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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小滿 무렵

麥將熟而未熟 (맥장숙이미숙)
가득 찼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비어 있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차 있는 때, 소만은 그런 시기이다.

『동국세시기』


소만은 이십사절기 중에서 입하와 망종 사이, 양력 5월 21일쯤이다. 봄은 서서히 물러가고, 초여름으로 접어든다. 곳간 곡식은 바닥을 보이고 보릿고개를 견디는 밤이면 소쩍새가 운다. ‘소쩍, 소쩍’ 울면 흉년이 들고, ‘소쩍꿍, 소쩍꿍’ 울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포곡조(布穀鳥)인 뻐꾸기도 운다. 졸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고 아침부터 밤까지 수시로 울어댄다.




자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


아이는 자연이 키운다. 산에 들에 마른 잎이 스러지고 연초록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내 어릴 적 이 무렵, 하굣길에 아이들은 산으로 우르르 올라갔다. 풀숲에서 갓 올라온 삐삐[띠풀]를 뽑아 촉촉한 솜털을 꺼내 먹었다. 소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긴 후 속살을 얇게 벗겨 씹었다. 송구[松肌]였다. 이웃에 살았던 친구 형님은 송구죽이 물렸단다. 송구로 죽을 끓이면 팥죽과 색이 비슷해서 “어매[어머니], 팥죽 좀 그만 끼리소[끓이다].”라고 했단다.

봇도랑 옆 산비탈에는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 불그레한 땅찔레도 성큼 올라왔다. 한 손으로 치마를 오불쳐 들고 봇도랑 건너가서 찔레를 꺾었다. 가시 돋은 껍질을 벗겨내고 연한 줄기를 분질러 살캉거리는 봄을 음미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용케도 자연에서 군것질거리를 찾았다.


청보리밭 (출처: 필자 제공)


학교에서 집으로 갈 때는 보리밭을 가로질렀다. 길 가장자리까지 밀려 나온 청보리밭을 개구쟁이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보리밭 이랑으로 들어가 이삭에 생긴 깜부기를 뽑아 장난을 쳤다. 아이들 입술은 거무튀튀하게 물들었고, 그 입술을 보며 우리는 서로 웃었다. 여물어가는 풋보리를 손바닥에 비벼 수염과 껍질을 후후 불어내고 먹었다.

산골짜기 밀밭이 누릇해지면, 동네 언니 오빠들 따라가서 밀서리를 했다. 남의 밭 농작물을 슬쩍 서리해도 어른은 애교로 봐주었다. 나뭇가지 모아서 모닥불 피우고 몰래 벤 밀 이삭을 한 줌씩 들고 불에 그을렸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저 지켜보며 군침만 흘리다가 얻어먹는 맛이라니. 손바닥도 입 주변도 깜상이 되었지만, 씹을수록 구수하고 졸깃했다.

소만 즈음에는 들판마다 풋것이 자라났다. 할머니는 논두렁에서 씀바귀, 고들빼기, 벼룩나물을 캤다. “밥 씹는 게 모래처럼 까끌하다.”는 어른들도 쌉싸름한 봄나물을 드시면 잃었던 입맛이 돌아왔다. 나는 손바닥만 한 벼룩나물(나락 나물)에 생 된장이나 멸치젓 얹어 싸 먹는 쌈밥을 즐겼다. 나른해진 봄날, 입안 가득 퍼지는 풋내음에 어른도 아이도 생기가 돌았다.

쑥이나 빼기를 뜯어 밀가루에 묻혀 찌는 쑥버무리나 빼기 털털이도 별미였다. 쑥 뜯을 때도 밭두렁을 돌아다니며 여럿이 함께 뜯었다. 지천으로 널린 쑥을 틈틈이 뜯어 모았다가 방앗간에 가서 제대로 된 쑥떡을 만들었다. 쑥절편과 콩가루 묻힌 인절미를 주로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쉽게 상하지 않는 쑥떡은 요긴한 간식이었다. 그런 추억이 있기에 지금도 해마다 쑥을 뜯는다.


