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복도를 청소하던 짙은 남색 옷의 여자가 물기 꽉 짜낸 대걸레를 발끝으로 꼭꼭 누른다. 바닥청소용 대걸레라고 부르기에는 하얗고 깨끗하다. 그녀는 땀이 흐르고 있는 코끝에 걸린 굵은 안경을 고무장갑 낀 손등으로 치켜 올린다.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요. 언니, 관장님이 좀 더 계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기관이 자리 잡고 편안할 만하다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복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유리난간을 닦던 여자가 허리를 펴고 뒤돌아선다. 크지 않은 체구이지만 몸놀림이 빠르고 건강해 보인다. 머릿수건을 풀어 홍조를 띤 얼굴의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쉰다. 둘은 조금 떨어져 있다.
“그러게 말이야. 어수선한 행정문제나 직원들 복지, 노조문제, 예산문제도 다 해결하시고, 게다가 기관 주변 환경이 좋아지니까 관람객이 얼마나 늘었어? 그런데도 정치적인 일은 절대 안 하시고 말이야. 보기 드문 분이야. 난 있지, 관장님이 우리 미화원들 공간을 지상에 마련해 주신 것에 감동받았잖아.”
“맞아요. 우린 새벽부터 나와서 이렇게 건물 안팎 청소하고 쉴 만한 곳이 없었잖우. 기껏 쉰다는 곳이 화장실 아니면 지하 창고였잖아요. 그런데 마음 편하게 우리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자부심까지 생기더라고요.” “그러게 말이야.”
“우리 관장님이 이곳에 부임하기 전까지, 우리는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어요.”
나이든 미화원은 땀을 닦은 머릿수건을 다시 머리 위로 둘러 묶는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 연약하고 볼품없는 기관의 소모품에 불과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 이런 분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손에 든 걸레를 탁탁 털며 언성을 조금 높인다.
“네. 그랬죠. 전요, 관장님이 위아래 직원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는 분일 줄 몰랐어요. 왜 그... 인상은 좀...”
“세상에, 벌써 훤하게 날이 밝아오네. 이 사람아, 입 다물고 얼른 정리하세.”
손걸레를 든 미화원이 다시 돌아서며 말을 끊는다.
그녀들의 꼼꼼하고 빠른 걸레질로 긴 복도는 늘 청결했다. 연구동 1층 로비에서 3층까지가 그녀들이 담당하는 공간이다. 검푸른 창 너머로 전시동이 보인다.
8년 전, 미화원 6명이 연구동과 전시동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나와서 오후 4시까지 12시간을 청소하면서 쉴 공간조차 없었다. 화장실이 있는 연구동과 전시동을 청소하는 여자 미화원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마당이나 주차장을 청소하는 남자 미화원들은 쉴 수 있는 공간조차 없었다. 주차장 구석이나 창고에서 박스를 깔고 쉬어야 했다. 추운 겨울에는 더욱 고생이었고 남자 미화원들 중에 그만두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관장은 직원들을 위한 편의시설 뿐만 아니라 미화원들의 근무환경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물론 처음부터 관장의 행보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행정직원들 중에는 관장의 제안에 반대하며 볼멘소리를 뒤에서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규직원들을 위한 편의시설 확대에 쓰이는 예산도 부족한데 계약직 미화원들의 휴식공간까지 새로 만든다는 것은 예산낭비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일의 가치를 직급과 돈으로 따지지 말라는 관장의 굳센 의지에 곧 설득되고 말았다.
미화원들은 진심으로 현재 일하고 있는 환경에 만족하며 관장을 존경했다. 몸을 쓰는 고달픈 일이지만 마음은 늘 즐거웠다.
넓은 직원식당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한다. 창가의 식탁은 모든 부서 사람들이 서둘러 차지하는 곳이다. 다음으로 벽 쪽의 식탁이 산만하게 채워진다. 식당을 동서로 분리하는 긴 줄은 순식간에 짧아지기도 하고 더디게 줄어들기도 한다. 12시 30분이 되면 창가의 식탁이 비워지고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진다.
배식판을 채우는 소리와 반찬통을 들고 나는 소리, 가끔씩 들리는 숟가락 떨어뜨리는 소리, 젊은 직원들이 선배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배식판을 반납하는 벽 쪽 식탁에는 기획과 직원들이 모여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허 과장이 먼저 일어나며 배식판을 든다.
“우선, 감사패를 만들고 나머지는 전체 직원들의 의견을 받는 것이 좋겠어.”
권 연구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구 연구관을 바라본다.
