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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꽃은 공포, 공포의 꽃은 실화,
실화의 원천은 스토리테마파크

무더운 날씨에 지칠 무렵,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서늘한 이야기’를 찾습니다. 하지만 공포는 단지 더위를 잊기 위한 수단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한 현실의 감정이 터져 나오는 또 하나의 방식일까요?

이번 7월호 웹진 《담談》은 ‘일상의 공포’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단, 그것은 단순한 괴담이나 흉흉한 사건이 아닙니다. 스토리테마파크가 지닌 정체성, 즉 실제 역사적 기록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토대를 바탕으로, 우리 조상들이 삶에서 실제 겪고 직접 써낸 ‘실화’를 주제로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실화 안에서 오늘날의 공포를 비춰봅니다.

정진혁의 「저주를 부탁해: 귀신과 거래한 조선 사람들」은 ‘저주’라는 공포가 우리 선조들의 일상에 어떻게 녹아 들어 있는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흥미롭게 추적했습니다.

필자에 의하면 ‘저주’란 “귀신에게 괴롭힘을 의뢰하는 일종의 청탁”입니다. 원한을 가진 자가 원한의 대상을 해하려는 목적으로 귀신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탁의 방식이 매우 무섭습니다. 이 공포는 사실적인 디테일에서 비롯됩니다. 벌레나 뱀과 같은 것을 잡아다 서로 잡아먹게 하여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가 저주를 부리기 위한 도구인 고(蠱)를 만들어 사용하는 ‘고독(蠱毒)’, 배고픈 아이를 음식으로 유인해 대나무 통에 가두고 목숨을 끊어 그 아이의 원혼이 대나무 통 속에 갇히게 해 저주의 도구로 삼는 ‘염매(魘魅)’, 나무·짚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고, 눈을 찌르거나 팔다리를 묶어 그것과 같은 피해가 저주 대상자에게도 가해 지도록 하는 ‘염승(厭勝)’... 상상할수록 무섭고, 생각할수록 기괴합니다.

궁궐과 사가를 넘나들며 펼쳐졌던 치밀한 저주의 방식들, 그리고 그 저주 후 남겨진 소문과 두려움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귀신이 아니라 ‘귀신에게 청탁’할 정도로 폭주해버린 인간 감정임을 보여줍니다.

인기 공포 유튜버, 왓섭(장경섭)의 「무서운 얘기 좋아하면 정말 귀신이 붙을까?」는 괴담을 단순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죽음과 삶 사이의 오래된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의 예의를 무시한 자에게 닥치는 재앙,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화(禍),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괴담은 결국 살아 있는 이들에게 “사람답게 살라”는 경고입니다.

추가로 말씀드린다면 이 여름, 지금 저도 즐겨보고 있는 인기 공포 유튜버, 왓섭의 글에는 그가 왜 이토록 유명한 공포 이야기꾼인지 증명해 내는 부분이 있으니 가능하다면 불을 끄고 혼자 읽어보시길 권장합니다.

서은경 웹툰, 독선생 전의 「버들숲에 이는 바람」은 ‘산호 뒤꽂이’라는 장신구를 통해 여성의 한 맺힌 죽음과 복수 그리고 선의의 도움을 한데 버무립니다. 여성들 자신의 존재를 꽃으로, 은으로, 비녀로 간직해야 했던 시대. 그 ‘아름다움’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생사의 기록은 우리에게 공포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이문영의 「돌아온 여우 귀신」은 고전 괴담을 연상시키면서도 한여름 밤의 정교한 서늘함을 담아냅니다. 간이 사라진 시체와 부활한 시신, 그리고 다시 돌아온 여우 귀신은 조선판 좀비 이야기로도 읽히지만, 결국은 소문과 공포가 어떻게 사람 사이를 파고드는지를 말합니다.

이수진은 뮤지컬이자 창극으로 재창조된 「베니스의 상인들」을 통해, 현대의 공포가 과거의 종교적 혐오에서 자본이라는 신으로 교체되었음을 폭로합니다. 가슴살 한 근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샤일록보다 더한 존재는, 법과 제도를 돈으로 산 자들입니다. 공포는 무대 위 괴물이 아닌, 관객석에 앉아 박수를 보내는 우리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꿀벌의 비행」은 조선시대 문인 오희문의 일기 『쇄미록』을 바탕으로, 공포를 가장 현실적인 얼굴로 데려왔습니다. 1598년, 막내딸을 잃은 조선시대 문인 오희문은 벌을 치고 누에를 키우며 삶을 다시 일구어 나갑니다. 전쟁, 기근, 상실의 공포 속에서도 그는 꿀을 따고 병아리를 돌보며 살아남습니다. 정진혁이 말한 ‘두려움의 전염’이 감정의 영역이라면, 이복순은 ‘생존의 공포’를 현실적으로 풀어냅니다. 결국 공포는 귀신이 아니라, 배고픈 내일, 그리고 사랑을 잃고도 살아가야 하는 오늘일지도 모릅니다.

