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스토리웹툰 독(獨)선생전




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조선 남부의 수해를 구제하고자 구제금을 모아 보내기로 하다”

심상석, 녹동일기(鹿洞日記),
1933년 5월 13일(윤)

1933년 윤5월 13일 아침 훈시 시간에 송기식 선생은 황희 정승과 김종서의 일화를 들려주셨고, 오전에는 법제와 경제로 시험을 쳤는데, 문제는 ‘후견이란 무슨 뜻인가?’와 ‘상속의 두 큰 주요 유언이란 무엇인가?’였다.

오후에는 날이 더워서 모든 선생들과 학생들이 냇가를 찾아 목욕을 하고 돌아왔다. 심상석도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좋아 한시 한 수를 지었다.

녹동서원에 돌아온 후 심상석은 전날 저녁 신문에서 본 조선 남부의 수재 소식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수재민이 46,000명에 이르고, 손해액은 일천만 원이라는 소식을 듣고 심히 놀라고 슬퍼하였다. 명교학원의 선생님 이하 수강생 모두가 합동으로 구제금 5원을 내어 장차 신문사에 부치기로 했다.

“사람은 잡초를 뽑고 바람은 지붕을 뽑다”

김주현, 정강일기(定岡日記),
1940년 6월 5일 ~ 1940년 6월 20일

장마철이라 매일같이 비가 내린다. 덕분에 잡초의 기세가 등등하다. 사람만 괴로울 뿐이다. 김주현(金冑現)은 잠깐 비가 그친 사이에 뜰에 쭈그려 앉아 잡풀을 뽑았다. “뜰의 잡풀을 뽑지 않는 자는 반드시 어리석고 게으른 자일 것이다.” 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꽃 계단 위의 잡풀까지 뽑아낸 뒤 두엄에 버려두고 손을 탁탁 털어냈다.

집안의 잡풀도 돌아서면 또 자라나지만 진짜로 골치 아픈 것은 논과 밭의 잡초다. 농사꾼들은 다들 비를 맞아가며 밭에 나가 김을 매고 또 맸다. 김주현도 목화밭과 콩밭의 김 매는 상황을 시시때때로 확인했지만 비 때문에 작업이 어렵고 계속 지체되었다. 하지만 안 뽑으면 원래 심어놓은 작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잡초가 자라니 그만둘 수도 없다.

하늘이 보기에는 초가집 지붕도 잡초같이 보이나 보다. 심한 폭풍이 몰려와서는 김주현 집의 사랑채 지붕 이엉을 뽑아 버렸다. 심한 비까지 내려서 온 집안사람이 혼비백산이었다. 다른 집들도 비슷한 꼴을 당한 듯하다. 김주현은 사랑채에 내 놓은 책이 비를 맞을까봐 열심히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다음날 비가 조금 잦아들자마자 지붕을 곧바로 수선했다. 요란한 장마철이다.

“지속되는 가뭄과 왕실 기우제”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901년 6월 6일

계절은 어느덧 한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침부터 강렬한 태양 빛이 내려 쪼이던 초복 아침, 이우석은 최근 며칠간 보지 못했던 신문을 모아 요새 왕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기우제 기사였다. 최근 하지가 이미 지났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지속되고 있으니, 기우제 날짜를 기다릴 것 없이 빨리 기우제를 시행하자는 장례원(掌禮院)의 건의가 있었다고 한다. 황제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삼각산·목멱산·한강에다 첫 번째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비가 내리지 않았기에 두 번째 기우제는 날짜를 점치지 말고 지내되 헌관 이하 집사(執事)를 각별히 선택하여 임명하게 하셨다고 한다.

“연이은 흉년에 대신들의 녹봉도 깎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815년 5월 17일 ~ 1815년 5월 19일

논바닥이 갈라지고 모판의 모는 다 말라비틀어졌다. 올해 농사도 망했다. 들으니 조정에서 관문이 내려와 선산 부사가 어제부터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지만 과연 하늘이 기도를 들어줄 것인가. 간혹 늦게 이앙해도 큰 풍년이 드는 경우가 있다지만 그런 요행을 바랄 수 있을지. 노상추는 하늘을 바라보며 주름진 얼굴을 더 구겼다.

청운동으로 나가 이앙할 논을 바라보니 이곳 역시 물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앙은 할 수 있을 정도여서 두 마지기는 이앙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하지 못했으니 조만간 비가 내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조정에서는 백관에게 나누어주는 급료가 부족하여 대신의 녹봉도 2섬에 그쳤다고 한다. 나랏일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지 않았는가. 조정이 이럴진대, 강호에서 근심하는 것이 어찌 묘당보다 덜하겠는가.

“춘궁기에 관에서 나락과 콩을 꾸다”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년 4월 12일 ~ 1616년 4월 14일

1616년 4월 12일, 날이 밝을 무렵 김택룡의 노비인 애남과 춘금이 환곡(還穀)을 나르러 구고로 갔는데, 정오가 안 되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틀 뒤 4월 14일, 참봉 김효선(金孝先)과 진사 박회무가 택룡을 방문하였다. 두 사람은 안동부사 박동선(朴東善)이 환곡을 나누어 주려고 내성(奈城)의 현 창고[縣倉]에 오기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간다고 하였다. 택룡도 안동부사에게 편지를 쓰면서 환곡을 요청하여 산장(山庄)의 아이들을 구원해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애남에게 명하여 그 곳으로 소를 끌고 가서 운송해오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애남이 환곡으로 내어 받은 나락과 콩을 가지고 왔다. 애남이 와서 전하길, ‘안동부사께서 재산을 거쳐 돌아가시는 길에 한곡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싶으시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택룡의 편지에 따로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다.

“천지간에 돌림병을 피할 곳이 없게 되다”

최흥원, 역중일기(曆中日記),
1756년 4월 2일

1756년 4월 2일. 최흥원이 머무는 곳에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함께 머무는 사촌 통숙이 병이 들었는데, 증후가 틀림없는 돌림병이었다. 최흥원은 사촌 아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한편으로는 최흥원 자신은 다시 거처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였으나 도저히 다른 곳으로 옮길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환후는 그나마 심해지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계시는 집의 처소도 불안하였는데, 그 집의 주인이 돌림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림병을 피해서 어머니는 다른 집에, 최흥원도 임시 처소에 나와 있는데 병을 피해간 곳마다 환자가 하나씩 누워 있는 셈이니 과연 병을 피하는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유행병 반진의 치료법”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07년 5월 1일

1707년 5월 1일. 요사이 유행성 반진이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시작되어 서울까지 번졌다. 이 반진은 두창이랑 비슷하지만, 치료법은 매우 달랐다. 어떤 사람은 ‘두창은 서늘하게 해주고, 반진은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올해 유행하는 반진은 이전과는 또 달라서, 의원들이 치료법을 몰라 헤매다가 대부분 치료 시기를 놓치고는 뒤늦게 약성이 강한 약으로 병을 다스리게 되곤 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