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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함을 넘는 함께함

24절기 중 여덟 번째가 소만이다. 음력으로는 4월, 양력으로는 대략 5월 중기가 소만에 해당한다. ‘소만(小滿)’은 “작은 것들이 가득 찬다.”라는 의미이다. 소만에 이르면 초여름의 풍부한 햇볕에 움츠렸던 만물이 본격적으로 생장하기 시작한다. 주변은 푸르름으로 채워지고, 여러 동물도 활기를 띠며 분주해진다. 소만이 되면 여러 가지 밭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김매기로 쉴 틈이 없다. 무엇보다 한 해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모내기가 이때 이루어진다.




모내기에 대한 기대와 걱정


소만을 전후한 농촌은 어느 시기보다 분주하다. 한 해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한편에서는 가을보리 수확이 이루어진다. 조선 후기 전답을 경영하는 양반 지주의 일기에는 그러한 분주함이 잘 드러난다.

경상도 예천 출신의 양반 지식인 권별(權鼈)이 남긴 『죽소부군일기(竹所府君日記)』에는 농사일과 관련된 내용이 많은데, 그중에서 1625년(인조 3) 한 해의 일기를 살펴보면 소만이 있는 4월(음력)이 가장 분주하다. 권별은 그해 4월 9일과 10일에 목화씨와 콩씨를 밭에 뿌리고, 28일에는 집 앞 두 논의 모내기를 하였다. 그 또한 성공적인 한 해 농사를 위해 미리 재배할 작물을 선정하고, 절기에 따라 파종 및 관리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농사일은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다. 무심한 하늘은 때때로 가뭄·우박·폭우·냉해 등을 안겨주어 한 해 농사의 성공을 기원하는 농심을 멍들게 한다.

그 때문에 소만 전후의 일기 기록에는 바쁜 농사만큼 한 해 농사에 대한 걱정과 바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소만을 전후해서는 모내기에 필수적인 수자원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했기 때문에 가뭄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1753년(영조 29) 상주의 학자 권상일(權相一)은 『청대일기(淸臺日記)』에서 오랜 가뭄과 부족한 비로 그 해는 모내기가 어려워졌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한 해 농사는 국가 재정과 직결되는 만큼, 영조도 그해의 가뭄을 극복하려는 바람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한다.

선산 출신의 무신 노상추(盧尙樞)가 남긴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의 1788년(정조 12) 상황은 좀 더 절망적이다. 봄부터 이어진 혹독한 가뭄으로 그해 보리농사는 흉작이었다. 거기다가 물 부족으로 모내기를 포기한 농가도 적지 않았다. 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리농사의 흉작으로 시장의 곡식 가격이 크게 오른 것이다. 6월이 다 지나서야 비가 내리는데, 이번에는 그 비가 너무 지나쳐 낙동강이 범람하는 큰 수재를 입었다. 그의 일기에는 그해 농사의 혹독함과 굶주림에 허덕일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이 잘 담겨 있다.

반면에 적절한 비는 한 해 농사를 기대하게 한다. 예안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령(金坽)은 『계암일록(溪巖日錄)』에서 1622년(광해군 14) 5월 때맞춰 내린 비에 대한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일기에 따르면 근래 3~4년과 비교해 보리농사의 작황이 매우 좋았고, 더욱 다행인 것은 모내기를 때에 맞추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김령은 풍년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으며, 주변의 농가도 모두 기뻐하였다. 이처럼 소만은 분주함 속에서도 한 해 농사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공존하는 절기이다.




강남에서 온 농법


남쪽의 수도(水稻)[논벼]는 이름이 한 가지가 아니라, 대개 세 가지의 종류가 있다. 일찍 익으며 알이 자잘한 것을 선도(秈稻)[메벼의 일종]라 하고, 늦게 익지만 향기롭고 윤기 있는 것을 갱도(粳稻)[메벼의 일종]라 하며, 중간에 쌀이 희고 찰진 것을 나도(稬稻)[찰벼의 일종]라 한다. 청명(淸明)이 지난 뒤 세 가지를 한 번에 낙종(落種)했다가 소만(小滿)·망종(芒種) 무렵에 나누어서 옮겨 심는다.