“네. 알겠습니다. 직원들에게 전체 메일을 돌려보겠습니다.”
식탁에는 권 연구관과 구 연구관 그리고 연구사 3명이 남는다. 작은 체구의 마른 김연구사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속삭인다.
“저, 차라도 가져올까요?”
“그래, 좋은 생각이야. 이거 먼저 치우자.”
권 연구관이 배식판을 들고 일어선다. 모두들 그의 뒤를 따라 배식판을 반납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표정들이 그리 밝지는 않다. 김 연구사가 커피와 녹차를 종이컵에 담아 온다.
“죄송하지만, 취향을 잘 몰라서요. 그냥 골고루 가져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난 커피.”
“난, 착한 녹차.”
권 연구관 다음으로 구 연구관이 선택을 한다.
“구 연구관님, 어젠 커피 드셨잖아요. 어제는 착한 커피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정 연구사가 커피 잔을 입에 문채 의자를 당긴다. 그 옆의 민 연구사와 김 연구사는 서로에게 녹차를 건네며 쟁반을 치운다.
“자, 관장님 퇴임식에 뭐 특별한 이벤트를 해보자. 난 정말 이제 너무 늙어버렸어. 생각이 고갈되었다고나 할까?”
“음. 권 연구관은 전에도 그랬지.”
“구.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나한테 왜 그래? 이런 모습 착하지 않아.”
“내 생각엔 금전적인 거 말고 추억이 될 만한 행사를 만들었으면 좋겠어.”
권 연구관은 머리를 식탁에 댄 채로 구 연구관의 어깨를 친다.
“구. 내가 이런 말 안하려고 했는데, 그 얘기 때문에 우리가 모인거야. 제발.”
권 연구관은 특유의 목소리로 앙알된다.
“아, 그래? 이미 얘기가 됐었군. 하하.”
구 연구관은 머리숱 없는 정수리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는다. 선한 웃음이다. 그 옆에 있던 김 연구사가 다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저, 노조가 아니라 전체 직원들 대상이죠?”
“물론이지. 전체 직원들을 대상으로 해야지. 그런데 관장님 연임은 안 되는 거래요? 관장님께서 더 계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관장님을 더 모시고 싶어요.”
정 연구사가 권 연구관과 구 연구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묻는다. 권 연구관이 엄숙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대답한다.
“관장님께서 고사하셨어. 지난 번 우리가 연임 관련해서 의견을 올렸잖아. 장관님께서 관장님 의견을 직접 물으셨나봐. 그런데 퇴임하기로 결정하셨대.”
“왜요?”
연구사 3명이 입을 모아 합창을 한다.
권 연구관과 구 연구관은 동시에 어깨를 올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멀리 창가에 앉아있던 차실장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난다.
비 오는 날, 미술관 주변은 조용하다. 부산스러운 도로와 달리 오래된 공원이나 궁, 미술관은 사람의 발길이 드물다. 커다란 검은 색 우산을 쓰고 담장 없는 미술관 주변을 아주 느리게 걷는 이가 보인다. 마치 우산을 든 조형물처럼 그의 움직임은 미세하다. 물오른 잔디가 그의 형태를 돋보이게 한다.
키가 큰 그는 회색 슈트가 잘 어울린다. 짧은 흰색 머리카락이 금테안경 너머의 눈빛을 이지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코 옆의 팔자주름으로 그가 얼마나 자주 웃는 지 가늠할 수 있다.
우산을 뒤로 넘겨 부슬거리는 비를 느껴본다. 입을 벌려 혀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센다. 하나... 두울, 세엣.
“이제 감각도 없어졌나 보네. 느껴지지가 않아. 젠장!”
“관장님, 뭐 하시고 계신지... 여쭤 봐도 됩니까?”
남자는 흠칫 놀라 우산을 고쳐 쓰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사람도. 인기척을 하고 와야지.”
“비 오는데 산책 중이세요?”
차 실장은 투명한 우산을 썼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엉킨 곱슬머리이다. 고집스러운 얼굴이지만 겸손한 사람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의 어깨가 듬직하다.
“이 담장 없는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싸웠는지 알지? 그 때를 생각하고 있었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일인 것 같아.”
“네. 맞습니다. 관장님. 오래된 건축물이 많은 이곳과 어울리죠. 주변의 환경과 소통할 수 있도록 담을 없앤 시도는 평가가 좋습니다.”