공포는 단순한 ‘무서움’이 아닙니다. 《담談》이 다룬 공포는 결국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의 일기에서, 마을의 검시 기록에서, 또는 마음속 작은 틈에서 피어난 ‘실화’의 공포는, 여름밤의 한기를 타고 독자 여러분 곁에 조용히 다가갈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기억합니다.
여름의 꽃은 공포, 공포의 꽃은 실화, 실화의 원천은 스토리테마파크입니다.

김한솔 드림




편집자 소개

김한솔
김한솔
2004년 KBS에 입사한 공채 30기 PD. 《역사스페셜》, 《한국사 전》 등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팩츄얼드라마 《임진왜란 1592》,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등 드라마를 만들었다. 현재는 KBS에서 독립해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가 볼 수 있는 사극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조선시대 특수부대 관련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2017년 한국방송대상 대상, 2017년 뉴욕 TV & 필름 페스티벌 작품상 금상, 2017년 휴스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2016년 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 그리메상 연출상 등을 수상하였다.
“살인죄로 형문 받는 거창수령”

노상추, 노상추일기, 1825년 2월 9일~3월 26일

거창(居昌) 수령 이재연(李載延)이 살인을 저질러 선산부에 구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상추는 이재연에게 위문 편지를 보냈다. 심지어 칼[枷]까지 쓰고 갇혀 있다고 하는데 법전의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노상추는 진심으로 이재연을 동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 주어야 할 것인데. 이재연은 형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재연이 저지른 잘못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달인 2월에 이웃마을의 상놈 최가가 그의 며느리를 구박해서 연못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 최가 놈은 며느리의 시체를 이재연의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까운 곳에 묻었다. 이를 알게 된 이재연은 최가 놈을 잡아들여 때린 다음에 마당 근처에 있는 연못에 집어넣었다. 최가 놈이 덜덜 떠는 모습을 본 이재연은 마음이 누그러져서 최가 놈을 물 밖으로 꺼내 따뜻한 곳에 두게 하였다. 그런데 최가 놈의 동생이 형에게 밥도 주지 않고 치료하지도 않아 그대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이 이재연에게 있다고 고발하여 이재연이 잡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과연 이재연은 어떤 처분을 받게 될 것인지. 노상추는 염탐을 위주로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는 관찰사가 이재연에게 유리한 처분을 해 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살해하여 잡아먹은 도적, 이웃사람으로 밝혀지다”

김령, 계암일록, 1608년 11월 18일

1608년 11월 18일, 들으니, 선산(善山)에 89살 먹은 노인이 있었다고 한다.

난리 뒤에 굶주림이 심한 때, 아들이 그의 아비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도적을 만났다. 도적이 돌연 자기의 아비를 가로채어 죽여 잡아먹었다. 그는 기겁해서 달아났다. 그 도적의 얼굴을 식별해 보니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이었다.

아들은 천병(명나라 군대)에 투신하여 걸식하며 시졸이 되어 요동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다시 당장(명나라 장수)을 따라 건주위로 가서 노추(누르하치)를 구경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옛날 살던 집에 이르러 원수가 아직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는 것을 알고는 바로 인동 수령에게 가서 그 사유를 알렸다. 원수는 바야흐로 좌수(座首)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를 잡아서 심문하니 정말 죄를 자백했다.

이 일은 아주 기이한 일이라 기록할 만하다.

“홧김에 남의 집을 때려 부순 가짜 유생”

노상추, 노상추일기, 1826년 3월 21일~3월 27일

암자에 갔다가 집에 온 노상추는 집 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회당(永懷堂)의 창후 두 짝이 산산 조각나서 구멍으로 바람이 숭숭 드나들고 있었다. 노상추가 노해서 감히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저질렀냐고 집안사람들에게 묻자, 울진(蔚珍)에서 본면(本面) 송천리(松川里)에 들어와 살고 있는 신(申)가 놈이 이래 놓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상추의 집 남자종 복만(卜萬)과 술을 마시다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는데, 복만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하면서 영회당에 와서 다짜고짜 창을 때려 부수었다는 것이다.

