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집은 생활의 공간이자 생산의 공간이자 사회화의 공간이었다. 유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집은 조상을 모시는 종교의 공간이기도 했다. 집은 사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이 공존했으며, 개인의 사회적 위상은 집의 위상과도 맥락을 같이했다.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기능을 가진 조선시대의 집은 어떻게 운영했을까?
〈최흥원이 살았던 대구 백불암 고택〉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조선 중기 이후 양반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기 시작했다. 여성은 안채를 중심으로 일했고, 남성은 사랑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여성의 역할이 임신과 출산, 음식과 의복 마련 등 가족의 생존과 관련된 안살림에 집중된 반면 남성은 가족의 생존과 더불어 집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함께 수행했다.
대구부 해안현 칠계[일명 옻골, 오늘날 동구 둔산동]에 살았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은 31세(1735)부터 82세(1786)에 사망하기까지 50여 년간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역중일기(曆中日記)』로 불리는데, 일기에는 가장(家長) 최흥원이 가정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최흥원이 일기를 쓸 당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1682~1765)는 살아 있었다. 36세(1740)에 부인과 사별했으며, 두 명의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도 부인이 사망한 다음 해에 죽었다. 최흥원에게는 세 명의 아우가 있었는데, 이들은 인근에 따로 살았다. 최흥원 4형제는 어머니를 봉양하는 가운데 일상과 경제를 공유했다. 경제권의 상당 부분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한 관리와 분배의 중심에는 최흥원이 있었다.
오늘 막내아우를 시켜 다시 경산에 가서 끝내지 못한 대(臺)의 흙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나는 말을 달려 북산에 들어갔는데, 동촌의 장정 수백 명이 이미 와 있었다. 우각사(牛角砂)를 거의 반쯤 조성하도록 해 놓고,
둘째 아우를 남겨서 대의 일을 감독하게 했다.
-1748년 8월 16일-
돈 25냥을 둘째 아우와 막내 아우에게 보내서 나눠 쓰게 했다.
-1761년 1월 30일-
최흥원은 수시로 아우들에게 돈과 곡식을 주었다. 아우들은 이것으로 생활하는 한편,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집안일을 분담했다.
〈함양 일두 고택 사랑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최흥원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이 집에 머물 때는 그들에게 정성을 다했으며, 손님이 돌아갈 때는 곡식이나 노잣돈을 주는 등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알고 지내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들조차 최흥원의 집에 들어와 기꺼이 묵기를 요청했으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최흥원의 집을 여관처럼 드나들었으니 최흥원의 인심이 소문났기 때문일 것이다.
최흥원은 지식인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본성을 함양하고 싶었지만, 가족 부양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식인이자 학자로서의 삶 보다는 식솔들의 끼니를 걱정하고 농사를 관리하며 자제들의 출세를 위해 노력하는 일상이 우선이었다. 그에 따른 번뇌가 삶을 관통했지만, 내면의 욕망보다는 현실적 책임에 더욱 충실했다. 최흥원이 끼니를 책임져야 할 ‘식구(食口)’는 가족과 노비들이었다. 오늘날은 ‘가족’과 밥을 같이 먹는 ‘식구’를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의 ‘식구’는 가족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비가 크게 내려서 강물이 불어 넘쳐 갯가의 보리가 모두 잠겼다.
우리 집에서 잃어버린 것을 계산하여 보니 거의 40여 섬이 되었다.
백여 명의 입이 먹고 살아갈 방책이 없으니 가슴이 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45년 6월 9일-
〈김홍도 《논갈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최흥원은 백여 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씨 뿌리기, 곡식이 익어 가는 상황, 추수와 수확량 등을 꼼꼼하게 챙겼다. 논과 밭이 여러 곳에 있어 최흥원이 일일이 관리하거나 감독할 수 없었다. 아우, 아들 사촌 등에게 파종과 타작을 감독하게 했고, 그들은 최흥원에게 작업 결과를 보고했다.
최흥원은 노비의 관리 감독에도 신경을 썼다. 농사는 노비의 노동력에 의존했으며, 이들은 집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다양한 일에 동원되었다. 1745년 홍수 때 종들을 갯가에 보내 물에 잠긴 보리를 건져 수습하게 했는데, 다섯 말이 넘었다. 한 톨의 곡식이라도 건질 수 있어 재앙 중 다행이라고 여겼다. 떨어져 사는 노비들은 최흥원에게 공물을 바쳤으며, 옻골 주변의 동화사, 부인사, 은해사, 파계사 등의 중들도 수시로 최흥원에게 물건을 바쳤다.
〈1805년 한글 책력〉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농작물 수확과 노비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지인들의 선물과 부조도 최흥원의 경제생활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최흥원의 집에는 며칠이 멀다 하고 선물이 도착했다. 지인들은 닭, 꿩, 술, 인삼, 숭어 등의 음식 재료 혹은 편지지, 붓, 책력 등을 주었다. 물론 최흥원도 친척, 이웃,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온정을 베풀었다. 최흥원은 노동력뿐만 아니라 곡식, 목화솜, 책, 소나 말 등의 탈것, 혼인이나 장례에 필요한 물품 등을 이웃과 함께 나누었다. 가족 너머의 친척 및 이웃들과의 물질적·정서적 교류는 최흥원 본인과 가족의 보호 장치이자 무형의 자산이기도 했다.
〈최흥원의 신주가 봉안된 백불암 종택의 사당〉 (출처: 영남일보)
유교에서는 집에 사당을 지어 조상을 모셨다. 집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조상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조상이 세상을 떠나면 신의 존재로 제례를 통해 후손과 만난다. 최흥원은 종손으로 각종 제사를 주재했다.