감꽃 사진 (출처: 농촌진흥청)


오월 하순이면 감꽃도 피었다. 옛집에는 안채와 사랑채 뒤란에 돌아가며 커다란 감나무가 여러 그루였다. 아침에 눈 뜨면 감나무 아래 떨어진 감꽃이 눈부셨다. 감꽃은 조그마한 왕관 같고, 배시시 웃는 소녀 같았다.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 팔찌를 만들며 놀았다. 감나무가 없는 집 아이들은 박 바가지 들고 감꽃을 주우러 다녔다. 배고픈 아이들은 감꽃을 생으로 먹고, 어른들은 말려서 떡도 만들었다.




뒤뜰은 비상식품 저장고


우리는 평소에도 일꾼들까지 식구가 열여섯이었다. 못자리나 모내기, 과수원 일에는 마을 사람이 품앗이했다. 갖가지 나물은 기본이고, 고추장 양념한 북어구이가 반찬으로 으뜸이었다. 엄마는 큰 광주리에 들밥이나 새참을 머리에 이고 가고, 나는 가끔 막걸리 주전자 들고 따라나섰다. 모내기 음식 중에 밀가루를 쪄서 만든 장떡은 지금도 그립다.

봄비 내리는 날에는 커다란 백솥에 김치 국밥을 끓였다. 멸치 육수에 식은 밥과 밀가루 반죽을 얇게 뜯어 넣었다. 굵은 국수를 넣어 양을 늘리기도 했다. 재료가 모자라면 엄마는 뒤란으로 나갔다. 뒤뜰에 묻은 김치와 축대 사이에 자라는 부추도 한 줌 뜯어 듬성듬성 썰어 넣었다. 뜨끈한 김치 국밥 한 그릇이면 속이 풀렸다.




안동의 보릿고개, 맥현


지난가을 거둔 곡식은 서서히 줄어들고, 햇보리가 여물기까지는 아직 이른 때였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남의 집에서 일해주고 밥을 먹거나 풀뿌리로 주린 배를 채웠다. 누군가는 별미로 먹었던 쑥버무리나 수제비도 형편에 따라서는 마지못해 먹어야 하는 음식이었다.

안동에는 보릿고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할 때였다. 안동시 북후면 오산리에 있는 고개를 넘다가 점심때가 되어 한 끼니 부탁했다. 그해 흉년으로 곡식이 부족해 밭에 있는 풋보리를 잘라 만든 떡 보리밥을 올렸더니 왕이 “아, 이곳이 바로 보릿고개로군.” 하여 맥현麥峴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비싼 이자 내고 먹었던 장리쌀


1970년대 계모임의 연말정산 자료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계모임은 두레이자 친목을 도모했다. 상포계, 문중계, 남매계 등 다양한 계를 했다. 곗돈을 현금이 아닌 쌀로 모았다. 보릿고개에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은 계에서 모은 쌀을 빌려서 먹고 추수하면 이자를 얹어서 갚았다. 이른바 장리쌀이다. 쌀 한 말 빌리면 한 말 너되, 많으면 한 말 닷 되까지 갚았다. 우리 집에는 쌀을 꾸러 온 사람이 대청 아래 봉당까지 줄 서서 기다렸다. 쌀자루를 받아 들고 돌아서는 어깨 위에는 안도와 고마움, 그리고 언젠가 갚아야 한다는 부담이 함께 얹혀 있었다.

들판에는 가을에 심은 보리와 밀이 차오르지만, 곳간은 아직 허전했다. 그래도 소만에는 희망을 품고 밭농사 논농사를 준비했다. 지금도 고향을 지키는 어른들은 “예전에 우리 마을에서는 소만에 못자리 · 삼(대마)갈이 · 밍(목화)갈이를 했다.”라고 일러준다.

한 해 농사는 씨앗에 달렸다. 소만에서 망종 전에는 모든 씨앗을 땅에 묻어야 했다. 처마 밑에 걸어둔 옥수수, 가지, 고방 깊숙이 갈무리해 둔 씨앗들을 챙겼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씨앗만은 남겨두는 것이 농부 마음이다. 그래서 씨앗을 신주단지 모시듯 대들보 위에 보관했다.


