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새로운 홍보 방법으로 ‘브랜드웹툰’이라는 게 등장했다. 일반 웹툰과 형식은 같지만, 브랜드웹툰의 경우 발주처가 있으니 목적이 분명하다. 특히 MZ세대와의 접점이 높다는 게 PPL과는 또 다른 장점이다. 브랜드를 홍보하고 그들을 목적하는 지점까지 데려다 놓는 게 일이라, 웹툰의 제작 과정은 흡사 항구를 떠난 유람선이라고 할까. 스토리작가, 그림작가, 제작사가 항로를 선정하고 파도의 흐름을 잘 타야 빠르게 섬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섬이야말로 웹툰 제작진들에게는 이상향이다. 더 많은 독자가 그 안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 같다. 이런 마음을 담아 경북콘텐츠진흥원 주관하에 브랜드웹툰 《안동 선비의 레시피》가 완성되었고, 2022년 11월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되었다. 2021년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조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을 모티프로 한 웹툰이다.
〈『수운잡방』〉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수운잡방』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한문 필사본 조리서로 ‘격조 있는 음식문화를 적는 여러 가지 방법’이라는 뜻이다. 행서로 쓴 상편 86종은 500여 년 전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 초서로 쓴 하편 35종은 그의 손자인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이 각각 집필하였으며 모두 121종에 달하는 술과 음식 만드는 비법이 담겨 있다. 생전에는 서로 만날 수 없었던 할배와 손자가 요리 경연대회를 통해 2022년의 안동에서 만나게 된다는 타임슬립 설정이었다.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한 《안동 선비의 레시피》〉 (출처: 카카오페이지)
《안동 선비의 레시피》는 카카오페이지에서 당시 조회 수 75만 가까이 기록한 후 브랜드웹툰 최초로 시즌2로 제작돼 2024년 2월 연재되었다. 시즌2는 카카오페이지 브랜드웹툰 역사상 이례적으로 조회 수 130만에 근접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했고 시즌1을 역주행시켜 5월 20일 기준 각각 79.7만, 133만을 기록 중이다. 국내 메이저 웹툰 플랫폼에 안착한 《안동 선비의 레시피》는 누구든지 언제나 볼 수 있어 진입 장벽도 없으며 연재 기간도 무한이다.
〈수운잡방 체험관에서 재현한 수운상차림〉 (출처: (사) 수운잡방연구원)
『수운잡방』 사본을 처음 접한 건 안동시 와룡면에 위치한 ‘수운잡방 체험관’에서였다. 각기 다른 서체로 된 누렇게 바랜 책에서 붓을 들고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을 500년 전 선인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빼곡한 한자에 담긴 정성과 뜻을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싶었다. 후손인 안동 광산 김씨 예안파 설월당 종가의 종부이자 수운잡방 체험관장인 김도은 관장은 “힘들 때 할배들을 생각하면 없던 힘도 생겨난다.”라고 했다. 한겨울 설월당 종택 마당에 서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그녀는 시즌2 최종화에서 수운잡방 요리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 분한다.
〈탁청정의 전경〉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아카이브)
《안동 선비의 레시피》 시즌1에서 주인공이 500년 후 대한민국으로 타임슬립하는 무대였던 탁청정을 군자마을에서 볼 수 있었다. ‘한석봉’으로 알려진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현판을 썼다는 탁청정에 앉아 시선을 두니 설렘과 걱정이 교차했다. 군자마을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현재의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로 원형을 보존해 이전한 것이다.
낙동강을 지척에 둔 아름다운 외내 마을에 일가를 이루고 살았던 김유와 김령. 1555년 김유 사후 22년 만인 1577년에야 김령이 태어났기에 두 사람은 생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 『수운잡방』을 웹툰으로 재구성하면서 가장 주목했던 지점이라면 시대를 초월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이야기를 얼마나 흥미롭고 격조 있게 표현할 것인지였다. 김유가 남긴 조리서 낱장들을 정리하여 자신의 것과 함께 책으로 엮었던 김령으로서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무척 궁금했을 터. 아버지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에게 듣는 것만으로는 성품이나 얼굴 생김새를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안동 양반가의 음식을 주제로 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브로맨스, 쉽지 않은 주제였다.
