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허촌 사또 한익범은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망허산에서 일어난 괴변 때문이었다. 고개를 넘던 소금 장수가 끔찍한 시신을 발견해서 관아에 신고를 한 것이다. 노인네 시신이었는데 배를 갈라서 간을 꺼내 갔다.
명백한 살변이었다. 사람의 생간을 가져간 것으로 보아 창질을 앓고 있는 집 자식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우선은 기찰 포교들을 내보내 마을에서 중병을 앓고 있는 집이 있는지 파악하게 했는데, 소소하게 아픈 집들은 있었지만 중병을 앓는 집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없어진 노인도 없었다. 죽은 노인이 어디 사람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드라마 《별순검》의 살해된 객주〉 (출처: MBC 에브리원)
일단 살변이니 감영에 보고를 올리고 시신은 관아로 옮겨왔다. 날이 더워 시신이 금방 부패할 수 있으므로 얼음을 구해오게 해서 시신을 보존하게 했다. 이것만 해도 비용이 상당히 들었다.
끔찍한 살변이 일어났으니 마을도 공포에 휩싸였다. 평소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도매금으로 욕을 먹기 시작했고, 또 그런 욕을 참고 들을 사람들이 아니니 냅다 주먹을 휘둘러 사람이 다치는 일도 생겼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일이 없었다. 감영에서 검률과 오작인이 와야 검시가 가능하니 그저 하루빨리 와주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작인이 와서 검시 결과를 보고했는데, 그때부터 한 사또의 두통도 시작되었다.
“에잇, 안 되겠다.”
한 사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저녁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더는 견딜 수 없어서 관아를 나온 한 사또는 망허산 쪽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밤에 산을 올라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망허산 입구 쪽에 있는 목금 낭자의 세책방을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다행히 아직 집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한 사또가 사립문 밖에서 ‘이리 오너라’라고 외쳤다. 안방 문이 스르르 열리고 호롱불을 든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금이었다.
“세책방 문은 닫혔습니다. 내일 밝을 때 오시지요.”
“책을 빌리러 온 게 아니다.”
“어머나! 사또 나리 납시셨습니까?”
“들어가도 되겠느냐?”
“이리 오르시지요.”
목금이 대청마루로 사또를 올라오게 했다. 남녀가 유별하니 방으로 모실 수는 없었다.
“누추한 곳에 오셨는데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괜찮다. 갑자기 찾아온 내가 잘못이지.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하문하십시오.”
한 사또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목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엊그제 망허산에서 살변이 일어난 것을 알고 있느냐?”
“고을 사람치고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늘 낮에 오작인이 와서 검시를 했느니라. 그런데…”
“사람 짓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한 사또가 담대한 무관 출신이 아니었다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오작인은 시신의 배가 날카로운 칼로 갈라진 것 같았지만 그 양옆으로도 상처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맹수가 저지른 일처럼 보인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맹수라면 달랑 간만을 끊어가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점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도 함께 적어 놓았다.
〈『신주무원록』〉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짐작 가는 일이 있어서 한번 말씀드려본 것입니다.”
“짐작 가는 일이 무엇이냐?”
“지난달에 한 무리의 도깨비가 망허산에 몰려온 바 있습니다. 하마터면 큰 사변이 날 뻔했는데 다행히 도깨비들이 물러나서 별일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도깨비들이 갑자기 몰려온 이유가…”
“이유가?”
“여우 귀신이 선동한 탓이었습니다.”
한 사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여우 귀신은 한 사또가 망허촌에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윤 초시네 폐가에서 만났던 요괴였다.
“그때 도망치지 않았더냐? 그 여우 귀신이 다시 돌아온 것이냐?”
“그런 모양입니다. 그보다…”
목금이 가만 생각에 잠겼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아직 매장하거나 한 건 아니죠?”
“당연하지. 첫 검시를 마쳤으니 아직 시신을 매장할 수 없다. 감영에서 2차 검시를 결정하기 전에는 시신을 보관해야 한다. 관아에 따로 시신을 둘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서 옥에 넣어두라고 했다.”
“옥문은 잠그셨나요?”
“그, 그건…”
죽은 시신이 살아서 탈옥할 것도 아니니 굳이 잠그지 않았을 것이다. 잠그라는 명도 내리지 않았다.
“아, 빨리 가봐야겠습니다.”
한 사또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목금이 일어나며 바다 신물인 조개와 소라고둥을 챙겼다. 한 사또는 처자의 집에 온다고 칼을 놓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낭자 생각엔 이번에도 여우 귀신이…”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구미호〉 (출처: KBS2)
목금이 딱 잘라서 말했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럼 백이 낭자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백이는 맘이 약해서 안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저랑 가시죠.”
한 사또는 목금을 따라 나오다 마당을 둘러보고는 절굿공이를 주워들었다.
“이것 좀 빌리겠네.”
칼은 없으니 그나마 튼실해 보이는 절굿공이라도 손에 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목금은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관아를 향했다.
두 사람이 발을 재게 놀려 관아의 구석에 있는 형옥에 도착했는데, 감옥 문이 활짝 열려있고 시신은 온데간데없었다. 감옥 안은 시체의 부패를 막으려고 부어놓은 얼음이 녹아서 물이 흥건했다.
한 사또가 머리를 짚었다. 간이 없어진 시체를 보았는데 여우 귀신의 장난인 것을 생각지 못하고 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탓이니, 분명히 자신의 실수였다.
목금이 감옥 안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배가 갈라지고 간이 없어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상태로 움직이면 내장이 쏟아졌을 텐데요?”
