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일기(8월) - “여름, 피서법”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 싶은 여름. 더위를 피해 어디로든 탈출하고 싶어집니다. 마음처럼 일상을 떠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뜨거운 도심 속 최고의 피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마시는 아이스커피 한 잔이 아닐까 합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이 무더위를 어떻게 보냈을까요? 깊숙한 사찰 선방을 찾아 여름을 즐기기도 하고, 개고기로 보신하며 여름을 견디는가 하면, 찬 계곡 물에 발 담그고 경치를 감상하는 등 더위를 피하는 선비들의 피서법은 다양했습니다. ‘담談’ 6호에서는 2014년도 여름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조선 시대 선비들의 여름나기 방법을 담았습니다.

조선의 여름나기 하나, ‘개장국’

예로부터 여름철 가장 더운 날을 복날이라 하였다. 복날은 초복과 중복, 말복으로 나뉘며 초복에서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린다. 이 기간에는 특별히 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보양식을 장만하여 먹었는데, 중병아리를 잡아 영계백숙을 만들어 먹거나 더위를 먹지 않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팥죽을 쑤어 먹기도 한다. 특히 최고의 보양식으로 꼽히는 개장국은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서는 단연 인기였다. 선비들은 여름이면 개고기를 먹는 모임 ‘가장회(家獐會)’를 만들어 강가나 냇가에 모여 고기를 잡으며 ‘천렵(川獵)’을 즐겼다.

  • 천렵도

    김득신 <천렵도(川獵圖)> 18세기

“ 가장회에 가지 못해 발만 동동 ”

1588년 여름. 조선 팔도 가장 덥기로 소문난 대구도 서서히 달궈지기 시작했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대구 부사 권문해도 업무 보기가 벌써 힘에 부쳤다. 거기에 몇 달 전부터 부어오른 손발의 통증이 심해져 여름을 어떻게 나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러던 어느 날, 초복을 며칠 앞두고 대구 향교 교관 류종개(柳宗介)가 개고기를 삶아 가장회를 베푼다며 권문해를 초대했다. 권문해도 오랜만에 지인들과 뜨끈한 개장국 한 그릇을 먹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그러나 걷기조차 어려울 만큼 퉁퉁 부어버린 발 때문에 초대에 응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원천스토리 권문해 <초간일기>, 1588-05-28 개고기 먹는 모임, 가장회(家獐會)

“ 책을 덮고 개장국 먹으로 가는 선비 ”

1859년 여름. 작렬한 태양 볕에 선비들의 책 읽는 소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서원의 유생도, 사랑채의 선비도 하나둘 책을 덮고 더위 탈출을 감행했다. 밤낮으로 책을 읽고,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던 서찬규도 이 여름은 무척이나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서찬규도 책을 덮고 더위를 피해 벗들과 함께 냇가로 향했다. 이미 냇가에는 50~60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에 그물을 드리우고, 낚시하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서찬규와 친구들은 허해진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개를 잡아 삶기 시작했다. 개장국이 익어가는 동안 배를 띄우고 고기잡이를 즐겼다. 강바람에 더위를 날리고, 잘 익은 개장국으로 든든히 보신 한 서찬규는 개장국의 효능에 감동하며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 천렵도

    유숙의 <천렵도(川獵圖)>

  • 천렵도

    김득신 <풍속 8곡병> 중 <천렵도>

《동의보감》에는 “개고기는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골수를 충족시켜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하고, 따뜻한 기운을 일으켜 기력을 증진 시킨다”고 했다. ‘가장(家獐)’이라 부른 개고기는 장터의 국밥집에서부터 왕실의 연회장에서까지 조선 시대 가장 사랑받는 보양식이었다. 정조가 화성 행차를 하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개고기찜 ‘구증(狗蒸)’을 올리기도 했고,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흑산도에서의 오랜 유배생활을 견디기 위해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특히 정약용은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개장국 끓이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는 편지를 썼는데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 맑은 물로 삶아야 한다”며 그만의 비법을 전한다.
육류를 많이 섭취하지 못했던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단백질이 풍부한 개고기는 기력이 쇠해지기 쉬운 여름철 훌륭한 보양식이자 먹거리였다.

원천스토리 서찬규 <임재일기> 1846-03-09 ~ 1859-06-21 힘든 하인을 격려하고, 동네의 작은 잔치를 열며,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

조선의 여름나기 둘, ‘탁족(濯足)’

조선 시대 여름 나기의 두 번째 비법은 탁족이다. 탁족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대표적인 피서법으로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그며 자연의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다. 발은 온도에 민감해 찬물에 담그면 온몸이 시원해질 뿐 아니라 흐르는 물이 발바닥을 자극해 건강에 좋다고 해서 더욱 성행했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남산과 북한산 계곡에서는 탁족놀이를 많이 했는데, 특히 세검정 일대가 가장 유명한 탁족 장소였다고 한다.