〈안동 광산 김씨 예안파 문중에서 보관해 온 선조들의 일기〉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하지만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것은 웹툰이 아닌가? 웹툰의 인기 코드인 타임슬립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때 주요 장치로 월식을 활용한 건 주인공 김유(김이담 역)의 외조부가 세종 26년(1444)에 만든 한국사 최초의 역법서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의 저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였다는 점을 참고했다.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벗들과 어우러져 유유자적하며 사는 게 좋았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베풀고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하며 살아가던 김이담은 월식의 밤 뒷마당에서 담을 넘어온 자객과 마주치고 절체절명의 순간 500년 후의 대한민국 안동으로 타임슬립하게 된다. 그리고 낡아빠진 고택 감성의 '할매 찜닭' 식자재 창고에서 주인 할매의 손녀 한다경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것이 바로 《안동 선비의 레시피》 시즌1 첫 화의 엔딩 장면이다.
거꾸로 시즌2에서는 여주인공이 김이담을 찾아 조선으로 타임슬립한다. 함께 출전한 ‘수운잡방 요리 경연대회’에서 최종 우승해 할머니의 낡아빠진 고택을 멋진 한옥스테이로 변신시키고 어엿한 사장으로 행복을 누리며 살던 그녀. 벚꽃이 날리고 낙엽이 져도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던 건 훤칠하게 잘생긴, 진한 추억 남기고 떠난 조선 남자 김이담 때문이었다. 챗GPT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조선으로 타임슬립하긴 했으나 김이담이 아닌 손자 김령이 사는 세상! 부패한 고을 수령과 탐욕스러운 상단 객주 박수영의 농간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풀려나려면 비위가 약한 수령에게 맛있는 요리를 갖다 바쳐야 하고, 이를 위해 두 사람이 협력하면서 가문의 갖가지 음식과 술이 세상에 나온다. 한편 김령은 『수운잡방』을 집필하던 어느 날 밤 잠결에 할아버지 김유와 상봉하게 된다.
《안동 선비의 레시피》 시즌1, 2를 통틀어 웹툰에 실린 『수운잡방』의 요리들은 화면으로 구현되었을 때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것들을 우선하여 선별했다. 이때 가문의 종부인 김도은 수운잡방 체험관장이 만든 요리와 설명을 참고했다. 요리의 비주얼과 재료, 맛이 중요했던 이유는 주인공들과 반대 세력 간의 추후 이야기 전개, 웹툰을 볼 독자들의 반응이 터질 시기 등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조선시대 양반가의 소박하고 품위 있는 접객 음식들이 500년 후 웹툰을 통해 대중에 선보이는 역사적인 첫 만남이니만큼 그림작가들이 많은 공을 들였다. 삼색어알탕, 분탕, 전계아, 서여탕, 향과저, 황탕 등의 그림을 보고 먹어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댓글이 이어졌다.
〈왼쪽부터 삼색어알탕, 향과저, 분탕〉 (출처: 카카오페이지 《안동 선비의 레시피》)
이쯤에서 다들 500년 전 음식의 맛이 궁금할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살았을까, 양반의 식탁엔 어떤 음식이 오를까, 그 시대의 술은 어떤 맛일까 등. 몇 가지만 소개하겠다.
〈타락〉 (출처: 카카오페이지 《안동 선비의 레시피》)
우선 『수운잡방』에는 요거트와 비슷한 ‘타락’이라는 게 있다. 요즘처럼 달콤한 맛은 아니어도 순하디순하고 달달한 스무디 느낌의 맛이 난다. 소젖을 체로 걸러 죽을 끓인 다음 항아리에 담고 본래의 타락, 없으면 탁주를 한 종지 넣어 따뜻한 곳에 두었다니 만드는 방식은 지금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세종대왕도 드셨다는 이 타락은 식전에 먹으면 속이 편안해진다. 신박한 가지 요리도 있다. ‘모점이’라 하여 가지를 4쪽으로 쪼개 참기름을 둘러 지져낸 다음 간장, 초, 마늘즙 섞은 것에 담가 열흘 이상 숙성시킨 요리다. 수운잡방 체험관에서는 구운 소고기 위에 올려 나오는데, 양질의 한우보다 가지가 훨씬 맛있을 정도였다.
〈왼쪽 전계아, 오른쪽 황탕〉 (출처: 카카오페이지 《안동 선비의 레시피》)
안동찜닭의 원조격인 ‘전계아’라는 요리도 있었다. 영계에 참기름을 두르고 볶아서 청주, 식초, 물, 간장을 넣고 졸인 후 다진 파, 후추, 형개, 천초가루 등을 친 요리. 요즘처럼 당면과 고춧가루는 안 들어 있지만 영계 특유의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과 담백함이 좋았다. 또, 노란 치자 물을 들인 ‘황탕’ 위에 고기완자 대신 신선한 한우육회를 올려 비벼 먹는 맛이 별미였다.
