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선인의 이야기, 오늘과 만나다

나, 그리고 우리

조선 최초의 협률사(協律舍)는 1895년 자수성가한 사업가 정치국(丁致國)이 인천 경동에 지은 협률사라고 알려져 있다. 1902년, 서울 정동에서 문을 연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앞선다. 이름은 같지만 인천의 협률사는 공연장소를 의미하고, 서울 정동의 협률사는 공연단체를 의미한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대관 공연이 목적이냐, 연희자를 확보한 공연단체의 하우스 공연장이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협률(協律)”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같다. ‘음악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뜻으로 “공연”을 뜻한다. 고종의 재위 40주년 경축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당시 한성부 야주현에 있었던 황실 건물 봉상사 일부를 터 설립된 극장은 2층 500석 규모의 상설극장이었다. 경축 의식을 위해 전국의 판소리 명창·가기·무동 등 무려 170여 명을 모아 전속 단체를 만들었고, 대표는 명창 김창환이 맡았다. 이들은 관급을 받으면서 연희를 연습했지만 그해 여름, 콜레라가 돌고 영친왕이 병이 드는 등의 이유로 성대한 행사는 취소되고, 간략하게 지나가 버리자, 대중적인 연희장으로 쓰임새를 바꾸었다.


협률사 전속 창극단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하여 개관작은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라는 제목으로 1902년 12월 4일에 초연을 올렸다. 공연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아도 그해 12월에는 공연이 이어졌으며 저녁 6시에 시작해 10시에 공연을 마쳤다고 하니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연희자도 많으니 레파토리도 많았을 터였다.

〈소춘대유희〉는 서양식 극장에서 올려진 최초의 전통 연희물이자 한국 근대 공연예술의 기점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공연은 관객들이 돈을 내고 표를 사기만 하면 신분이나 재산 유무와 상관없이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높은 담벼락 안의 꼭꼭 숨겨져 있던 예술과 민중들이 좋아했던 예술이 한 자리에서 올라왔다. 그야말로 임금이 보던 춤이 어떤 것인지 호기심으로라도 표를 사고 싶게 만들었고, 유명한 연희자가 한자리에 모인다니 그 또한 안 볼 수 없었다. 프로그램의 중심은 당연히 ‘유희’였는데 어떤 것을 ‘유희’로 여겼는지도 중요하다. 당시 궁중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관기들의 궁중무가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연됐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유행했던 다양한 볼거리들도 함께 올라왔다. 기녀들의 춤과 판소리, 명창들의 판소리, 재인(才人)들의 곡예 등 전통연희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공연이었으니 한국판 보드빌(Vaudeville)이라고 할만했다. 1903년 2월부터는 배우들의 공연이 중지되고 기생들의 예능만 공연됐다.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점이라 새로운 형태의 오락거리는 물론이거니와 기존의 오락거리도 좀 더 잘 보고 싶다는 욕구가 터져 나올 즈음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이 시기에 상업적인 오락거리가 급속히 발전하던 시기였다. 협률사는 이후 부침을 겪다가 현재는 새문안교회가 들어서 극장으로서의 수명은 다했으나, 그 뜻을 이어받은 극장이 어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같은 정동에 위치한 정동극장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객석 규모도 얼추 비슷하다.

조선 후기 협률사는 궁중과 민간을 아우르며 음악과 연희를 담당하던 집단이었기에 그 존재 자체가 곧 협력과 조율의 상징이기도 했다. 각기 다른 소리와 몸짓, 역할을 가진 이들이 하나의 공연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호흡을 맞추는 과정은, 협력의 기술이자 상생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끝없는 갈등의 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협률사의 개념은 정동극장 연희극 ‘광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협력과 상생은 유사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협력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역할을 분담하고 힘을 결집하는 과정이라면, 상생은 그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유지한 채 관계를 지속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가깝다. 협력이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면, 상생은 관계의 지속성과 윤리적 차원을 포함한다. 정동극장 연희극 〈광대〉는 바로 이 두 개념이 어떻게 결합되고 확장되는지를 공연의 형식과 내용 전반에 걸쳐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전통연희극 〈광대〉포스터 (출처: 국립정동극장)