못자리 (출처: 필자 제공)


못자리는 일 년 논농사 시작이다. 묵은 삼잎에 인분을 퍼부어 못자리 논 거름으로 썼다. 너삼이나 뻐꾹채를 작두에 썰어서 넣기도 했다. 논물을 대고 소를 몰아 써레질했다. 흙덩이가 곱게 부서질 때까지 여러 차례 반복했다. 갈퀴로 지난해 벼 뿌리는 긁어내었다. 모판은 수평이 잘 맞아야 하므로 고무래로 흙을 평평하고 보드랍게 만들었다. 모판이 완성되면 물을 빼고 하루나 이틀가량 땅을 굳힌 다음에 볍씨를 뿌렸다.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판도 없이 줄을 당겨놓고 흙에다가 볍씨를 뿌렸다. 볍씨도 미리 소금물에 소독하여 촉이 난 것을 사용했다.

모판에 뿌린 볍씨에서 잎이 올라오면 논물을 조절하며 아기 다루듯이 돌보았다. 모판에서 자란 모가 어른 손가락 크기로 자라면 모내기를 시작한다. 못자리하고 옮겨 심는 모내기까지는 40일~50일 정도 걸린다. 쌀 한 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면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 맞다.

농사는 더불어 지어야 효율이 좋다. 못자리나 삼 심고 목화 심을 때도 서너 명씩 이웃이나 친척들이 모여서 함께 일했다. 밭을 갈거나 써레질할 때도 단련된 소는 말을 잘 듣지만, 일에 서툰 소는 사람이 고삐 잡고 앞에서 끌어주어야 한다. 젊은 사람이 주로 쟁기나 써레를 잡고, 나이 든 사람이 고삐를 잡거나 따라가며 씨앗을 뿌렸다.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논, 돌아가며 품앗이했다. 품앗이는 농촌 공동체에서 일손을 주고받으며 갚는 아름다운 풍속이다.

바람이 지나간다. 구운 밀 내음이 묻어날지 들숨을 쉬어본다. 덜 여문 보리와 밀이 한꺼번에 몸을 기울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삭들이 서로 스치며 낮은 소리를 낸다. 차오르고 있는 소리다. 어디선가 환청이 들린다.

“소쩍꿍, 소쩍꿍 ~~~”




집필자 소개

서미숙
서미숙
수필가, 여행작가
수필집 『남의 눈에 꽃이 되게』
e-book 『남의 눈에 꽃이 되게』
기행수필집 『종점 기행』
“보리타작 하는 계절”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902년 5월 29일 ~ 1902년 6월 2일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음력 5월 말은 보리타작을 시행하는 계절이다. 보리타작은 모내기가 끝날 무렵 시작되어 장맛비가 오기 전에 타작을 마쳐야 한다. 이우석의 집에서도 타작을 담당할 사람 3명을 고용하여 타작을 했다.

보리를 수확하게 되면 보릿단을 묶어서 당일이나 다음날로 되도록 빨리 보리타작을 해야 한다. 보리가 많지 않을 때에는 집 마당에서 집안 식구끼리 타작을 해도 괜찮지만, 양이 일정 정도 이상 많을 때에는 고용인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우석의 집도 그런 경우였다. 집 마당에서 보리 타작을 하기에는 보리 양이 많았기 때문에 보리를 벤 밭에 임시로 마당을 만들어 타작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 일꾼들은 묶어둔 보릿단을 돌에 내리쳐서 보리 낟알을 털어야 했다. 새끼손가락 정도의 굵기로 된 밧줄로 보릿단을 감아 묶은 이 보릿단을 어깨 너머로 들어올려 내리치는 것이다. 이렇게 묶인 보릿단을 한 바퀴 돌려가면서 낟알을 털어낸 다음, 보릿단을 풀어 바닥에 널어 놓고 도리깨로 두들겨서 보릿단 속에 묻힌 보리 이삭까지 모조리 털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도리깨질을 하면서 타작하는 일인데, 너무나 고된 작업이기 때문에 ‘옹헤야’ 같은 노동요가 보리타작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보리타작을 하노라면 보릿단이 얼굴을 찌르기도 하는 데다 한창 날씨가 더울 때 이루어지는 작업이어서 고되기 이루 말할 데 없다.