한 사또가 미간을 찌푸렸다. 목금 낭자는 때로 말을 막 하는 것 같았다.
“오작인이 검시를 마치고 배를 꿰매 놓았네. 배가 열려있으면 벌레들이 꼬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해서.”
“오작인이 쓴 검시 보고서는 어디 있습니까?”
“그건 내 방에 있지. 가져다주겠다.”
한 사또는 방에 가면, 간 김에 칼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가시죠. 흩어지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한 사또에게도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한 사또는 방에 들어가 칼을 챙겨서 허리에 매달고 검시 보고서를 들고나왔다. 목금이 달빛에 비춰가며 검시 보고서를 읽었다.
“역시 그랬군요. 사또 나리는 이 부분을 보셨습니까?”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거냐?”
“시신이 금방 살해된 것 같지 않고 이미 죽은 지 보름여는 된 듯하다는 내용 말입니다.”
“여름철이라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사망 시점을 정확히 알기 어려울 수도 있고, 시신이 산 고갯마루에 있었기 때문에 발견이 늦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목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고개는 하루에도 서너 명은 꼭 지나다니는 길목입니다. 시신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는 건…”
한 사또는 갑자기 번갯불이 머리에 치는 것 같았다. 즉시 관헌 대청에 뛰어올라 설렁줄을 당겨 통인을 불렀다.
“지금 즉시 포교, 포졸을 모두 소집해라. 긴급 사항이다.”
난데없이 한밤중에 소집된 병사들은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사또가 대청마루에 올라 호령했다.
“비상 상황이다. 근래 초상이 난 집을 알고 있느냐?”
비장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훈장 댁 어르신이 한 보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곳이구나. 누가 그 집을 아느냐? 앞장서라. 모두 출동한다.”
사또는 급히 대청마루를 내려가다가 목금을 보고 말했다.
“낭자는 여기 있도록 하라.”
“신경쓰지 마십시오. 저는 뒤에서 설렁설렁 따라가겠습니다.”
사또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병사들은 여전히 무슨 일인지 모른 채 병장기를 손에 들고 훈장 양진흥의 집으로 출발했다.
“이거 불길한데. 대체 뭔 일이래?”
병사들의 행진으로 잠이 들었던 망허촌 사람들도 깨어나 불안한 기분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한 사또 역시 그런 불안감을 모를 바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다.
“저 집입니다.”
비장이 멈춰서더니 한 집을 가리켰다. 방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한 사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리 오너라.”
그러자 불 켜진 방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려주세요!”
한 사또의 안색이 변했다.
“저 방에 괴한이 있으니 바로 진압하도록 하라!”
비장이 칼을 뽑아 들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부하 병졸 둘이 따라붙었다. 문을 열어젖히자 안에서 시커먼 사람 모양이 휙 뛰쳐나왔다. 그 서슬에 비장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졌다. 한 사또가 들고 있던 칼로 뛰쳐나온 사람을 내리쳤다.
괴한은 한 사또의 칼을 한 손으로 받아냈다. 칼이 손목까지 내리박혔지만 피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어서 이 괴물을 잡아라!”
한 사또의 외침에 병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괴한을 쓰러뜨리고 오라로 몸을 묶었다.
“크아아아!”
일단 사또의 명이라 정신없이 달려들기는 했는데, 괴한이 괴성을 내지르자 병졸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괴한이 버르적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영화 《킹덤 2》, 좀비가 된 안현대감의 모습〉 (출처: Netflix)
“저, 저거, 낮에 검시했던 노인이잖아?”
병졸 하나가 놀라서 외쳤다.
“어, 어, 정말이네.”
심약한 병졸 중에는 너무 놀라 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방에서 비틀거리며 양 훈장이 나왔다.
“아, 아버님이 어찌…”
한 사또가 비장에게 양 훈장을 다시 방으로 들이라고 명했다. 양 훈장은 버둥대며 저항했다.
“제 아버님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 아직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인데 제가 모시겠습니다.”
한 사또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건 훈장의 부친이 아닙니다. 여우 귀신이 무덤을 파헤치고 그 몸에 들어가 조정하는 것입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여, 여우 귀신이라고요?”
“아마 양 훈장의 간을 빼먹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 그래서 제 옷을 들춘 거였…”
양 훈장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영화 《킹덤 2》, 역병환자가 좀비가 되어 사람을 먹는 장면〉 (출처: Netflix)
“이놈! 여우 귀신아, 어찌 다시 돌아왔느냐?”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들고 한 사또를 노려보며 말했다.
“또 네 놈이 날 방해하는구나! 나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야!”
한 사또는 그 순간 칼을 휘둘렀다. 단칼에 목이 떨어져 나갔다. 역시 죽은 지 오래되어 피는 흐르지 않았다.
노인의 미간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나오더니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도 여우 귀신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한 사또는 목금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인사를 올렸다. 목금도 보일 듯 말 듯하게 웃음을 내비쳤다.
한 사또는 고심한 끝에 감영에 올리는 보고서를 간신히 써냈다. 발견된 시신은 고을 훈장의 부친으로 사람의 간이 창질에 좋다는 헛소문을 믿은 누군가의 소행으로 간이 사라진 채 발견되었다는 내용으로 적고 시신은 다시 매장했다는 내용이었다. 병졸들에게는 시체가 살아서 움직였다느니 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단속했다. 하지만 더운 여름날 사람들이 몸을 식히려 모여 앉으면 이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때마다 진짜네, 거짓부렁이네 하면서 오래도록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시신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간단하게 묶는 수시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조선의 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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