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허촌에 있는 망허산 뒤쪽에는 폐사지가 하나 있다. 산 뒤는 북향이라서 마을이 없는데 절이 어쩌다 그런 곳에 세워졌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이 안 찾을 곳에 절을 세워놓았으니 망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는 말들을 하곤 했다.
그래도 과거에는 꽤나 번창했던 절이 아닐까 싶었다. 다른 건물은 다 무너졌지만 대웅전은 허물어지긴 했어도 아직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안에 있어야 할 본존불은 사라졌지만.
대웅전 앞에는 삼층 석탑이 조금 허물어졌지만 그래도 대충 모양새는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종각이 있는데, 종도 아직 걸려 있었다. 종에 금이 가서 쳐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었는데, 그나마 칠 수도 없었다. 종을 치는 당목(撞木)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 집어가 절굿공이를 만들었거나, 땔감으로 사용한 모양이었다.
대웅전은 지붕이 반쯤 무너져 비가 오면 줄줄 새곤 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반은 비를 가릴 만큼은 되어 누군가가 비 안 맞는 곳으로 제단을 옮겨 놓았다. 때로 길을 잃은 나그네가 하룻밤을 피해가기도 했다.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는데, 백이와 목금은 그 무리에 끼진 않았다. 절까지 가려면 아무튼 망허산 능선을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만을 맞이한 오늘, 두 소녀는 손을 잡고 능선을 넘어 폐사지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백이는 한쪽 팔에 바구니를 끼고 있었는데, 안에는 불돌이가 들어있었다. 기온도 따뜻해져서 불돌이도 부쩍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기에 데리고 나온 것이다. 불돌이는 불을 다스리는 양수지조(陽燧之鳥)라는 신조였다.
“목금아, 불돌이가 자꾸 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아. 옆에서 걸릴까?”
“여긴 사람도 안 다니는 곳이니 그렇게 하지, 뭐.”
목금도 찬성해서 백이는 불돌이를 바구니에서 꺼내 내려놓았다. 불돌이는 오랜만의 바깥 공기에 흥분한 듯이 날개를 퍼덕이며 두 소녀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가만, 그럼 나도 초록이를 풀어놓을까?”
백이는 초록색 팔찌를 탁 건드렸다. 팔찌가 스르르 풀리더니 초록색 뱀으로 바뀌었다. 초록이는 백이의 삼시충이 변해서 된 영물이다. 초록이와 불돌이가 장난을 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불돌이가 점점 몸을 공중에 띄웠다.
“어? 불돌이가 이제 날 수 있나 봐.”
“아직은 잘 안되는 것 같은데? 하지만 곧 날겠다. 멋지네.”
목금과 두 소녀가 떠드는 사이에 어느덧 폐사지에 도착했다. 백이가 폐사지를 깡충거리며 뛰어다니면서 말했다.
“아주 오래된 절인가 봐. 봐봐, 여기 종도 있어.”
아주 큰 종은 아니었지만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종이었다. 천판(종 윗부분)에는 용이 앞발을 드러내고 종을 꽉 움켜쥐고 있고 용 옆에는 퉁소처럼 보이는 음관이 솟아올라 있었다.
“와, 용이다!”
포뢰 (AI 생성 이미지)
백이가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목금이 설명하듯이 말했다.
“맞아. 저 용을 포뢰(蒲牢)라고 부르는데, 원래 바닷가에 사는 용이래. 용에게 아홉 자식이 있는데 그중 셋째라고 해.”
“하필 종 위에 용을 조각한 이유가 뭐야?”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한대. 그래서 고래가 치받으면 큰 소리로 운다는 거야. 종을 치는 당목을 고래 모양으로 만들어서 포뢰가 울게 하는 거래. 그러면 종소리가 더 크게 울릴 수 있다는 거지.”
불돌이와 초록이도 이야기가 재밌었는지 옆에 와서 목금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럼 빨리 가자. 이러다 돌아올 때는 날 저물겠다.”
백이와 목금은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소녀는 오늘 산 너머에 있는 정 진사네 논을 살피러 가는 중이었다. 본래 돌쇠가 할 일이었지만 하필 고뿔이 심하게 걸려서 도저히 움직이질 못하는 통에 백이가 가보기로 한 것이다. 정 진사는 시회에 참석해야 하는 통에 몸을 뺄 수가 없었다. 마님과 삼월이는 시회에 보낼 음식 장만이 바빴다. 아무튼 주인집에서 살피지 않으면 농사가 어찌 될지 모른다고 누군가는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백이가 가겠다고 한 것이다. 이제 다 큰 처녀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보내겠냐 싶었는데, 목금과 함께 가면 된다고 해서 어렵게 허락을 했다.
