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여유와 근심, 그리고 견뎌냄의 기록

처서의 서늘함과 함께 농민들에게 찾아온 여유로움


처서는 24절기 가운데 14번째 절기로 태양이 황경 150도에 달한 시점으로 양력 8월 23일, 음력으로 7월 15일 무렵이다. 한자의 멈출 ‘처(處)’와 더울 ‘서(暑)’라는 뜻 그대로 이때가 되면 타는 듯하던 더위가 그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록 한낮의 여름 햇살은 여전히 기세가 남아 있지만 아침과 저녁으로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 시기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아들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칠월령(七月令)은 이 시기 농가의 풍경과 해야 할 일들을 이렇게 전한다.


『농가월령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마음 놓지 마소, 아직도 멀고 멀다. 꼴 거두고, 김매기, 벼 포기에 피 고르기, 낫 갈아서 논밭 두렁의 풀 깎기, 선산에 벌초하기, 거름을 많이 베어 더미 지어 모아 놓기, 자채논에 새보기와 오조밭에 허수아비, 밭가에 길도 닦고 덮여 쌓인 모래도 쳐올리고, 기름지고 연한 밭에 거름하고 깊게 갈아서 김장할 무 배추 남보다 먼저 심어 놓고, (중략) 채소 과일 흔할 때에 뒷날을 준비하여 호박 얇게 썰어 말리고, 오이와 가지 짜게 절여 겨울에 먹어보소. 귀한 음식이 아니 될까

위의 대목처럼 여름의 끝자락인 이 시기에도 수확과 가을 채비를 위해 농민들이 손을 놓지 못하고 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많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봄부터 여름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농사의 큰 고비가 지나고 농사철 가운데 비교적 한가하게 숨을 고를 수 있는 때이기도 했다. 장마철이 끝나고 파란 하늘이 고개를 들면, 사람들은 젖었던 옷이나 책을 꺼내어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 또는 그늘에서 말리는 음건(陰乾)을 행했다. 또한 김매기를 끝낸 후인 음력 칠석(7월 7일)에서 백중(7월 15일) 무렵에는 고된 노동을 잠시 내려놓고 술과 음식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는 잔치인 ‘호미씻이[洗鋤宴]’이라는 농경 세시풍속이 펼쳐졌다. 이 잔치는 지역에 따라 강원도의 ‘질먹기’, 경상도의 ‘풋굿’, 전라도의 ‘술멕이’, 충청도의 ‘두레먹기’, 경기도의 ‘호미걸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농민들끼리 온기를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그래서 예부터 7월은 논일이 끝난 조금 여유 있는 시기로 ‘어정칠월’이라 했고, 본격적인 수확을 앞둔 8월의 한가로움을 ‘건들팔월’이라 부르며 농담 섞어 표현하기도 했다. 농민들은 비로소 잠시나마 고단함을 잊고 한가한 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농담에는 경고가 숨어 있었다. 칠팔월이라하여 어정거리며 건들거리지 말고 앞일을 엄중히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마지막 수확의 결실을 맺을 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흉년에 대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자연의 무서움


농민들이 누리던 잠시의 여유와 한가로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농민들의 마음에는 작물이 마지막까지 제대로 결실을 맺을 지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있었다. 처서를 지나 8월, 논밭 작물들의 수확을 앞둔 시기의 날씨는 한 해 농사의 마지막 풍흉을 결정하는 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처서에 내리는 비를 처서비[處暑雨]라고 부르며 경계했다. “처서에 비가 오면 천 가지 곡식이 해롭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에 곡식이 준다.”, “처서에 비가 오면 천 석을 던다.”, “처서에 비가 오면 흉년 든다.”는 말은 모두 이와 관련된 속담이다. 잘 자라던 벼 이삭도 8월 수확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강한 햇살을 받아야만 비로소 제대로 성숙할 수 있는데, 이때 궂은비가 내리고 일조량이 부족하면 벼는 제대로 여물지 못하고 썩어들어가기 일쑤였다.