남자는 입안의 사탕을 굴려 가슴 깊이 향기를 마신다. 상쾌한 페퍼민트 향이 머리와 온 몸으로 퍼진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비 소리도 차갑고 청량하다. 그는 주머니에 찔러 둔 손을 꺼내어 차 실장에게 펼쳐 보인다.
“하나 들겠나?”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들고 껍질 속의 사탕을 입안에 넣는다.
“껍질은 날 주게.”
남자는 껍질을 반으로 접어 천천히 바스락대며 비 사이로 리듬을 보낸다.
“사람들은 우아하고 멋진 장면을 좋아하지. 그런데 말이야. 우아함은 돋보이는 것이 아닐세. 그저 기억될 뿐이야. 우리 미술관 건축물은 존재감이 미약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 미술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해.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의 삶에 스며든 거지. 허허”
너털웃음 짓는 그의 모습은 행복한 듯 슬프다.
“저, 관장님. 연임... 이야기 말인데요. 직원들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오신 업적도, 평가도 .... 높으시고...”
“그만하게. 이미 결정된 일이야. 이제 후배들이 뒤를 밟아주시게.”
남자는 사탕껍질의 박자를 다시 맞춘다. 그리고 차실장을 떠나 미술관 뒷마당의 거대한 조형물 앞을 지나간다. 그 모습이 마치 그림엽서와 같다.
“관장님, 그 사탕껍질. 짐노페디 맞죠? 피아노인가요?”
남자는 사탕껍질을 든 손을 들어 보인다.
실장은 외로운 공무원세계의 좋은 벗이었다.
젊은 시절, 그림을 그리던 그가 문화정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붓을 꺾었다. 어쩌면 꼬박꼬박 걱정 없이 들어오는 공무원 월급에 더 마음이 끌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되었다. 이만하면 참 열심히 살았다. 남자는 뒤를 돌아본다. 차실장이 저만치 서서 아직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손을 흔든다.
그는 아주 느리게 사탕껍질을 비벼 에릭 사티(Erik Satie)의 짐노페디(Gymnopedi)를 연주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짐노페디 3번 기타와 첼로 연주이다.
저 멀리 그리스 신전, 어린 남자무용수들이 차가운 대리석 위에 원을 그리고 서 있다.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다. 아주 느리게 몸을 움직인다. 온 몸으로 바람과 비를 느끼며 아주 천천히 춤을 추며 발끝을 끈다. 애잔하고 슬프게. 그 모습은 너무 장중하여 숭고하고 아름답다.
“비스듬히 그림자를 자르고 명멸하는 회오리
밝게 빛나는 판석 위에...
콘따민(J.-P. Contamin de Latour)의 시. 그 다음이 뭐지? 요즘 들어 눈물이 많아져서 안 되겠어. 감상적이 된단 말이지.”
빼곡하게 책들이 꽂혀 있다. 분야별로 다양한 책들이 보기 좋게 분류된 책장. 문화예술에 대한 책들은 표지가 예술적이다. 남자는 책과 신문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만들어진 현실이지만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굵직한 선을 두르고 있는 중후한 책상. 그 위에 크리스탈로 된 명패가 놓여 있다. ‘이기율’, 남자의 이름이 또렷한 흰색으로 새겨져 있다.
남자는 의자 뒤로 돌아가 큰 상자에 책들을 넣었다. 빈틈없이 상자를 채운 후 굵은 매직으로 ‘미학’이라고 적는다.
책상 위의 휴대폰이 진동으로 몸을 떤다.
아내이다. 남자는 휴대폰을 들고 창가로 가서 손가락으로 화면을 민다.
“당신이에요? 여긴 아침이에요. 커피 마시면서 전화하는 중이에요. 커피는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가 최고예요. 당신은 커피 마셨어요? 오늘은 좀 바빠요. 이탈리아는 당신이 잘 알잖아요. 점심시간에는 매장 문을 닫기 때문에 서둘러서 일을 하지 않으면 그날 일을 다 못한다고요. 당신은 어때요?”
아내는 이탈리아에서 패션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억양은 리듬 있고 경쾌하다. 단점이라면 자기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에는 그 모양이 귀여웠다. 수다스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을 몰랐으니까 말이다.
“좋아.”
“아니, 퇴직하기로 했잖아요? 언제죠 날짜가? 부디...”
남자는 그녀가 전화기를 들고 한 손으로 성호를 긋고 있을 상상을 하며 미소를 짓는다.
“신경 쓰지 마. 다음 달 말.”
“맘마. 미아!!”
“당신은 그 단어 일본어 발음처럼 해. 일본 사람인 줄 알겠어. 허허허.”