“양봉을 시도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8년 5월 7일

1598년 5월 7일, 오희문은 올해 양봉을 해 보기로 하였다. 강원도에서는 벌이 많기도 하였고, 식구들에게 새로운 먹거리도 마련할 겸, 처음으로 양봉을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얼마전 지인에게 몇 개의 벌통을 받았는데, 가져올 때 잘못하여 벌들이 대부분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어제는 신수함에게서 벌통을 받았는데, 이 벌통의 새끼벌들을 오희문의 벌통으로 옮길 셈이었다. 신수함의 벌통에 연기를 쏘이자 새끼벌들이 나왔다. 이후 벌통을 동쪽 울타리 밖의 배나무에 매달고 종 수이로 하여금 벌들을 벌통으로 받으려 하였는데, 이 벌들이 도로 흩어져서는 뒷산 한마장이나 되는 숲 나무 밑에 모였다. 그리하여 간신히 이 벌들을 통에 담았다가 희철의 방 밖에다가 앉혀두었다. 거의 벌들을 날려 버릴 뻔하다가 도로 잡았으니 기쁜 일이었다. 종 수이는 처음 해보는 양봉이라 벌을 치는 법도 잘 모르고, 미끄러운 그릇에 벌들을 담으려 했는데 그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들어보니 미끄러운 그릇에 받게 되면 얼마 안가 벌들이 다 도망한다고 한다.

“관청에서 모내기를 ‘정(井)’자로 하도록 지시하다”

남붕, 해주일록(海洲日錄),
1926년 5월 8일 ~ 1926년 5월 11일

1926년 5월 11일 이날은 남붕도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는데, 먼저 아침 일찍 옥금(玉今)으로 가서 소작인과 일꾼들에게 논 5두락에 모내기를 시작하게 했다. 그런데 봇물이 오지 않아 일손을 멈추고 나머지 일을 뒤로 미루었다. 봉후(峰後), 유전(田畓), 강단(江端)의 논 7두락에도 모내기를 하였는데, 일꾼 20여 명을 썼다.

이번 모내기에 예전과 달리 이렇게 많은 일꾼을 쓰게 된 것은 모두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해서였다. 엊그제 마을 사람들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온 후로 예전 방식으로 모내기를 하자 면사무소에서 사람이 나와 아직 모내기하지 않은 집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반드시 ‘정’자로 모내기를 해야 한다고 성화를 하고 다녔다. 남붕 또한 면사무소 사람의 방문을 받고 마지못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결국,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하는 바람에 한 줄씩 모를 심었으므로 일꾼은 전보다 더 들었고, 앞으로 곡식 소출도 이익이 없고 감소될 것이 분명하니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모내기를 어렵게 하는 가뭄”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897년 5월 9일 ~ 1897년 6월 11일

요즘은 모내기철이다. 이우석(李愚錫)은 최근 여러 논에서 모내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위네 집에서도 월초에 모내기를 한다고 소식을 들었는데 이우석은 몸이 아파서 가지 못한 적이 있다. 모내기를 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지만 평창에는 저수지가 그렇게 많지 않아 비가 충분히 내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방도가 없다. 그런데 걱정스럽게도 요새는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고, 잇따라 맑은 날씨만 계속되고 있다.

5월 22일은 하지였는데, 가뭄 든 논이 많아 근처 논에서 태반이나 모내기하지 못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내기하는 시점에 물이 부족해서 모내기에 실패하면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게 된다. 이우석은 올해 농사가 매우 걱정스러웠다. 지금 시점까지 이 정도로 모내기하지 못한 상황이어서는 곤란하다. 30일이 되어서 들린 소식인즉, 횡성에 있는 갑천 같은 곳에서는 예년과 같이 모내기가 시작됐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태반이나 모내기를 시작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장마 후 들판에 남은 곡식들을 살피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65년 5월 3일 ~ 1765년 5월 16일

노상추의 집안에서 경작하고 있는 논밭은 낙동강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가장 높은 소출을 내는 논은 포(浦) 인근의 밭이었다. 낙동강이 실어온 퇴적물이 좋은 영양분이 되어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비가 많이 내려 낙동강이 범람하면 논밭에 심어놓은 곡식이 모두 쓸려 내려갔다. 여름이 되자 올해도 여지없이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났다.