이처럼 입추 후 벼가 여물어야 할 시기에 장마처럼 비가 계속되면, 국가에서는 중앙의 국문(國門)과 지방의 성문(城門)에서 해당 방위의 산천신에게 날이 개기를 기원하는 기청제(祈晴祭), 즉 영제(禜祭)를 올렸다. 가뭄과 달리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비로 인한 홍수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재난이 발생한 초기에 단일하고 신속한 의례로 하늘에 기원했고, 대부분은 3차례를 넘기지 않고 시행되었다. 매년 여름 6월 이후 찾아오는 장마철과 태풍, 그리고 수확을 앞둔 처서까지 이어지는 수재(水災)는 농업 생산 과정에서 늘 농민들의 근심거리였다. “열흘 가뭄은 참아도 열흘 장마는 견딜 수 없다.” 또는 “삼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는 옛말은 수재(水災)가 얼마나 단기간에 큰 피해를 주었던 재해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수재가 짧은 기간 큰 피해를 주었던 재해였다면, 매년 조선시대 농민들의 삶을 장기간에 걸쳐 괴롭힌 또 다른 거대한 재해는 반대로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으로 인해 발생하는 한재(旱災)였다. 조선 후기 이앙법이 보급되면서 수전(水田) 농법이 확대되었고, 그로 인해 관개 수리시설은 벼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로 인해 흉년은 주로 봄부터 시작되는 극심한 물 부족, 즉 가뭄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 되었다. 다만 홍수로 인한 수재와는 달리 한재는 서서히 진행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길어질수록 일정한 단계를 거치며 위기가 심화되었다. 하지만 그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 덕분에 국가와 농민들은 각 단계마다 무엇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느 정도 예견하고 대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초간일기』에 기록된 기청제에 관한 기록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농사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는 국가의 재해 대비


처서 무렵 수확기의 위기에서 시계를 조금 앞으로 돌려, 한 해 농사의 시작인 봄부터 재해에 대응해 온 조선왕조의 전반적인 국가 시스템을 들여다보자. 조선왕조의 재난 대응은 농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이루어진 감농(監農)의 과정에서 출발한다. 감농이란 농사가 시작된 이후 작물의 생육 상황과 강수량에 대한 지속적인 보고 체계였다. 한 해의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3월부터 군현의 수령은 각 면(面)에서 올라온 보고 내용을 취합하여 대략 10일에 한 번씩 감영의 감사에게 보고했다. 감사는 이를 하나로 정리해서 ‘농형장계(農形狀啓)’라는 이름으로 중앙에 올려보냈다.


정조대 황해도의 농사 형편과 형정을 살필 수 있는 1795년 『벽영수록』의 농형장계 (출처: 필자 제공)


1796년 5월 5일 황해도 해주감영에서 올린 장계를 보면 매우 상세한 기록을 엿볼 수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각과 그친 시간은 물론, 비가 가늘게 내렸는지[霏], 세차게 퍼부었는지[灑, 霔]를 기록하고, 강수량은 비에 젖은 흙이 쟁기와 호미의 날로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로 측정했다. 그리고 논밭에 파종한 각종 농작물의 성장 상태와 재해로 인한 피해 여부 등을 낱낱이 보고하고 있다.

이번 달 초 2일 (중략) 이어지는 각 읍에서 보고한 바인즉, 해주, 강령, 옹진, 문화, 안악, 신천, 백천, 서흥 등 8읍은 이번 달 초 2일 미시 혹은 유시에 비가 시작되어 혹은 가늘게 내리고[霏], 혹은 세차게 내리기도[灑]하여 초 3일 축시 혹은 인시에 이내 그쳤으며, 얻은 바가 넉넉히 호미 깊이 1서(鋤) 가량이오며, 연안, 재령, 황주, 봉산, 장련 등 5읍은 초 2일 미시 혹은 신시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혹은 흩뿌리고[灑], 혹은 세차게 퍼부어[霔] 초 3일 인시 혹은 묘시에 이르러 이내 그쳐 얻은 바가 쟁기 깊이 1려(犁) 쯤이기에 첩정하오며, 나머지 읍은 아직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 고루 내렸는지 여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이미 비를 얻고 난 뒤 날이 개어 일기가 조화로워 춘모소맥(春牟小麥)은 잘 발수(發穗)하고 서속(黍粟)·당직(䅯稷)도 균일하게 잘 자라고 있어 (하략)

- 1796년 5월 초 5일 황해도 해주감영 감사의 보고(『碧營隨錄』2책 「農形狀啓」 가운데)


이러한 계속되는 보고의 과정에서 농력(農曆)에 맞는 적절한 비가 내려주지 않으면 가장 먼저 기우제가 시행되었다. 기우제는 가뭄이라는 재해가 다가왔고 이에 대비가 필요함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가 되었다.