이야기의 배경은 관객이 앉아 있는 정동극장이고 무대는 정동극장의 백스테이지다. 1902년에 초연을 올렸던 바로 그 소춘대유희의 2026년 공연 리허설을 하던 도중 정전이 되면서 리허설은 순간 뒤죽박죽이 되며 시간을 백 년도 더 앞으로 돌려 초연의 광대들이 공간과 시간을 가르며 밀려든다. 정전이라는 설정이 얼핏 너무 클리셰같지만 실제로 1903년 여름에 협률사에서는 영화를 상영하다 정전이 되었던 일로 문을 닫는 불상사를 겪었다. 하지만 협률사의 재개관을 바라는 열화와 같은 요구에 다시 문을 열었고 그 이후로도 건수만 잡으면 문을 닫는 일이 자주 일어났었다. 협률사의 연희자들이, 아니 백 년 전 연희자들이 정전사태에 경기를 일으킬 만도 한 일이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며 무대는 과거였다 현대였다 귀신이었다 사람이었다 하며 나이랑 상관없이 백 년은 더 선배인 과거의 광대들이 오늘의 광대들에게 한 수 가르치기도 하면서 과거의 갈등과 현재의 갈등이 가볍게 이어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연희 그 자체다. 등장인물인 순백과 아이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면서 극의 메시지인 '광대란 한 시대를 즐겁게 살다가는 진정한 예술가'라는 사실을 들려준다.

이 작품에서 협력은 가장 먼저 ‘몸’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무대 위 광대들의 움직임은 개별적인 기교의 나열이 아니라, 서로의 호흡과 리듬에 의존하는 집단적 수행이다. 장단에 맞춰 이어지는 군무, 빠른 전환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동선, 정확하게 맞물리는 타이밍은 각 배우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광대〉는 이러한 협력을 단순한 기능적 결합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 위에 상생이라는 보다 넓은 관계의 차원을 구축한다. 광대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각자의 개성과 리듬, 표현 방식을 유지한다. 중요한 것은 이 차이가 제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서로 다른 움직임과 성격이 충돌하고 교차하면서 공연의 에너지가 생성된다. 상생은 여기서 동일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관계 속에서 지속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광대〉 공연 (출처: 국립정동극장)


공연 초반, 광대들이 던지는 추임새와 호응의 요청은 관객을 공연의 외부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얼씨구”, “좋다”와 같이 평소에는 사용할 일이 없는 추임새를 어느 순간부터 관객들은 함께하기 위해 추임새의 순간을 기다리고 입 밖으로 내어보기에 이른다. 최근 극장에서 관객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오로지 정면만 바라보는 소위 ‘시체관극’이 섭섭한 관객들이라면 이 공연에서는 결코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정동극장 연희극 〈광대〉는 협률사가 상징하던 ‘함께 맞추는 율’이 더 이상 과거의 개념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삶의 방식으로 확장됨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런 저런 해석이나 해설도 필요없이 이 공연은 들썩들썩 그저 즐거울 수 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소임을 다한 셈이다. 정동극장치고 공연기간도 꽤 길어서 5월 30일까지 공연된다.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등을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등을 썼습니다. 〈뮤지컬 스토리〉, 〈밤새도록 뮤지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보리타작 하는 계절”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902년 5월 29일 ~ 1902년 6월 2일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음력 5월 말은 보리타작을 시행하는 계절이다. 보리타작은 모내기가 끝날 무렵 시작되어 장맛비가 오기 전에 타작을 마쳐야 한다. 이우석의 집에서도 타작을 담당할 사람 3명을 고용하여 타작을 했다.

보리를 수확하게 되면 보릿단을 묶어서 당일이나 다음날로 되도록 빨리 보리타작을 해야 한다. 보리가 많지 않을 때에는 집 마당에서 집안 식구끼리 타작을 해도 괜찮지만, 양이 일정 정도 이상 많을 때에는 고용인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우석의 집도 그런 경우였다. 집 마당에서 보리 타작을 하기에는 보리 양이 많았기 때문에 보리를 벤 밭에 임시로 마당을 만들어 타작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 일꾼들은 묶어둔 보릿단을 돌에 내리쳐서 보리 낟알을 털어야 했다. 새끼손가락 정도의 굵기로 된 밧줄로 보릿단을 감아 묶은 이 보릿단을 어깨 너머로 들어올려 내리치는 것이다. 이렇게 묶인 보릿단을 한 바퀴 돌려가면서 낟알을 털어낸 다음, 보릿단을 풀어 바닥에 널어 놓고 도리깨로 두들겨서 보릿단 속에 묻힌 보리 이삭까지 모조리 털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도리깨질을 하면서 타작하는 일인데, 너무나 고된 작업이기 때문에 ‘옹헤야’ 같은 노동요가 보리타작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보리타작을 하노라면 보릿단이 얼굴을 찌르기도 하는 데다 한창 날씨가 더울 때 이루어지는 작업이어서 고되기 이루 말할 데 없다.