〈멥쌀로 빚은 삼해주〉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편 손님을 초대한 자리에 술이 빠질 수 없는 법. 『수운잡방』 상·하권 통틀어 술 빚는 법이 60여 가지로 절반쯤 차지한다. 상권 서두에 나오는 ‘삼해주’는 꼭 한번 맛보고 싶었는데, 그 맛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정월의 첫 해일(亥日)부터 세 번에 걸쳐 빚는 찹쌀 발효주로, 두 번 덧술하여 빚은 술의 향이 그윽하고 깊어 어쩐지 위로받는 기분이랄까. 이 술은 고려 때부터 제조한 우리나라의 전통 약주란다. 참보리로 만든 ‘진맥소주’는 40도쯤의 독주인데, 입안에 머무를 땐 독하고 향기롭지만 목을 타고 넘어가면 이내 편안해지는 희한한 술이다. 가문에서 약으로 썼을 만큼 사람을 살리는 술이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500년 전 안동 양반가의 요리는 굉장히 ‘맛있다!’ 식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렸으면서도 자극적이지 않고 감칠맛이 뛰어나다. 당시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맛있었을지 모르겠다. 깨끗한 공기와 우물물, 맑은 햇살이 담근 장류, 청정지역에서 키운 한우, 유기농 채소와 과일 등을 식재료로 썼을 테니 말이다. 김도은 종부는 지금도 『수운잡방』에 적힌 그대로 요리를 한다고 했다. 조리도구나 열원, 화력, 식기, 페어링,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는 건 감안해야 할 것이다.
양반가의 선비들이 쓰긴 했지만 당시 사대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건 금기시하였기에 『수운잡방』 속 요리들은 대부분 남자 하인들 몫이었다. 분량상 삭제되었는데, 주인공이 저잣거리에 가는 장면에서도 ‘유사’라 불리는 집사와 동행한다. 조선시대 양반가, 특히 종가에서 장 보는 일을 도맡아 했던 집안의 중년 남성이 있었다.
〈조선시대 사용한 안경집과 안경〉 (출처: 경기도 박물관)
웹툰에서 재미를 유발하는 소재로 쓰인 건 ‘이곳에는 있지만 그곳에는 없었던’ 것들이었다. 고춧가루가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에 전해져 생전에 먹어본 적 없던 김이담은 타임슬립한 안동에서 매운 찜닭을 먹고 고생하지만, 조선으로 돌아갈 때는 다경이 선물한 배낭 안에 라면·환타·안경·라이터·슬리퍼 등 현대문물이 여럿이었다. 시즌2에서는 여주인공 다경이 당시 면전이라 불리던 미얀마에서 사신 따라왔다가 낙오된 여인으로 나오는데 사또에게 이렇게 말한다. “면전에서는 콜레스테롤이라는 귀한 원기를 얻기 위해 일부러 기름진 쇠고기 부위를 골라 먹습니다.” 멍청한 사또가 콜레스테롤을 알 리가. 후훗. 작가로서 하고 싶었던 말은 나름 매력덩어리였던 상단 객주 박수영의 말로 대신했다. 옥에 갇혀서 후손들에게 남겼던, 다소 코믹한 상황에서의 서찰 내용인즉슨 이렇다.
반성문
후손들은 보아라.
차가운 거적때기를 깔고 누우니 세상이 달리 보이는구나.
비단옷에 매일 진수성찬 하며 떵떵거리고 살았지만 명예를 얻지 못하였고,
부당하게 그것을 탐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내가 여태껏 돈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았으나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공익을 위한 일에 진심으로 마음을 쏟는다면
명예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임을 내 이제야 깨닫는다.
이 글은 즉, 다시 태어난다면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처절한 반성의 글이니라.
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후손들은 각고의 노력을 다하라.
-선조 36년 안동상인 박수영 저-
《안동 선비의 레시피》는 시즌2까지 끝이 났다. 가보를 넘어서 국가 보물로 지정된 『수운잡방』의 명성과 역사적 가치에 누를 끼칠까 늘 경계했었다. 그래서 시즌3를 보고 싶다는 독자들이 많았던 건 큰 위안이다. 만약에 시즌3이 만들어진다면 그땐 『수운잡방』 레시피의 절반을 차지하는 술을 소재로 하면 어떨까? 맛을 보아야 글을 쓴다는 엉성한 핑계를 대며 이 술 저 술 맛보는 즐거움을 상상해 본다. 세상에 없던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건 참 설레는 일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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