최흥원은 제사를 정성껏 모시는 가운데 단순히 시속(時俗)만을 따르지 않고 예법에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고민했다. 예법에 밝은 선학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제례 예법을 만들기도 했다. 설날에 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시속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나, 결국은 도축 금지법을 위반하는 일이다. 최흥원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고기를 사서 쓰면 불결하다고 여겨 법을 어겨 가면서 소를 잡았는데, 이는 국가를 속이는 행위이고, 고기를 사서 쓰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최흥원은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다.
최흥원은 제수를 마련하거나 제수 품목을 대부분 직접 정했다. 제수 마련을 위해 대구부 시장, 하양 시장, 자인 시장 등에 심부름꾼을 보내, 송아지, 소고기, 생선, 전복, 과일 등을 구하기도 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경사스런 일을 골라 그린 《평생도(平生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최씨 옻골 입향조 9세 최동집부터 11세까지는 주로 대구의 양반들과 혼인했다. 대구 지역 양반과의 관계망 형성을 통해 지역에서의 기반을 구축했다. 12세부터는 안동 지역의 양반과 혼인이 이루어졌으며, 영천, 성주, 경주 등 혼인 대상이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4세 최흥원 역시 안동의 명망 있는 가문과 혼인하려고 노력했다. 12~13세가 안동의 의성 김씨와 중첩 혼인을 했다면, 14~15세는 안동 지역에서 의성 김씨와 쌍벽을 이루는 하회의 풍산 류씨와 거듭 혼인했다. 아들 주진은 하회의 풍산 류씨와 혼인했고, 매부와 종매부도 풍산 류씨였다.
최흥원 대에 이르러 옻골 최씨는 영남 지역에서 최고의 혼반(婚班)을 형성했다. 이는 가격(家格)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혼인 대상은 영남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최흥원이 퇴계학파의 주류에 편입되려고 공을 들인 만큼 당시 서인(西人)이 많은 대구 혹은 상주지역과는 혼담이 거의 없었다.
최흥원은 사돈과 형식적인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 및 정치를 논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돈 집안끼리 비슷한 학문적 성향을 띄었다. 혼인을 매개로 집단 지성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혼인은 학문적 위상과 사회적 위상을 결정하는 데 중요했다. 혼인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였다.
공부를 통한 입신양명은 집의 품격을 높이는 핵심 요소이다. 최흥원이 자제 교육에 정성을 다한 것은 당연하다. 그 역시 뛰어난 학자였지만, 아우, 아들, 사촌, 조카들이 영남의 훌륭한 학자에게 배울 수 있도록 했고, 인근 사찰에서 조용하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으며, ‘북계정사’라는 교육 공간도 마련했다. 좋은 책은 말할 것도 없고 문방사우도 부지런히 마련했다. 그러나 최흥원의 노력만큼 자제들의 과거 합격 운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약장(藥欌). 다리를 두 마리의 박쥐문으로 만들어 쌍복(雙蝠)을 기원하였다.〉 (출처: 허준박물관)
최흥원은 아버지가 병상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병명·진료 기록·복용한 약·증세 등을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했다. 주치의처럼 아버지를 보살폈고, 병의 진행 과정을 진료 일지처럼 상세하게 기록했다. 어머니는 1765년에 사망했는데, 1737년부터 어머니의 질환을 언급했다. 일기는 날씨를 기록한 다음 어머니 병의 증세 혹은 안부 등을 적는 방식이었다. 최흥원은 어머니가 아플 때 약을 짓거나 의원을 부르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체력 증진을 위해 밥상에 신경을 썼다. 육류·생선·해산물 등을 끼니마다 마련하고자 했고, 옻골 인근의 시장뿐만 아니라 동해까지 사람을 보내 반찬거리를 구했다.
최흥원은 의학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병의 진행 상태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대변을 조금 보셨는데, 건조했다”, “밥을 드신 뒤에 대변이 꽤나 미끄럽게 잘 나왔다”고 기록하는 등 변의 상태로 병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기도 했다. 1739년 1월 24일 일기에는 “어버이를 모시는 자는 의학을 몰라서는 안 되지만 의학을 안다는 것도 쉽지 않으니,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했다. 최흥원이 의학 공부를 한 것은 효행의 연장이었다.
어머니께서 편한 날이 없으시고 둘째 아우의 병도 회복될 기미가 없으니,
너무 애가 타서 흰 머리털이 하루에 한 길은 자라는 것 같다 …
막내 제수씨가 또 크게 아프니, 이게 무슨 증상인지 또한 염려스럽다.
-1742년 7월 14일-
집에는 거의 매일 아픈 사람이 있었다. 특히 몇 년에 한 번씩 유행하는 전염병은 삶을 위협하거나 일상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1747년 1월에도 천연두가 유행하여 둘째 아우와 조카 및 몇몇 종들이 생사를 오갔다. 최흥원은 사방팔방으로 여러 가지 약재를 구하여 둘째 아우의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동생이 건강을 회복한 이후 최흥원은 도움을 주었던 이웃, 친척, 노비들의 따뜻한 손길을 잊지 않았다. 잔치를 열어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후 최흥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새로운 일상으로 복귀했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기획한 전통생활사총서 8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이처럼 최흥원은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 정성을 다했던 생활밀착형 양반이었다. 82세로 죽을 때까지 관료 진출 및 향촌 활동을 자제하고 성실하고 묵묵히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옻골 최씨를 영남 지역에서 명망 있는 가문으로 만들었다. 『역중일기』는 그것의 생생한 기록이자 증거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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