- 허균(許筠), 『한정록(閑情錄)』


17세기 초반의 문신이자 작가인 허균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은둔과 한가함에 관한 여러 서적의 내용을 모아 『한정록』을 엮었다. 그가 바라는 은둔과 한가함은 안정적인 농업 생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조선시대 중소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가진 양반 계층은 농업 생산과 경작, 그리고 작물 재배 기술과 관련된 ‘치농(治農)’의 방도를 고민하였다.


모내기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직파법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위의 『한정록』에서 소개한 수도작(水稻作), 즉 논에 물을 대서 벼를 재배하는 논농사 방식은 선사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주된 식량인 쌀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리매김해 오고 있다. 수도작은 짧은 시간 안에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매우 노동집약적인 농법이다. 그런데 수도작에서 노동력을 가장 많이 투입하는 작업이 소만에 이루어지는 모내기이다.

『한정록』의 소개처럼 소만에 앞서 논농사를 위해 여러 메벼와 찰벼를 낙종한다. 논농사의 낙종은 볍씨를 밭에다 직접 뿌리는 육도작(陸稻作), 즉 밭벼 농사와 달리 못자리에다가 볍씨를 싹 틔운다. 그렇게 못자리에서 자란 벼를 ‘모’라고 하는데, 소만이 되면 물을 채운 논에다가 모를 옮겨 심는다. 그것이 바로 모내기이다.

모내기 농법은 모를 옮긴다고 하여 이앙법(移秧法)이라고도 부른다. 이 농법은 중국 장강(長江) 이남인 강남(江南) 지방에서 일찍이 발전하였다. 강남의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수자원, 그리고 수차(水車)를 활용한 농업 기술을 바탕으로 남송(南宋) 이후 강남 일대가 빠르게 개발되었다. 그런 모내기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고려 후기이며, 조선 초 세종 연간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設)』에는 그와 관련된 기술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농사직설』에서는 모내기를 장려하지 않는다. 모내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논에 물을 대어야 하는데, 한반도의 기후상 소만이 되면 가뭄이 들기 때문에 한 해 농사를 망칠 수 있었다.


『농가직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럼에도 모내기를 활용한 논농사는 16~17세기를 거치면서, 벼를 재배하는 지배적인 생산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모내기는 여러 측면에서 이점이 있다. 19세기 전반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모내기의 이점으로서 고된 김매기 대비 노동력 절감과 이모작(二毛作)을 들었다. 여기서 노동력 절감은 곧 다른 방면에 노동력을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한 농지에 두 번 서로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이모작의 가능은 토지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조선 전기 정부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모내기법은 높은 생산력을 담보하기에 점진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가뭄 동안 논에 물을 댈 수리(水利) 시설 확보와 모내기 때 집중적으로 투입할 노동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한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 낼 수 없다. 계층을 넘어서서 전답을 소유한 양반 지주와 경작자인 농민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공존을 위한 ‘함께함의 지혜’를 고심할 필요가 있었다.




전통에서 찾는 ‘함께함의 지혜’