도착해보니 모내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올해는 때를 마쳐 비도 잘 내려 물 걱정이 없었고 모판의 모도 싱싱하게 잘 자라 있어서 문제가 없었다. 주인집에서 아가씨가 왔다 하여 간식거리도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보릿고개라 얻어먹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보리 농사도 올해는 풍년이라 걱정 없이 넘겼다고들 좋아했다.
오말 신초(오후 3시경)에는 떠나야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갈 수 있어 일어나려 했는데, 새참 시간이니 국수 한 그릇은 먹고 가라고 붙잡는 통에다가 노래 잘한다는 함평댁이 내지르는 소리가 그럴싸해서 그걸 다 듣다가 그만 좀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한참 산을 오르는 중이었는데 까치가 다급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깍깍깍깍!”
“무슨 일이 있나?”
백이와 목금이 살피러 가보자 까치 두 마리가 급하게 날개짓을 하며 큰 나무 주위를 날고 있었다. 백이가 나무 위를 살피며 말했다.
“왜 저러는 거야?”
“아, 둥지로 구렁이가 올라가고 있어!”
커다란 구렁이가 까치 둥지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둥지에는 까치 새끼들이 공포에 질려 입을 딱딱 벌리고 있었다.
“새끼들을 먹어치우려나 봐, 어떡해!”
목금은 바로 돌을 들어서 있는 힘껏 구렁이를 향해 던졌다. 구렁이 머리통에 정확하게 맞아서 구렁이가 툭 떨어졌다. 구렁이는 하필 뾰족하게 부러져있던 나무 그루터기에 몸이 푹 꽂히는 바람에 발버둥을 치다가 금방 죽고 말았다.
“죽었어. 어서 가자.”
죽은 구렁이가 더 무서워서 두 소녀는 까치들은 살펴보지도 않고 바로 뛰어갔다. 한참을 뛰어서 두근거리는 심장이 좀 진정이 되었는데, 더 큰 일이 생겼다.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을 쪽 망허산이면 눈 감고도 길을 찾을 텐데, 능선 너머로는 잘 오지 않아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길을 더듬더듬 찾다가 그만 해까지 저물고 말았다. 북쪽인 터라 해도 일찍 저물었다.
“어, 어쩌지? 나 너무 무서워.”
불돌이가 빛을 내서 그나마 발밑은 볼 수 있었는데, 오늘따라 구름이 많아 달빛도 없었다.
“아, 길 찾았어. 저기로 가면 폐사지가 있을 거야. 오늘 밤은 저기서 자야겠다.”
“괜찮을까?”
“구름이 좀 끼긴 했어도 비는 안 올 것 같으니까 괜찮을 거야.”
정 진사는 늦어지면 자고 오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 안 들어간다고 사람들을 보내 찾으러 오지 않을 것이어서, 허물어진 대웅전에서 하루 신세를 지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백이가 길게 한숨을 쉬며 목금을 따라갔다.
“그래도 너랑 자니까 좋다.”
산속의 밤은 춥다. 이불도 없어서 백이와 목금은 딱 붙어서 서로의 체온으로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초록이가 땔감을 모아오고 불돌이가 불을 붙여서 조금이나마 온도를 높일 수 있었다.
목금은 자다가 답답해서 눈을 뜨고 말았다. 백이가 휘감아서 그런 줄 알고
“백이야, 좀...”
이라고 말하는데 백이의 몸이 너무 차가웠다.
“이, 이게 뭐야!”
목금이 화들짝 놀랐다. 구렁이가 목금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살펴보니 얼마나 큰 구렁이인지 백이도 그렇게 휘감았는데, 백이는 벌써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이, 이, 풀어줘!”
그러자 구렁이가 목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오늘 너희가 죽인 구렁이의 아내다. 너희가 내 남편을 죽였으니 너희도 죽이겠다.”
“뭐? 구렁이를 죽인 건 나야. 그러니까 백이는 풀어줘.”
“어림도 없지. 너희 둘은 한 패거리니까 풀어줄 수 없다.”
“백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애꿎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 그러다 천벌 받는다!”
그 말에 구렁이가 움찔했다.
“천벌을 받는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네. 좋다. 그럼 대신 너희가 살 수 있는 조건을 걸어주겠다. 절의 종이 해 뜨기 전에 세 번 울린다면 너희를 풀어주겠다.”