조선시대 기우제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1814년 전라도 임실현의 사례를 보자.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면서 4월 21일 예조에서 기우제를 시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이에 따라 5월 초 1일부터 27일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사직단(社稷壇), 천상당(天上堂), 성수산(聖壽山) 등지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된다. 기우제 이후 어느 정도의 비가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양맥(兩麥)이 모두 흉년을 면하기 어려워 민세(民勢)의 위급함이 봄 사이보다 배로 이미 큰 흉년으로 판명 났다”라는 현감의 보고에 의하면, 기우제 이후에도 상황이 전혀 호전되지 못했다. 이에 현감은 6월 초 2일 임실현 18면의 이앙을 하지 못한 논에 두 차례 걸쳐 670여 석의 메밀 종자는 지급하였다. 메밀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대파작물이었다. 비교적 가뭄에 강하고 다른 농작물보다 성장 기간이 짧아서 7월 중순에 파종하더라도 수확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굶주린 노약자와 농민들이 속출하였다. 이에 7월에 향임(鄕任)과 이임(吏任)을 동원하여 마을을 돌면서 3,000여 명에게 미(米) 28석 가량을 분급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마을 내의 부민들에게 곡식을 내게 하여 인근의 굶주린 사람들을 나누어 구제하는 2차례의 구급(救急) 방식으로 진휼이 이루어졌다. 7월에 시행된 두 차례의 구급은 흉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수확을 앞둔 농민들의 위급함을 일시적이나마 해소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이듬해에 대규모로 시행되는 공식적인 진휼은 아니었으나 당해 연도의 감농의 단계에서 이미 지방정부에서도 흉년에 대비하는 과정이 이루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한편, 흉년이 예상되는 시기에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여러 가지 간접 예비 조치들이 줄줄이 시행되었다. 전국적으로 흉년이 든 1809년의 기록을 보면, 6월 16일에는 마침 식년(式年)을 맞아 치러질 예정이었던 과거시험의 1차 초시(初試)를 연기했고, 7월 15일에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호적(戶籍)·군안(軍案)의 마감 시한을 미뤄주었다. 이어 9월 초 4일에는 전라감사의 장계로 지방의 유생들을 위한 시험인 공도회(公都會)와 무예 시험인 도시(都試) 등 각종 시험을 내년 가을로 연기했고, 상번군병(上番軍兵)의 중앙 상번도 일시 정지시켰다. 이는 모두 흉년이 예상되는 시기에 농민들이 세금과 부역 외에 행정·군역 의무로 인해 피로가 극에 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세심한 조치였다. 재정적 측면에서는 흉년에 재정을 아끼는 절용(節用)의 방안들도 시행되었다. 6월 22일 전라감사는 가뭄으로 흉년을 당한 상황에 곡식을 술로 빚어 낭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예하 군현에 엄중한 금주령(禁酒令)을 내렸다. 이는 정약용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도 흉년 구제 대책의 상례였다고 지적할 만큼 조선시대 내내 가뭄 대책의 단골 메뉴였다. 나아가 9월 15일에는 국왕의 특교를 통해 왕실 스스로 국가재정을 아끼는 모범을 보이고자 왕실에 올리는 진상(進上)인 어공(御供)·물선(物膳)을 정지하거나 대폭 삭감했다. 이는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흉년의 상황에서 백성들과 어려움을 함께한다는 국왕의 덕의(德意)를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 흉년이 가시화되는 시기에는 현장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 즉 수령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차후 진행될 진휼 행정의 관리와 감독 강화를 목적으로 이를 담당할 만한 능력있는 지방관의 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0월 10일 전라감사의 요청에 따라 재해의 심각성과 읍의 규모, 수령의 행정 능력을 고려하여 익산과 고산, 구례와 곡성의 현감을 서로 맞바꾸고, 재해의 피해가 가장 큰 것으로 판정된 보성군수를 교체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다양한 예비 조치들이 가뭄의 심화에 맞추어 단계별로 시행되는 동시에, 9월 22일이 되면 전라감사는 각 군현의 농사 형편에 따라 가장 심한 우심(尤甚)과 그다음 등급인 지차(之次), 그리고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초실(稍實)의 등급으로 나누어 판정한 재실분등(災實分等) 장계를 중앙에 올렸다. 중앙정부는 여기에 근거하여 그해에 백성이 국가에 바쳐야 할 각종 부세(賦稅) 등의 부담을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감면하거나 연기해 주는 견감책(蠲減策)을 시행했다. 재해 지역 전세(田稅)를 완전 면제해 주는 급재(給災)로부터 재해 정도에 따라 전세 및 대동세의 부분 감면, 각종 신역과 군포, 환곡의 부분 감면이나 징수를 연기해 주는 조치까지 농민들의 파산을 막기 위한 여러 조치가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의 재해에 대한 대비는 이처럼 한 해 농사의 시작과 함께 가뭄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절기와 농력(農曆)에 맞춰 기우제를 신호로 6월부터 다양한 간접 예비 대책들이 선행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수확을 마친 10월 이후 본격적인 진휼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면서 진휼곡의 확보, 기민(饑民)의 조사 등이 이어지고, 12월 그리고 이듬해에 본격적인 진휼이 시행될 수 있었다.