농경의 시작과 함께 인류는 정착 생활을 본격화했다. 이에 농경을 생업으로 하는 농민들의 촌락이 곳곳에 형성되었다. 그런 촌락에는 농경이 중심이 된 공동체의 운영 원리가 작동하였다. 고대 이래 농경의 발달과 함께 우리 선조들도 향약(鄕約)·계(契)·두레·향도(香徒) 등 여러 형태의 공동체를 운영해 왔다. 그중에서 계는 촌락 공동체의 운영 원리로서 오래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계는 구성원 간의 상호부조와 결속력 강화, 그리고 어떠한 공동 이익의 창출을 위해 운영되는 일종의 협동 조직이다. 계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동(洞)’ 단위로 시행되는 동계(洞契)가 농경과 가장 밀접하다. ‘동’은 농경 생활권을 중심으로 하나 또는 복수의 촌락으로 구성된다. 동계는 대체로 해당 ‘동’의 유력자, 즉 양반 계층이 주도하였다. 만약 동계에다가 성리학적 자치 규범인 향약(鄕約)을 접목하면, 이를 동약(洞約)이라고도 부른다. 전통 시대 동안 양반 계층은 ‘동’의 질서 유지와 교화를 목적으로 동계를 결성하였지만, 실질적인 운영 목적은 자신들의 기반인 농촌 사회의 안정에 있었다. 따라서 동계 조직이 농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1739년(영조 15) 대구의 학자 최흥원(崔興遠)이 제정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은 가장 모범적인 형태의 동계·동약으로 평가받는다. 부인동동약의 특징은 선공고(先公庫)와 휼빈고(卹貧庫) 운영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선공고의 명칭은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사로운 일을 뒤에 한다.”라는 ‘선공후사(先公後私)’에서 취한 것이다. 당시 부인동은 세금 일부를 면화(棉花)로 납부해야 했지만, 목화를 재배하지 않는 농민이 많아 어려움이 컸다. 이에 공동으로 경작하는 공전(公田)을 마련하고, 그 소출로 동에 부과된 세금에 대응하였다. 휼빈고는 부인동의 동민이 모두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난한 자에게 땅과 곡식을 빌려주는 기구이다. 부인동동약에는 신분과 계층을 떠나,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선조의 지혜가 담겨 있다.

두레는 공동 노동조직으로서 일손이 부족할 때 이웃 간에 노동력을 교환하는 ‘품앗이’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양반 계층이 주도하는 동계·동약과 달리 직접 전답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조직이다. 절기 중에서도 모내기가 행해지는 소만에 이르면, 두레의 효과가 빛을 발한다. 모내기 때는 큰 노동력이 일시에 투입되어야 하는데, 두레 조직이 노동력을 투입하는 규모와 시기를 결정하였다. 모내기 때가 되면 두레에서 의논한 바에 따라 오늘은 우리 집 논, 다음은 다른 집 논, 이런 식으로 노동력을 공유했다. 모내기 동안 피로를 풀고 흥을 돋우기 위해 거행하는 놀이도 두레 조직이 주도한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은 ‘함께함의 지혜’를 모아 한 해 농사의 힘겨움을 풀어 나갔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 24절기의 중요성은 예전과 비교해 크게 낮아졌다. 소만의 분주함도 대부분의 현대인은 실감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소만의 절기마다 ‘함께함의 지혜’를 모색한 선조들의 정신만큼은 언제든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집필자 소개

이광우
이광우
영남대학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였으며, 조선 후기 향약 연구를 통해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근무하며,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동아시아 서원의 일반성과 다양성』(공저),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상주 난재 채수 종가』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다양성과 근대 이행기 전통의 재구성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보리타작 하는 계절”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902년 5월 29일 ~ 1902년 6월 2일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음력 5월 말은 보리타작을 시행하는 계절이다. 보리타작은 모내기가 끝날 무렵 시작되어 장맛비가 오기 전에 타작을 마쳐야 한다. 이우석의 집에서도 타작을 담당할 사람 3명을 고용하여 타작을 했다.

보리를 수확하게 되면 보릿단을 묶어서 당일이나 다음날로 되도록 빨리 보리타작을 해야 한다. 보리가 많지 않을 때에는 집 마당에서 집안 식구끼리 타작을 해도 괜찮지만, 양이 일정 정도 이상 많을 때에는 고용인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우석의 집도 그런 경우였다. 집 마당에서 보리 타작을 하기에는 보리 양이 많았기 때문에 보리를 벤 밭에 임시로 마당을 만들어 타작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 일꾼들은 묶어둔 보릿단을 돌에 내리쳐서 보리 낟알을 털어야 했다. 새끼손가락 정도의 굵기로 된 밧줄로 보릿단을 감아 묶은 이 보릿단을 어깨 너머로 들어올려 내리치는 것이다. 이렇게 묶인 보릿단을 한 바퀴 돌려가면서 낟알을 털어낸 다음, 보릿단을 풀어 바닥에 널어 놓고 도리깨로 두들겨서 보릿단 속에 묻힌 보리 이삭까지 모조리 털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도리깨질을 하면서 타작하는 일인데, 너무나 고된 작업이기 때문에 ‘옹헤야’ 같은 노동요가 보리타작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보리타작을 하노라면 보릿단이 얼굴을 찌르기도 하는 데다 한창 날씨가 더울 때 이루어지는 작업이어서 고되기 이루 말할 데 없다.