“양봉을 시도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8년 5월 7일

1598년 5월 7일, 오희문은 올해 양봉을 해 보기로 하였다. 강원도에서는 벌이 많기도 하였고, 식구들에게 새로운 먹거리도 마련할 겸, 처음으로 양봉을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얼마전 지인에게 몇 개의 벌통을 받았는데, 가져올 때 잘못하여 벌들이 대부분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어제는 신수함에게서 벌통을 받았는데, 이 벌통의 새끼벌들을 오희문의 벌통으로 옮길 셈이었다. 신수함의 벌통에 연기를 쏘이자 새끼벌들이 나왔다. 이후 벌통을 동쪽 울타리 밖의 배나무에 매달고 종 수이로 하여금 벌들을 벌통으로 받으려 하였는데, 이 벌들이 도로 흩어져서는 뒷산 한마장이나 되는 숲 나무 밑에 모였다. 그리하여 간신히 이 벌들을 통에 담았다가 희철의 방 밖에다가 앉혀두었다. 거의 벌들을 날려 버릴 뻔하다가 도로 잡았으니 기쁜 일이었다. 종 수이는 처음 해보는 양봉이라 벌을 치는 법도 잘 모르고, 미끄러운 그릇에 벌들을 담으려 했는데 그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들어보니 미끄러운 그릇에 받게 되면 얼마 안가 벌들이 다 도망한다고 한다.

“관청에서 모내기를 ‘정(井)’자로 하도록 지시하다”

남붕, 해주일록(海洲日錄),
1926년 5월 8일 ~ 1926년 5월 11일

1926년 5월 11일 이날은 남붕도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는데, 먼저 아침 일찍 옥금(玉今)으로 가서 소작인과 일꾼들에게 논 5두락에 모내기를 시작하게 했다. 그런데 봇물이 오지 않아 일손을 멈추고 나머지 일을 뒤로 미루었다. 봉후(峰後), 유전(田畓), 강단(江端)의 논 7두락에도 모내기를 하였는데, 일꾼 20여 명을 썼다.

이번 모내기에 예전과 달리 이렇게 많은 일꾼을 쓰게 된 것은 모두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해서였다. 엊그제 마을 사람들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온 후로 예전 방식으로 모내기를 하자 면사무소에서 사람이 나와 아직 모내기하지 않은 집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반드시 ‘정’자로 모내기를 해야 한다고 성화를 하고 다녔다. 남붕 또한 면사무소 사람의 방문을 받고 마지못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결국,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하는 바람에 한 줄씩 모를 심었으므로 일꾼은 전보다 더 들었고, 앞으로 곡식 소출도 이익이 없고 감소될 것이 분명하니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모내기를 어렵게 하는 가뭄”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897년 5월 9일 ~ 1897년 6월 11일

요즘은 모내기철이다. 이우석(李愚錫)은 최근 여러 논에서 모내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위네 집에서도 월초에 모내기를 한다고 소식을 들었는데 이우석은 몸이 아파서 가지 못한 적이 있다. 모내기를 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지만 평창에는 저수지가 그렇게 많지 않아 비가 충분히 내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방도가 없다. 그런데 걱정스럽게도 요새는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고, 잇따라 맑은 날씨만 계속되고 있다.