비가 많이 내리기 전에 노상추의 집안에서는 보리타작을 미리 해두었다. 홍수가 나면 보리마저 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제때 수확해서 양곡을 저장해 둬야 했다. 이번 하짓날에 타작한 보리는 이전에 미리 거둬 둔 것이었고, 아직 밭에는 채 수확하지 않은 보리들이 있었다. 노상추는 내리는 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장대비가 그치자마자 밭으로 나가 보았다. 다행히 들에 보리가 남아 있었다.

남은 보리를 갈무리하자 또다시 며칠 동안 굵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이번에야말로 강물이 넘쳐 포 인근의 논밭이 잠기게 될 것 같았다. 보리를 거둬들인 후 포의 논밭에 남겨놓은 것은 밀뿐이었다. 과연 포 인근의 논밭은 모두 잠겨버렸다. 하지만 밀은 기특하게도 물에 둥둥 뜬 채 떠내려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덕분에 밀도 보리와 마찬가지로 거둬들여 타작할 수 있었다. 장마철은 매일같이 하늘을 보며 일희일비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머니 생신에 친지들이 곡식을 보내어 오다”

최흥원, 역중일기(曆中日記),
1746년 12월 14일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인근의 친족들도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종지 마을과 지묘 마을에 사는 친지들이 모두 찾아와서 어머니께 축수를 올렸다. 그리곤 곡식을 수십 섬이나 최흥원의 집으로 보내어 온 것이 아닌가. 까닭을 들어보니 얼마 전 최흥원의 집 창고에서 불이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안사람들끼리 운영하는 종계에서 곡식을 내어준 것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최흥원은 친척들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감사했다. 이 친척들은 집안의 종손이라 하여 최흥원의 집을 신경 써준 것이리라. 그러나 최흥원은 이 곡식을 받지 않기로 하였다. 사적인 일에 종계의 곡식을 축내다 보면, 애써 만든 종계의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리라. 최흥원은 이러한 뜻을 친지 어른들에게 간곡히 설명하며 마음만 받겠노라 이야기하였다. 비록 곡식은 물렸지만, 여러모로 마음이 따뜻한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감사가 향약을 시행하도록 명하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35년 3월 5일

1635년 3월 5일, 잠깐 비가 내리다가 종일 흐린 날이 계속되었다. 얼마 전 예조에서 전국에 향약을 시행하는 것을 건의하였다고 한다. 주상의 재가를 얻어 경상도 감사가 주와 현에 반포하여 각 고을마다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인근 고을 현풍에서는 수령 김세렴(金世濂)이 이미 예전부터 시행해왔던 것인데, 여씨향약과 주자향약, 퇴계 선생이 정한 향약을 아울러서 향약의 약법을 만들었고, 그 내용 중에는 율곡 이이의 향약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향교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옛 규례를 취하고, 거기에다가 『소학』의 훈계를 추가하여 이름을 학규(學規)라고 지었다. 이 학규는 향교 제생들에게 시행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명이 내려오자 감사가 현풍의 향약과 향규를 가지고 경상도 고을 모두에 반포하였다. 예안 현감인 남연(南碝)은 평소 향약을 매우 싫어하였는데, 지금은 나라에서 시행하는 것이니 막거나 무너뜨릴 수가 없게 되었다.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었다. 예안 고을 내의 간악한 무리들 모두 향약을 불편하게 여겨 온갖 방법으로 소란을 피워댔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나라에서 법으로 권면하는 것을. 이 간악한 자들이 그들 뜻을 펼 수 없게 되었으니, 더더욱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김령은 아무쪼록 향약이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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