“양봉을 시도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8년 5월 7일

1598년 5월 7일, 오희문은 올해 양봉을 해 보기로 하였다. 강원도에서는 벌이 많기도 하였고, 식구들에게 새로운 먹거리도 마련할 겸, 처음으로 양봉을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얼마전 지인에게 몇 개의 벌통을 받았는데, 가져올 때 잘못하여 벌들이 대부분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어제는 신수함에게서 벌통을 받았는데, 이 벌통의 새끼벌들을 오희문의 벌통으로 옮길 셈이었다. 신수함의 벌통에 연기를 쏘이자 새끼벌들이 나왔다. 이후 벌통을 동쪽 울타리 밖의 배나무에 매달고 종 수이로 하여금 벌들을 벌통으로 받으려 하였는데, 이 벌들이 도로 흩어져서는 뒷산 한마장이나 되는 숲 나무 밑에 모였다. 그리하여 간신히 이 벌들을 통에 담았다가 희철의 방 밖에다가 앉혀두었다. 거의 벌들을 날려 버릴 뻔하다가 도로 잡았으니 기쁜 일이었다. 종 수이는 처음 해보는 양봉이라 벌을 치는 법도 잘 모르고, 미끄러운 그릇에 벌들을 담으려 했는데 그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들어보니 미끄러운 그릇에 받게 되면 얼마 안가 벌들이 다 도망한다고 한다.

“관청에서 모내기를 ‘정(井)’자로 하도록 지시하다”

남붕, 해주일록(海洲日錄),
1926년 5월 8일 ~ 1926년 5월 11일

1926년 5월 11일 이날은 남붕도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는데, 먼저 아침 일찍 옥금(玉今)으로 가서 소작인과 일꾼들에게 논 5두락에 모내기를 시작하게 했다. 그런데 봇물이 오지 않아 일손을 멈추고 나머지 일을 뒤로 미루었다. 봉후(峰後), 유전(田畓), 강단(江端)의 논 7두락에도 모내기를 하였는데, 일꾼 20여 명을 썼다.

이번 모내기에 예전과 달리 이렇게 많은 일꾼을 쓰게 된 것은 모두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해서였다. 엊그제 마을 사람들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온 후로 예전 방식으로 모내기를 하자 면사무소에서 사람이 나와 아직 모내기하지 않은 집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반드시 ‘정’자로 모내기를 해야 한다고 성화를 하고 다녔다. 남붕 또한 면사무소 사람의 방문을 받고 마지못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결국,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하는 바람에 한 줄씩 모를 심었으므로 일꾼은 전보다 더 들었고, 앞으로 곡식 소출도 이익이 없고 감소될 것이 분명하니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모내기를 어렵게 하는 가뭄”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897년 5월 9일 ~ 1897년 6월 11일

요즘은 모내기철이다. 이우석(李愚錫)은 최근 여러 논에서 모내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위네 집에서도 월초에 모내기를 한다고 소식을 들었는데 이우석은 몸이 아파서 가지 못한 적이 있다. 모내기를 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지만 평창에는 저수지가 그렇게 많지 않아 비가 충분히 내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방도가 없다. 그런데 걱정스럽게도 요새는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고, 잇따라 맑은 날씨만 계속되고 있다.

5월 22일은 하지였는데, 가뭄 든 논이 많아 근처 논에서 태반이나 모내기하지 못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내기하는 시점에 물이 부족해서 모내기에 실패하면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게 된다. 이우석은 올해 농사가 매우 걱정스러웠다. 지금 시점까지 이 정도로 모내기하지 못한 상황이어서는 곤란하다. 30일이 되어서 들린 소식인즉, 횡성에 있는 갑천 같은 곳에서는 예년과 같이 모내기가 시작됐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태반이나 모내기를 시작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장마 후 들판에 남은 곡식들을 살피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65년 5월 3일 ~ 1765년 5월 16일

노상추의 집안에서 경작하고 있는 논밭은 낙동강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가장 높은 소출을 내는 논은 포(浦) 인근의 밭이었다. 낙동강이 실어온 퇴적물이 좋은 영양분이 되어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비가 많이 내려 낙동강이 범람하면 논밭에 심어놓은 곡식이 모두 쓸려 내려갔다. 여름이 되자 올해도 여지없이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났다.