노상추는 이미 신가 놈이 양반으로 모칭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괘씸한지고. 노상추는 남자종의 이름으로 관아에 소장을 올렸다. 관아에서는 소장에 언급된 복만과 신가 놈을 잡아올 것을 명했다. 노상추는 집안에 화를 끌고 들어온 복만을 잡아 넘겼다. 신가 놈도 곧 잡혀온 모양이었다. 노상추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손자 명숙(明璹)의 이름으로 또다시 소장을 올리려고 했으나 수령이 만류하였다. 수령은 노상추의 화를 풀어주려고 다독이면서 장방(長房)에 신가 놈을 구속하고, 복만은 태(笞) 10대를 때리고 석방하였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한 노상추는 다시금 명숙의 이름으로 소장을 올렸다. 하지만 수령은 뇌자(牢子) 사령이 말하길 신가 놈이 설사병이 심하다고 했다면서 그를 풀어주고 대신 신가 놈의 아들을 잡아두었다. 이는 분명 신가 놈이 뇌자 사령과 서로 짠 것이다. 계속되는 노상추의 소장에 수령은 “이번에 엄히 처벌할 것임” 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노상추는 상놈이 유학으로 모칭한 것 역시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수령에게 신신당부했다. 이에 수령은 ‘신가 놈을 관아에서 좌부(座夫)로 등급을 낮추어 정해서 포(布)를 납부하게 하고 그의 아들은 통인(通印)의 보인으로 채워 정할 것’이라 처분하였다.

후련해진 노상추는 목수를 불러와 부서진 창호를 수리하였다. 하지만 역시 부서진 창호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나서 “미친놈이 부순 창을 어서 수리해라.” 라고 목수에게 거칠게 내뱉었다.

“관고에서 은잔을 훔친 윤효빙은 어떻게 탈옥하였을까”

황사우, 재영남일기, 1519년 6월 14일~1519년 9월 22일

1519년 6월 14일, 황사우가 성주에 도착하니 겸직어사 남세준(南世準)이 성주에 머물며 감사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세준은 강중진(康仲珍)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개인 사정으로 사람을 죽인사건, 윤효빙(尹孝聘)이 안음현감으로 있을 때 부정을 저지른 사건, 고령에 사는 최씨가 몰래 저지른 간악한 사건 등을 추고하기 위해 내려와 있었다.

6월 21일, 안음현에 도착하니 안음현감 안우가 왕명을 맞이하였다. 훈도(訓導)는 전 현감 윤효빙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윤효빙이 은잔을 훔쳤는데 이웃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떠벌리자 되 갖다 놓은 사실이 적발되어 수감되었던 것이다.

9월 6일, 의령현에 머물고 있을 때 윤효빙이 감옥에서 도망쳤다는 기별을 듣게 된다.

9월 9일, 함안군에 머물고 있을 때 윤효빙이 탈옥했다는 첩정(牒呈)이 왔기에 즉시 찾아서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9월 16일, 철성. 황사우는 윤효빙이 전에 안음현감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재물을 축적해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떼거리를 이루어 50여 명이 진주 감옥을 습격해서 도주하였다는 윤효빙 탈옥사건의 대강을 알게 된다.

9월 21일, 진산에 머물고 있을 때 어사 남세준이 감사의 방의로 갔다. 진주목사 신영홍(申永泓)이 윤효빙이 탈옥하여 도망간 사건 때문에 조정이 놀라고 동요하여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을 보내 잡아 오라 하였기 때문에 함께 들어와서 만나게 되었다.

9월 22일, 어사 남세준이 아침 일찍 출발해서 황사우는 미처 뵙지 못하였다. 윤효빙의 탈옥 사건이 놀라우니 감사가 찾아서 체포하라는 유지(有旨)가 왔다. 그래서 즉시 사근도 찰방과 단성현감에게 이 일을 맡겨서 의심 가는 곳을 찾아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후 윤효빙이 체포되었는지에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윤효빙 탈옥 사건의 전말은 어사 남세준이 죽고 난후, 그의 죽음을 논하는 사신의 글에서 밝혀진다. 윤효빙이 갇혀있던 진주감옥의 진주목사는 신영홍이었는데, 그는 효빙과 교분이 있어 은밀히 남세준과 동의하여 일부러 효빙에게 옥을 넘어 도망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세준이 세상을 떠난 1533년 1월 16일 실록의 기록이다. “이조 참판 남세준(南世準)이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안음 현감(安陰縣監) 윤효빙(尹孝聘)이 금전을 훔쳐 쓴 일이 발각되어 진주(晉州)의 옥에 갇혔다. 세준이 경차관이 되어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추문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진주목사 신영홍(申永泓)은 효빙과 교분이 있어 은밀히 세준과 동의(同議)하여 일부러 효빙에게 옥을 넘어 도망하도록 하였다. 세준은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고 영홍을 파출하자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효빙은 범장(犯贓, 뇌물을 받거나 공금을 횡령하는 것)의 처벌을 모면하였고, 영홍은 사사로이 하찮은 신의를 세웠으며, 세준은 조정을 속이고 봉명 사신의 체통을 크게 실추시켜서 왕법(王法)이 행하여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비난하였다.”