  • 고사탁족도

    이경윤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17세기

  • 고사탁족도

    이경윤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16세기

“ 삼각산 풍광에 발 담구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 ”

1932년 여름. 말복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의 정취가 시작될 무렵 이정구는 삼각산으로 유람을 떠났다. 삼각산 계곡에는 물이 콸콸 흐르며 기암괴석과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냈다. 이정구와 일행은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 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 자리를 잡았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계곡에 발을 담그니 온몸에 짜릿한 시원함이 전해졌다. 이정구는 웃옷도 벗고 돌 위에 걸터앉아 삼각산 풍광과 하나가 되려는 듯 흠뻑 빠져들었다. 함께 한 일행들도 신이 났다. 어떤 이들은 술잔을 물에 띄워서 마시기 내기를 하고, 어떤 이는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았다. 이정구도 국화잎을 따서 술잔 위에 띄웠다. 풍광에 한 번 취하고, 술에 또 한 번 취하니 박수가 절로 나왔다. 더욱이 악공의 거문고 연주가 더해지니 흥을 넘어 감동이 밀려왔다. 거문고의 맑은 줄이 당겨졌다가 튕겨지면 삼각산이 큰 울림으로 되돌려 보내자 일행들은 “저 세 사람은 참으로 나라에서 제일의 악공이다. 오늘 악기 소리가 더없이 맑게 느껴지는 것이 어찌 경치가 뛰어나기 때문이겠는가?”라며 연주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이에 악공이 말하기를 “뛰어난 경치뿐만이 아니고 오늘 신선들 모임에 어울리니 우리도 흥겨운 감정이 솟구쳐 음조가 저절로 높아집니다. 신의 도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고 하였다.
악공의 연주는 더 깊고 화려해지고, 이정구와 일행의 흥도 극에 달했다. 해가 질 무렵 붉은 노을이 계곡을 물들이자 모두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탁족의 전율은 그렇게 늦게까지 이어졌다.

  • 고사탁족도

    강세황 <송도기행첩> 중 <태종대>, 1757년 추정경,

원천스토리 이정구 <유삼각산기>, 1932-09-03 탁족, 거문고, 국화잎을 띄운 술잔, 어지러운 춤 - 한창인 가을에 취하다. 관련스토리 1 서찬규 <임재일기>, 1856-05-25 ~ 1858-04-13 선비들, 신선이 되다. - 계곡 바위에 글을 새기고, 도라지 반찬으로 밥을 먹고 탁족을 하다 관련스토리 2 서찬규 <임재일기>, 1845-07-03 ~ 1847-07-04 합격과 낙방,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탁족과 술로 마음을 달래다

조선의 여름나기 셋, ‘여행 떠나기’

옛 선인(先人)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심신을 단련하고자 여행을 했다. 좋은 계절에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고자 유람을 떠나기도 했고, 무더운 여름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주로 산과 강, 바다를 벗 삼아 대자연을 여행하거나 깊은 암자나 사찰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석사 선방에서 보내는 여름밤”

1615년 여름. 더위는 식을 줄 모르고 열기를 더해가기만 했다. 예안에 살던 김령도 더위에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갔다. 1615년 7월 3일, 김령은 더위를 피해 짧은 여행을 다녀오려고 짐을 꾸렸다. 아침으로 죽을 한 그릇 바삐 먹고, 여행지 영주 부석사(浮石寺)로 갔다. 서둘러 발길을 옮겨 정오가 되기 전에 도착하였다. 먼저 중들에게 밥을 지으라 하고는 천천히 경내를 둘러보며 깊은 산사의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부석사는 676년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사찰로 천 년이 지나도록 단아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에 김령이 감탄하며 하나하나 자세히 관찰하고 일기에 남긴다.

“아미타불을 안치해놓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웅장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양옆으로는 동서 회랑이 연결되어 있는데, 서쪽 회랑 끝으로 세워진 취원루(聚遠楼)는 높고 시원하게 확 트여 있어 한 눈에 백리가 보였다. 첩첩으로 쌓인 여러 산이 흩어져 있는데, 아득한 시선 가운데 오직 학가산만이 동남쪽에 우뚝 솟아있었다. 옛 사람들이 써놓은 이름이 수없이 많은데, 주신재(周愼齋)가 1542년에 이곳에 놀러 와서 벽에 쓴 글씨는 먹 빛깔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었다. 무량수전 남쪽 계단 앞에는 작은 누각이 붙어있고, 그 아래에는 법당이 누각을 등지고 있었다. 그 앞에는 종루가 있고, 종루의 아래에는 놀랍도록 장대한 사천왕상이 호위하고 서 있었다. 동북쪽으로는 숲길이 해를 가리고 조릿대가 온 산에 가득하였다. 조사당(祖師堂)에 이르면 처마 밑에 나무 한 그루가 벽 틈새로 뿌리를 내린 채 사계절 푸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사찰을 창건한 의상대사가 꽂아둔 지팡이에서 가지가 나고 잎이 생겨 수풀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온종일 부석사의 이곳저곳을 살피다 보니 해가 멀리 서쪽 하늘로 사라지고 무량수전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밤이 되자 더 고요해진 사찰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주며, 처마 끝 풍경을 흔들었다. 풍경 소리는 그치질 않고 별빛은 난간에 쏟아지고, 김령은 누운 채 동파(東坡)의 시 ‘반룡사(盤龍寺)’를 읊었다.
1615년 7월 3일의 부석사의 여름밤은 그렇게 잠들었다.

원천스토리 김령 <계암일록>, 1615-07-03 어느 여름날, 고찰 부석사 선방에 별빛이 쏟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