“안 그래도, 어제 디너쇼에서 어떤 멋진 이탈리아 남자들이 내게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어요. 난 남편이 있는 한국 사람이라고 했지요.”
허허. 그건 오버야. 이 사람아. 편하게 대해야지. 그 신사들이 당황했겠군.”
“그런가요? 축하해요. 당신. 참, 우리 공주도 잘 있어요. 걱정 말아요. 그리고 고생했어요. 고맙기도 하고. 아휴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여보.”
“알았어. 7월에 오면 함께 축배를 들자고. 건강 조심하고.”
남자는 창가에서 돌아선다.
“우리 브라운 잘 있죠? 브라운 밥, 잘 챙기고 있죠? 목욕도 잘 시키고 털은 잘 말려야지 안 그러면 피부병 생겨요. 오랫동안 혼자 두면 우울증 생겨요. 여보?”
“응. 미팅 가야해. 걱정 말아요. 끊어.”
반쯤 열린 문틈으로 허과장이 얼굴을 들이민다.
“관장님, 들어가도 될까요? 퇴근 하셔야지요.”
“들어오게. 참 나. 나보다 브라운을 더 챙기니 말이지. 내가 주인인지 개가 주인인지 모르겠어. 허허허”
“혹시, 미팅이 잡혀있으신가요? 퇴임식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아니, 미팅이 있는 건 아니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내 정신을 빼놓던가, 브라운 얘기만 할 사람이야. 아내한테는 브라운의 평가점수가 나보다 더 훌륭하거든. 허허허.”
허 과장은 몇 걸음 안으로 들어와서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내려다 미소를 띤 얼굴로 표정을 고친다.
“관장님, 퇴임식을 준비하려고 하는데요.”
“허 과장, 직원들과 조용히 인사하는 것으로 해요.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야.”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 남자는 이 계단을 수년간 오르내렸다. 전생에 궁과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이 근처를 맴도는 보직만 몇 번을 받았다.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며칠 안 남았다.”
남자는 지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힘주어 내딛고는 밖으로 몸을 밀어낸다. 50m 전방에 집으로 향하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 되어 갈 즈음, 남자는 정류장 앞의 떡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희고 흰 백설기가 먹고 싶었다.
남자는 입안의 사탕을 굴리며 떡이 든 종이가방을 내려다본다. 길버트 오설리반(Gilbert O`Sullivan)의 클레어(Clair)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다. 클레어의 밝은 리듬은 어느새 57개의 피아노 건반이 된다.
맨 위의 계단에 오르자 남자의 흥얼거림이 거칠어진다.
“어휴~ 이 계단은 줄어들지를 않아.”
‘컹!! 컹!!’
벌써부터 남자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대문 안에 있던 브라운이 커다란 코를 문밖으로 내밀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알았다. 알았어.”
‘띠리릭.’ 잠금장치의 비밀번호가 풀리자 문이 열린다.
브라운은 남자를 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꼬리를 매우 빠르게 양옆으로 흔든다. 커다란 몸을 남자에게 던지다시피 하며 안아달라고 조른다.
“브라운, 이제 난 너를 안을 수가 없어. 네가 커버린 거야. 내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허허.”
남자는 곧장 마당으로 간다.
지대가 높은 남자의 집은 북악산을 그림처럼 앞에 두고 있다. 밤이 되면 북악산은 검푸른 덩치를 숙여 잠이 든다. 산을 타고 빛나는 서울 성곽의 불빛만이 길게 드리어져 어둠을 밝힌다.
“브라운, 나는 네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단다. 네 나이가 사람나이로 쳐서 나랑 비슷해도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았다는 의미야. 이 집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지. 아주 낡고 담장도 허물어져가는 초라한 곳이었어. 나이 드신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가족이 작은 방에서 힘들게 살았어.
내가 말이야, 아주 무능력한 아들이고 남편이었거든. 저 아랫동네에는 우리 다섯 식구가 살 집을 마련할 수 없었어. 그래서 이곳 산꼭대기까지 올라오게 된 거야. 추운 겨울에는 말이야, 연탄가게에서 배달도 해주지 않던 곳이야. 비탈지고 사람이 몇 살지도 않았거든. 허허.
그런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아래에서 물을 길어오던 그 때가 그립다. 브라운.”
브라운은 남자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처럼 조용히 앉아서 검은 산을 바라본다.
“난, 왜 이 산꼭대기에 살면서도 바다 끝에 밀려 와있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모르겠어. 즐겁게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가슴이 허전하다. 이제부터는 말이다. 브라운, 좋은 기억만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바다 끝에 있을지라도 말이다. 어때?”