“홍수 중에 작업에 동원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4년 10월 15일

올해는 비가 많이 왔다. 선산부(善山府)에서는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서쪽에 새로 보(潽)를 쌓아 놓았었는데, 7월에 내린 큰비 때문에 이 보가 무너졌다. 이에 관아에서는 동부(東部)와 서부(西部) 사람들을 보를 새로 쌓는 역(役)에 동원하였다. 그런데 아직 보를 새로 쌓기에는 비로 불어난 강물이 조금도 줄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불어난 물이 좀 빠진 뒤에 작업하자고 요청하였지만, 보를 쌓는 일을 감독하기 위해 나온 좌수, 이방, 군관, 장교들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작업을 독촉하기만 했다. 마침 선산부사도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좌수 이하 사령들은 더욱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하지만 불어난 물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강으로 누구도 선뜻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것이 뻔했다. 모인 장정들이 모두 뒷걸음질을 치자 좌수는 지금 물에 들어가 작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곤장을 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곤장에 맞아 죽느냐, 물에 빠져 죽느냐였다. 공권력 앞에 버틸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거센 강물로 들어갔다. 불어난 물은 깊었고, 그 기세는 거셌다. 그날 작업자 중 네 사람이 수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예견된 결과였다.

이날 목숨을 잃은 네 사람의 가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다. 호소를 들어줄 선산부사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참사가 일어난 뒤로부터 3개월 뒤인 10월, 새로운 선산부사가 부임하였다. 그제야 유족들은 7월에 있었던 참사를 일으킨 당사자들을 고발하여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초례날 호랑이에게 물려간 신랑”

노상추, 노상추일기, 1815년 12월 28일~1816년 1월 8일

어제 김양채가 노상추를 보러 와서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그의 표정이 내내 편안하지 않기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는데, 나중에 듣자 하니 그의 막내아들이 주륵동에서 초례를 치르고 머무르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었다고 한다.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놀랄 만한 일이다. 노상추는 곧바로 남자 종을 보내 김양채를 위문하였는데, 돌아온 남자 종의 말로는 호랑이에게 물린 사람이 살아날 길이 없어 보인다고 한다. 불쌍하기 그지없다.

다음날, 결국 부고가 전해졌다. 호랑이에게 물린 아이가 기어코 죽었다고 한다. 관아에서는 사람을 문 호랑이를 잡기 위해 인근의 포수들을 모두 모았다. 포수들은 곧 법화동에서 호랑이를 잡아 왔다. 잡힌 호랑이가 바로 사람을 문 호랑이라고 한다. 이렇게라도 원수를 갚고 고을을 안정시켰다고는 하나 죽은 아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김양채의 슬픔이 덜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다”

오희문, 쇄미록, 1597년 3월 7일

1597년 3월 7일, 오늘 오희문은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어젯밤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뒷산 인가에 들어와서 자는 사람을 잡아갔다고 한다. 사람을 물어 가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찾아가보니 사람의 반을 먹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분통한 노릇이었다.

호랑이가 마을 사람을 해친 것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달 26일에는 관아에 소속된 관비가 범에게 물려갔다고 한다. 관비는 범에게 물려갈 때 살려달라고 사람들을 애타게 불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서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관비를 물고 달아날 때 관아 뒤를 지나갔다고 하던데,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데도 두려워서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고약한 인심이라 할 만 하였다.

요사이 호랑이들이 많이 돌아다녀서, 혹은 대문을 부수고 울타리를 헤치고는 인가로 들어온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었다. 악독한 맹수가 성하게 다니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도, 이것을 잡아 없애지 못하고 사람마다 두려움에 질려서 해가 넘어가자마자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를 않는 상황이었다. 오희문은 또 한 가지 걱정거리가 늘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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