“절의 종이 저절로 울리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조건이야! 그냥 죽이려고 하는 거지!”
“흥, 조건은 걸었다. 해 뜰 때까지 생명이 연장된 거나 감사해라.”
“종소리가 세 번 울리는 게 중요한 거야?”
“그렇다. 나는 원래 수련을 하고 있던 이무기다. 종소리를 들으며 도를 닦고 있었는데 9997번 들었을 때 전쟁이 나서 이 절이 망해버리고 말았다. 세 번만 더 들으면 승천할 수 있었는데 종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오백 년은 지난 것 같구나.”
구렁이가 말하는 동안 목금은 초록이와 불돌이가 어딨는지 열심히 찾았다. 불돌이는 구렁이가 들어오면서 한 대 때려 기절시킨 상태였다. 초록이는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목금이라 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초록이는 불돌이가 기절했을 때 불돌이를 끌고 밖으로 나와 구렁이의 말을 듣고 있었다. 구렁이가 너무 커서 초록이가 상대할 수는 없었다. 불돌이를 깨웠는데, 불돌이도 이무기라는 걸 알고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초록이가 말했다.
“종을 쳐서 소리를 내야 해. 종 있는데로 가자.”
(AI 생성 이미지)
둘은 종 있는 곳에 왔지만 종이 높은데 걸려 있어서 닿지가 않았다. 불돌이가 있는 힘껏 날개짓을 해서 종에 머리를 박았는데, 깨진 종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까치 부모도 날아와 종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머리에서 피만 나왔지 소리는 나지 않았다. 까치들이 분하다는 듯이 깍깍 울었다. 불돌이와 초록이도 어쩔 줄 몰라하며 엉엉 울고 말았다. 이렇게 모두 울고 있는데 갑자기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구나, 무슨 일이냐?”
포뢰였다! 종판 위에 자리 잡은 포뢰가 입을 연 것이다.
“이 종은 더 이상 울 수가 없다. 헛된 짓들 하지 말고 목숨을 아껴라.”
초록이가 사정을 했다.
“세 번만, 세 번만 종소리를 내주세요. 안 그러면 저희 주인님이 구렁이 이무기한테 죽어요.”
포뢰가 깊은 고뇌에 찬 소리를 냈다.
“내가 종소리를 울릴 수는 있지만 그러면 이 종이 완전히 깨질 것이다. 그러면 나도 죽을 것이고...”
초록이는 더 사정을 할 수 없었다. 주인님 살리자고 포뢰에게 죽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불돌아, 어쩔 수 없다. 죽든 살든 구렁이하고 싸우자.”
“그래! 이제 다른 방법이 없어. 주인님하고 같이 죽는 수밖에...”
불돌이가 울면서 말했다. 그러자 포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다려라. 나 하나가 죽어서 넷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부처의 길이 아니겠느냐? 종은 본래 부처의 대자대비를 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내가 종소리를 내겠다.”
초록이와 불돌이, 까치까지 입을 딱 벌렸다. 포뢰에게 무한한 감사의 정을 느꼈다.
덩~ 덩~ 덩~
종소리가 세 번 울려 퍼졌다. 구렁이는 깜짝 놀랐다가 곧 백이와 목금을 풀어주었다.
“아, 종소리가 울리다니 기적이구나. 고맙다, 얘들아. 덕분에 승천할 수 있게 되었다.”
구렁이는 희미하게 변하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울리더니 비가 쏟아져내렸다. 구렁이가 용이 되어 승천한 것이다.
“어, 어떻게 된 일이지?”
목금도 이 일만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백이는 맨바닥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듯하다는 말을 했다. 구렁이가 다녀간 줄도 모르는 걸 보고 백이는 뒷목을 잡았다.
“어, 밤에 비가 내렸나봐. 비 때문인가? 종이 완전히 깨져버렸어.”
백이가 바닥에 떨어진 종을 보고 말했다. 포뢰가 두 사람을 구한 것은 영영 둘 다 몰랐다. 돌아가는 길에 불돌이가 파닥파닥 날아오르며 말했다.
“아, 내가 좀 더 세게 받으면 종소리가 났을 텐데. 짜증나. 은혜 갚은 불돌이가 될 수 있었잖아!”
“걱정 마. 그래도 은혜 갚을 뻔한 불돌이는 됐잖아.”
“야, 그게 뭐야! 너 튀겨버린다!”
초록이가 쌩하고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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