고난을 견뎌낸 기록, 조선 시대 재난 대응이 지닌 역사적 의미


조선왕조가 농업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기울인 일련의 노력들은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대응은 특정한 해에 우연히 일어난 임기응변식 대책이 아니었다. 매년 반복되는 자연재해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백성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농업을 국가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이라는 체제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적인 통치 과제였다.

봄철 농사의 시작과 함께 이어진 감농의 과정 속에서 기우제를 시작으로 상황에 따른 대파작물 파종, 행정·군역 부담의 경감, 금주령과 왕실의 재정 절약, 수령의 적재적소 재배치, 그리고 최종적인 세금 감면과 진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조선의 재난 대응은 단편적인 구호 활동이 아니라, 농사의 시작부터 수확기 이후까지 이어지는 체계적이고 연속적인 국가 시스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 해의 농사의 시작부터 온갖 고비를 넘겨온 농민들이 처서의 선선한 바람 속에서 결실을 기대하며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조선왕조의 재해에 대한 대응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재난과 위기의 양상은 과거와 다르지만, 재난에 대응하고 피해를 복구해 온 사회적 궤적과 맥락은 같다. 자연의 거대한 위력 앞에서 개인이 겪는 고통을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국가와 사회가 함께 위기를 관리해 온 선조들의 기록은 오늘날 재난 대응과 회복의 과정을 돌아보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집필자 소개

원재영
원재영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同) 대학원에서 『朝鮮後期 荒政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연세대 미래캠퍼스 역사문화학 전공 강사로 재직중이며, 조선후기 사회제도, 지방행정제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는 「17~18세기 재해행정과 御史의 역할」, 「18세기 재해행정과 수령의 역할」 등이 있다.
“조선 남부의 수해를 구제하고자 구제금을 모아 보내기로 하다”

심상석, 녹동일기(鹿洞日記),
1933년 5월 13일(윤)

1933년 윤5월 13일 아침 훈시 시간에 송기식 선생은 황희 정승과 김종서의 일화를 들려주셨고, 오전에는 법제와 경제로 시험을 쳤는데, 문제는 ‘후견이란 무슨 뜻인가?’와 ‘상속의 두 큰 주요 유언이란 무엇인가?’였다.

오후에는 날이 더워서 모든 선생들과 학생들이 냇가를 찾아 목욕을 하고 돌아왔다. 심상석도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좋아 한시 한 수를 지었다.

녹동서원에 돌아온 후 심상석은 전날 저녁 신문에서 본 조선 남부의 수재 소식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수재민이 46,000명에 이르고, 손해액은 일천만 원이라는 소식을 듣고 심히 놀라고 슬퍼하였다. 명교학원의 선생님 이하 수강생 모두가 합동으로 구제금 5원을 내어 장차 신문사에 부치기로 했다.

“사람은 잡초를 뽑고 바람은 지붕을 뽑다”

김주현, 정강일기(定岡日記),
1940년 6월 5일 ~ 1940년 6월 20일

장마철이라 매일같이 비가 내린다. 덕분에 잡초의 기세가 등등하다. 사람만 괴로울 뿐이다. 김주현(金冑現)은 잠깐 비가 그친 사이에 뜰에 쭈그려 앉아 잡풀을 뽑았다. “뜰의 잡풀을 뽑지 않는 자는 반드시 어리석고 게으른 자일 것이다.” 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꽃 계단 위의 잡풀까지 뽑아낸 뒤 두엄에 버려두고 손을 탁탁 털어냈다.

집안의 잡풀도 돌아서면 또 자라나지만 진짜로 골치 아픈 것은 논과 밭의 잡초다. 농사꾼들은 다들 비를 맞아가며 밭에 나가 김을 매고 또 맸다. 김주현도 목화밭과 콩밭의 김 매는 상황을 시시때때로 확인했지만 비 때문에 작업이 어렵고 계속 지체되었다. 하지만 안 뽑으면 원래 심어놓은 작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잡초가 자라니 그만둘 수도 없다.