비가 많이 내리기 전에 노상추의 집안에서는 보리타작을 미리 해두었다. 홍수가 나면 보리마저 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제때 수확해서 양곡을 저장해 둬야 했다. 이번 하짓날에 타작한 보리는 이전에 미리 거둬 둔 것이었고, 아직 밭에는 채 수확하지 않은 보리들이 있었다. 노상추는 내리는 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장대비가 그치자마자 밭으로 나가 보았다. 다행히 들에 보리가 남아 있었다.

남은 보리를 갈무리하자 또다시 며칠 동안 굵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이번에야말로 강물이 넘쳐 포 인근의 논밭이 잠기게 될 것 같았다. 보리를 거둬들인 후 포의 논밭에 남겨놓은 것은 밀뿐이었다. 과연 포 인근의 논밭은 모두 잠겨버렸다. 하지만 밀은 기특하게도 물에 둥둥 뜬 채 떠내려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덕분에 밀도 보리와 마찬가지로 거둬들여 타작할 수 있었다. 장마철은 매일같이 하늘을 보며 일희일비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머니 생신에 친지들이 곡식을 보내어 오다”

최흥원, 역중일기(曆中日記),
1746년 12월 14일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인근의 친족들도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종지 마을과 지묘 마을에 사는 친지들이 모두 찾아와서 어머니께 축수를 올렸다. 그리곤 곡식을 수십 섬이나 최흥원의 집으로 보내어 온 것이 아닌가. 까닭을 들어보니 얼마 전 최흥원의 집 창고에서 불이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안사람들끼리 운영하는 종계에서 곡식을 내어준 것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최흥원은 친척들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감사했다. 이 친척들은 집안의 종손이라 하여 최흥원의 집을 신경 써준 것이리라. 그러나 최흥원은 이 곡식을 받지 않기로 하였다. 사적인 일에 종계의 곡식을 축내다 보면, 애써 만든 종계의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리라. 최흥원은 이러한 뜻을 친지 어른들에게 간곡히 설명하며 마음만 받겠노라 이야기하였다. 비록 곡식은 물렸지만, 여러모로 마음이 따뜻한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감사가 향약을 시행하도록 명하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35년 3월 5일

1635년 3월 5일, 잠깐 비가 내리다가 종일 흐린 날이 계속되었다. 얼마 전 예조에서 전국에 향약을 시행하는 것을 건의하였다고 한다. 주상의 재가를 얻어 경상도 감사가 주와 현에 반포하여 각 고을마다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인근 고을 현풍에서는 수령 김세렴(金世濂)이 이미 예전부터 시행해왔던 것인데, 여씨향약과 주자향약, 퇴계 선생이 정한 향약을 아울러서 향약의 약법을 만들었고, 그 내용 중에는 율곡 이이의 향약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향교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옛 규례를 취하고, 거기에다가 『소학』의 훈계를 추가하여 이름을 학규(學規)라고 지었다. 이 학규는 향교 제생들에게 시행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명이 내려오자 감사가 현풍의 향약과 향규를 가지고 경상도 고을 모두에 반포하였다. 예안 현감인 남연(南碝)은 평소 향약을 매우 싫어하였는데, 지금은 나라에서 시행하는 것이니 막거나 무너뜨릴 수가 없게 되었다.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었다. 예안 고을 내의 간악한 무리들 모두 향약을 불편하게 여겨 온갖 방법으로 소란을 피워댔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나라에서 법으로 권면하는 것을. 이 간악한 자들이 그들 뜻을 펼 수 없게 되었으니, 더더욱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김령은 아무쪼록 향약이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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