5월 22일은 하지였는데, 가뭄 든 논이 많아 근처 논에서 태반이나 모내기하지 못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내기하는 시점에 물이 부족해서 모내기에 실패하면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게 된다. 이우석은 올해 농사가 매우 걱정스러웠다. 지금 시점까지 이 정도로 모내기하지 못한 상황이어서는 곤란하다. 30일이 되어서 들린 소식인즉, 횡성에 있는 갑천 같은 곳에서는 예년과 같이 모내기가 시작됐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태반이나 모내기를 시작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장마 후 들판에 남은 곡식들을 살피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65년 5월 3일 ~ 1765년 5월 16일

노상추의 집안에서 경작하고 있는 논밭은 낙동강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가장 높은 소출을 내는 논은 포(浦) 인근의 밭이었다. 낙동강이 실어온 퇴적물이 좋은 영양분이 되어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비가 많이 내려 낙동강이 범람하면 논밭에 심어놓은 곡식이 모두 쓸려 내려갔다. 여름이 되자 올해도 여지없이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났다.

비가 많이 내리기 전에 노상추의 집안에서는 보리타작을 미리 해두었다. 홍수가 나면 보리마저 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제때 수확해서 양곡을 저장해 둬야 했다. 이번 하짓날에 타작한 보리는 이전에 미리 거둬 둔 것이었고, 아직 밭에는 채 수확하지 않은 보리들이 있었다. 노상추는 내리는 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장대비가 그치자마자 밭으로 나가 보았다. 다행히 들에 보리가 남아 있었다.

남은 보리를 갈무리하자 또다시 며칠 동안 굵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이번에야말로 강물이 넘쳐 포 인근의 논밭이 잠기게 될 것 같았다. 보리를 거둬들인 후 포의 논밭에 남겨놓은 것은 밀뿐이었다. 과연 포 인근의 논밭은 모두 잠겨버렸다. 하지만 밀은 기특하게도 물에 둥둥 뜬 채 떠내려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덕분에 밀도 보리와 마찬가지로 거둬들여 타작할 수 있었다. 장마철은 매일같이 하늘을 보며 일희일비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머니 생신에 친지들이 곡식을 보내어 오다”

최흥원, 역중일기(曆中日記),
1746년 12월 14일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인근의 친족들도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종지 마을과 지묘 마을에 사는 친지들이 모두 찾아와서 어머니께 축수를 올렸다. 그리곤 곡식을 수십 섬이나 최흥원의 집으로 보내어 온 것이 아닌가. 까닭을 들어보니 얼마 전 최흥원의 집 창고에서 불이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안사람들끼리 운영하는 종계에서 곡식을 내어준 것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최흥원은 친척들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감사했다. 이 친척들은 집안의 종손이라 하여 최흥원의 집을 신경 써준 것이리라. 그러나 최흥원은 이 곡식을 받지 않기로 하였다. 사적인 일에 종계의 곡식을 축내다 보면, 애써 만든 종계의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리라. 최흥원은 이러한 뜻을 친지 어른들에게 간곡히 설명하며 마음만 받겠노라 이야기하였다. 비록 곡식은 물렸지만, 여러모로 마음이 따뜻한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감사가 향약을 시행하도록 명하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35년 3월 5일

1635년 3월 5일, 잠깐 비가 내리다가 종일 흐린 날이 계속되었다. 얼마 전 예조에서 전국에 향약을 시행하는 것을 건의하였다고 한다. 주상의 재가를 얻어 경상도 감사가 주와 현에 반포하여 각 고을마다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인근 고을 현풍에서는 수령 김세렴(金世濂)이 이미 예전부터 시행해왔던 것인데, 여씨향약과 주자향약, 퇴계 선생이 정한 향약을 아울러서 향약의 약법을 만들었고, 그 내용 중에는 율곡 이이의 향약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향교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옛 규례를 취하고, 거기에다가 『소학』의 훈계를 추가하여 이름을 학규(學規)라고 지었다. 이 학규는 향교 제생들에게 시행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명이 내려오자 감사가 현풍의 향약과 향규를 가지고 경상도 고을 모두에 반포하였다. 예안 현감인 남연(南碝)은 평소 향약을 매우 싫어하였는데, 지금은 나라에서 시행하는 것이니 막거나 무너뜨릴 수가 없게 되었다.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었다. 예안 고을 내의 간악한 무리들 모두 향약을 불편하게 여겨 온갖 방법으로 소란을 피워댔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나라에서 법으로 권면하는 것을. 이 간악한 자들이 그들 뜻을 펼 수 없게 되었으니, 더더욱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김령은 아무쪼록 향약이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