‘컹! 컹! 컹!’
“알겠다는 얘기니? 배고프다는 얘기니? 허허허.”
브라운은 집안으로 들어가는 데크 위로 겅충 뛰어오른다.
“그래, 그래. 알았다. 배고프다는 거지? 그래 밥을 먹자. 식사를 같이 할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렇지? 우리 저녁을 먹고 축배를 들자. 나의 퇴임을 축하해 줄 거지? 언제나 고마운 브라운.”
200여명이 모인 강당에서 천둥치듯 박수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크게 숨을 쉬고 마이크를 잡는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곧 식사 시간이니까 길게 이야기 하지 않을게요. 식사시간을 방해하는 나쁜 관장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허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음바다가 된다.
“이곳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 시간들을 영원히 제 가슴에 안고 가겠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힘이 되었고 행복했습니다. 저에게 마음을 다해 주신 것처럼 차기 관장에게도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남자의 눈 밑이 반짝인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이크를 고쳐 잡는다.
“음. 간혹, 일을 하다보면 바다 끝에 서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동료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게는 멋진 벗들이 있어 바다 끝에 서있더라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순간이라고 하지만 시간은 넉넉합니다. 그러니까 늘 멋진 하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가끔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두어도 되지 않을까요? 다른 이들에게 폐를 주는 상황은 만들지 말아야겠지만 말입니다. 허허허.”
앞줄에 앉아 있던 차 실장이 고개를 떨군다. 참고 있던 그의 어깨가 흔들린다. 사회를 보던 허 과장도 뒤돌아선다. 다음을 진행할 수가 없다. 울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직 30년 동안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다만 멋진 하루를 살았다고 매일 밤 되새겼다. 치열하게.
‘이제부터는 내 자신에 대해 침묵하지 않을 거야. 춤을 춰 보자고!’
남자는 가슴으로 이야기한다.
‘바다 끝에서’는 퇴임을 앞둔 기관장의 이야기이다. 창작 시나리오의 형태를 띠고 있어 글을 읽으면서 한 편의 영화를 상상하며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해 보았다.
글 속에 등장하는 에릭 사티(Erik Satie)의 명곡 짐노페디(Gymnopedi)는 비 내리는 날 어울리는 곡이다. 시를 읊조리는 것처럼 반복되는 선율, 애잔함과 숭고함을 담은 음악에 퇴임을 앞둔 공무원의 심리를 담아 이를 형상화했다. 주인공은 그동안의 시간들을 천천히 회고하며 잔잔한 웃음과 슬픔, 나날의 고귀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특히 짐노페디 3번은 주인공의 마음과 닮았다. 글 속의 숫자는 주인공의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57개의 계단이 미술관장으로 부임된 나이였다면 3은 인생의 새로운 출발에 대한 다짐이다.
주인공의 친구이자 동료인 차 실장은 이 관장의 공로를 잘 알고 있으며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이 관장이 손버릇처럼 사탕껍질을 비벼 무엇을 연주하는지 잘 알고 있는 좋은 벗이다.
7개의 글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장면을 표현한다. 그러나 전체 흐름을 살필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했다. 미화원과, 직원들, 차 실장, 주인공의 부인과 허 과장, 잊지 못할 어머니, 57개 계단의 집과 브라운, 어진 기관장의 퇴임식. 글의 기획에 맞도록 그려보았지만 장면에 대한 상상의 확장은 독자들의 몫이다.
주인공 이기율은 임기 동안 상하 직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공무원으로서, 상사로서 맡은 일을 충실히 해왔고 책임감과 현명함으로 문화정책의 바른 방향을 걸었던 인물이다. 30년 동안 자신의 일보다 나라의 일을 중요시했고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한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가난한 화가였다. 젊은 시절, 연탄배달도 마다하는 산꼭대기에 집을 얻었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안정된 삶을 위해 공무원이 된다. 30년 동안 자신을 낮추고 침묵하며 살았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낡은 집은 공간의 느낌을 살려 수리하였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첫 번째로 눈을 맞던 그 집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북악산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 별장 같은 공간이어서가 아니다. 낡은 그 집은 힘들었던 시절을 견딘 자신을 닮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퇴임식을 하는 날, 주인공 이기율은 자신을 위한 삶을 새롭게 꿈꾼다. ‘춤 춰 보자!’는 콘따민(J.-P. Contamin de Latour)의 마지막 시 구절로 마무리 하면서 임기 후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그의 열정적인 삶은 임기 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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