 찾아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후 윤효빙이 체포되었는지에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윤효빙 탈옥 사건의 전말은 어사 남세준이 죽고 난후, 그의 죽음을 논하는 사신의 글에서 밝혀진다. 윤효빙이 갇혀있던 진주감옥의 진주목사는 신영홍이었는데, 그는 효빙과 교분이 있어 은밀히 남세준과 동의하여 일부러 효빙에게 옥을 넘어 도망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세준이 세상을 떠난 1533년 1월 16일 실록의 기록이다. “이조 참판 남세준(南世準)이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안음 현감(安陰縣監) 윤효빙(尹孝聘)이 금전을 훔쳐 쓴 일이 발각되어 진주(晉州)의 옥에 갇혔다. 세준이 경차관이 되어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추문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진주목사 신영홍(申永泓)은 효빙과 교분이 있어 은밀히 세준과 동의(同議)하여 일부러 효빙에게 옥을 넘어 도망하도록 하였다. 세준은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고 영홍을 파출하자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효빙은 범장(犯贓, 뇌물을 받거나 공금을 횡령하는 것)의 처벌을 모면하였고, 영홍은 사사로이 하찮은 신의를 세웠으며, 세준은 조정을 속이고 봉명 사신의 체통을 크게 실추시켜서 왕법(王法)이 행하여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비난하였다.”

“홍수 중에 작업에 동원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4년 10월 15일

올해는 비가 많이 왔다. 선산부(善山府)에서는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서쪽에 새로 보(潽)를 쌓아 놓았었는데, 7월에 내린 큰비 때문에 이 보가 무너졌다. 이에 관아에서는 동부(東部)와 서부(西部) 사람들을 보를 새로 쌓는 역(役)에 동원하였다. 그런데 아직 보를 새로 쌓기에는 비로 불어난 강물이 조금도 줄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불어난 물이 좀 빠진 뒤에 작업하자고 요청하였지만, 보를 쌓는 일을 감독하기 위해 나온 좌수, 이방, 군관, 장교들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작업을 독촉하기만 했다. 마침 선산부사도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좌수 이하 사령들은 더욱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하지만 불어난 물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강으로 누구도 선뜻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것이 뻔했다. 모인 장정들이 모두 뒷걸음질을 치자 좌수는 지금 물에 들어가 작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곤장을 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곤장에 맞아 죽느냐, 물에 빠져 죽느냐였다. 공권력 앞에 버틸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거센 강물로 들어갔다. 불어난 물은 깊었고, 그 기세는 거셌다. 그날 작업자 중 네 사람이 수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예견된 결과였다.

이날 목숨을 잃은 네 사람의 가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다. 호소를 들어줄 선산부사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참사가 일어난 뒤로부터 3개월 뒤인 10월, 새로운 선산부사가 부임하였다. 그제야 유족들은 7월에 있었던 참사를 일으킨 당사자들을 고발하여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초례날 호랑이에게 물려간 신랑”

노상추, 노상추일기, 1815년 12월 28일~1816년 1월 8일

어제 김양채가 노상추를 보러 와서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그의 표정이 내내 편안하지 않기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는데, 나중에 듣자 하니 그의 막내아들이 주륵동에서 초례를 치르고 머무르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었다고 한다.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놀랄 만한 일이다. 노상추는 곧바로 남자 종을 보내 김양채를 위문하였는데, 돌아온 남자 종의 말로는 호랑이에게 물린 사람이 살아날 길이 없어 보인다고 한다. 불쌍하기 그지없다.

다음날, 결국 부고가 전해졌다. 호랑이에게 물린 아이가 기어코 죽었다고 한다. 관아에서는 사람을 문 호랑이를 잡기 위해 인근의 포수들을 모두 모았다. 포수들은 곧 법화동에서 호랑이를 잡아 왔다. 잡힌 호랑이가 바로 사람을 문 호랑이라고 한다. 이렇게라도 원수를 갚고 고을을 안정시켰다고는 하나 죽은 아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김양채의 슬픔이 덜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다”

오희문, 쇄미록, 1597년 3월 7일

1597년 3월 7일, 오늘 오희문은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어젯밤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뒷산 인가에 들어와서 자는 사람을 잡아갔다고 한다. 사람을 물어 가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찾아가보니 사람의 반을 먹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분통한 노릇이었다.

호랑이가 마을 사람을 해친 것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달 26일에는 관아에 소속된 관비가 범에게 물려갔다고 한다. 관비는 범에게 물려갈 때 살려달라고 사람들을 애타게 불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서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관비를 물고 달아날 때 관아 뒤를 지나갔다고 하던데,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데도 두려워서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고약한 인심이라 할 만 하였다.

요사이 호랑이들이 많이 돌아다녀서, 혹은 대문을 부수고 울타리를 헤치고는 인가로 들어온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었다. 악독한 맹수가 성하게 다니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도, 이것을 잡아 없애지 못하고 사람마다 두려움에 질려서 해가 넘어가자마자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를 않는 상황이었다. 오희문은 또 한 가지 걱정거리가 늘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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