하늘이 보기에는 초가집 지붕도 잡초같이 보이나 보다. 심한 폭풍이 몰려와서는 김주현 집의 사랑채 지붕 이엉을 뽑아 버렸다. 심한 비까지 내려서 온 집안사람이 혼비백산이었다. 다른 집들도 비슷한 꼴을 당한 듯하다. 김주현은 사랑채에 내 놓은 책이 비를 맞을까봐 열심히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다음날 비가 조금 잦아들자마자 지붕을 곧바로 수선했다. 요란한 장마철이다.

“지속되는 가뭄과 왕실 기우제”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901년 6월 6일

계절은 어느덧 한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침부터 강렬한 태양 빛이 내려 쪼이던 초복 아침, 이우석은 최근 며칠간 보지 못했던 신문을 모아 요새 왕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기우제 기사였다. 최근 하지가 이미 지났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지속되고 있으니, 기우제 날짜를 기다릴 것 없이 빨리 기우제를 시행하자는 장례원(掌禮院)의 건의가 있었다고 한다. 황제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삼각산·목멱산·한강에다 첫 번째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비가 내리지 않았기에 두 번째 기우제는 날짜를 점치지 말고 지내되 헌관 이하 집사(執事)를 각별히 선택하여 임명하게 하셨다고 한다.

“연이은 흉년에 대신들의 녹봉도 깎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815년 5월 17일 ~ 1815년 5월 19일

논바닥이 갈라지고 모판의 모는 다 말라비틀어졌다. 올해 농사도 망했다. 들으니 조정에서 관문이 내려와 선산 부사가 어제부터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지만 과연 하늘이 기도를 들어줄 것인가. 간혹 늦게 이앙해도 큰 풍년이 드는 경우가 있다지만 그런 요행을 바랄 수 있을지. 노상추는 하늘을 바라보며 주름진 얼굴을 더 구겼다.

청운동으로 나가 이앙할 논을 바라보니 이곳 역시 물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앙은 할 수 있을 정도여서 두 마지기는 이앙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하지 못했으니 조만간 비가 내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조정에서는 백관에게 나누어주는 급료가 부족하여 대신의 녹봉도 2섬에 그쳤다고 한다. 나랏일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지 않았는가. 조정이 이럴진대, 강호에서 근심하는 것이 어찌 묘당보다 덜하겠는가.

“춘궁기에 관에서 나락과 콩을 꾸다”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년 4월 12일 ~ 1616년 4월 14일

1616년 4월 12일, 날이 밝을 무렵 김택룡의 노비인 애남과 춘금이 환곡(還穀)을 나르러 구고로 갔는데, 정오가 안 되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틀 뒤 4월 14일, 참봉 김효선(金孝先)과 진사 박회무가 택룡을 방문하였다. 두 사람은 안동부사 박동선(朴東善)이 환곡을 나누어 주려고 내성(奈城)의 현 창고[縣倉]에 오기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간다고 하였다. 택룡도 안동부사에게 편지를 쓰면서 환곡을 요청하여 산장(山庄)의 아이들을 구원해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애남에게 명하여 그 곳으로 소를 끌고 가서 운송해오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애남이 환곡으로 내어 받은 나락과 콩을 가지고 왔다. 애남이 와서 전하길, ‘안동부사께서 재산을 거쳐 돌아가시는 길에 한곡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싶으시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택룡의 편지에 따로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다.

“천지간에 돌림병을 피할 곳이 없게 되다”

최흥원, 역중일기(曆中日記),
1756년 4월 2일

1756년 4월 2일. 최흥원이 머무는 곳에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함께 머무는 사촌 통숙이 병이 들었는데, 증후가 틀림없는 돌림병이었다. 최흥원은 사촌 아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한편으로는 최흥원 자신은 다시 거처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였으나 도저히 다른 곳으로 옮길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환후는 그나마 심해지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계시는 집의 처소도 불안하였는데, 그 집의 주인이 돌림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림병을 피해서 어머니는 다른 집에, 최흥원도 임시 처소에 나와 있는데 병을 피해간 곳마다 환자가 하나씩 누워 있는 셈이니 과연 병을 피하는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유행병 반진의 치료법”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07년 5월 1일

1707년 5월 1일. 요사이 유행성 반진이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시작되어 서울까지 번졌다. 이 반진은 두창이랑 비슷하지만, 치료법은 매우 달랐다. 어떤 사람은 ‘두창은 서늘하게 해주고, 반진은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올해 유행하는 반진은 이전과는 또 달라서, 의원들이 치료법을 몰라 헤매다가 대부분 치료 시기를 놓치고는 뒤늦게 약성이 강한 약으로 병을 다스리게 되곤 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