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합격자 발표 소식을 들었다. 숙은 낙방하고 향중鄕中에서는 오직 김주우金柱宇·주국柱國이 합격했다. 이번 과거에서 사사로운 정이 아니면 합격할 리가 없다. 이 두 김이 모두 시관에게 부탁하여 합격했다고 한다. 몹시 가슴 아픈 일이다.
1617. 7. 26
1617년 7월 26일, 김택룡(1547~1627)의 <조성당일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김택룡의 첫째 아들 숙은 과거시험에 낙방하였다. 고을에서는 김주우와 김주국만이 합격하였는데, 김택룡은 그 결과가 석연찮았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두 합격자 모두 시험 감독관에게 청탁하여 합격한 것이었다. 김택룡은 부정청탁으로 공정하지 못한 시험을 치룬 아들을 안타까워하며 억울한 마음을 일기에 담아두었다.
71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택룡은 자녀들을 일에는 매우 열성적인 아버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1617년 7월 6일 기록에는 의흥에서 시험 보는 셋째 아들 각을 위해 말과 붓, 종이를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사위를 시켜 시험 장소를 미리 답사해 볼 정도였다. 또 과거 시험에 합격한 운발 좋은 붓을 빌리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모습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자식들의 일이라면 정성을 다했던 아버지였기에 부정으로 얼룩진 시험으로 낙방한 아들 일에 몹시도 분개 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8남 6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적자로 5남 6녀를 두었고 소실에게서 얻은 세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그의 자식 사랑은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았고, 적자와 서자의 차별도 없었으며 오로지 14남매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가 1612년(66세), 1616년(70세), 1617년(71세)에 쓴 3년의 기록에는 아버지 김택룡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는 기록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둘째 아들 적(玓)이 병으로 고생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치료를 위해 애를 쓴다. 그럼에도 차도가 없자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까지 한다. 그러나 끝내 아들을 잃는다. 김택룡은 죽은 아들이 묏자리도 직접 찾아서 정하고, 아들을 보내는 일에도 정성을 다한다.
이외에도 출가한 딸들이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노심초사하며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둘째 딸의 혼사를 앞두고, 좋은 날 혼인시키기 위해 점쟁이에게 날짜를 물어보기도 하고, 부족한 혼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 등이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자식에 대한 지극정성은 그의 손자들에게도 이어진다. 1617년 8월 10일, 학문에 게으로고 독송(讀誦)을 열심히 하지 않는 손자들에게 김택룡은 매를 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택룡이 손자들의 공부에 관심을 쏟으며 그들이 공부를 게을리 할 때에는 매질로 다스렸는데, 후손들이 학문을 바로 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김택룡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틈이 생길 때면 집안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비가 내리는 장마철에는 손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문장 및 시의 작법을 중심으로 교육하였는데, 주로 한유(韓愈)의 『원화성덕시元和聖德時』를 사용하였다.
81세까지 살았던 김택룡의 일생에 비하면 삼 년 의 기록을 담은 『조성당일기』는 그의 삶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매일 매일을 아주 꼼꼼하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고, 특히 그의 가족과 친족들에 관한 기록은 거의 매일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어느 집안의 가장이자 아버지의 일상을 면밀히 살펴 볼 수 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집에 주요한 일이나 농사일의 감독․관청에 내는 서류의 작성․토지거래 등의 여러 가지 일들은 첫째 아들 숙(琡) 등의 아들들, 조카인 덕룡, 생질인 정득 등을 시켜서 해결하고 있다. 또한 산양에 떨어져 살고 있는 둘째 아들 적(玓)과 시집가서 살고 있는 딸들을 방문하면서 그때마다 며느리 및 사위, 그리고 사돈 집안사람들을 폭넓게 만나고 있다. 그리고 일기에는 많은 수의 노비들이 등장하는데, 편지의 전달, 장시에서 물건을 사러 보낼 때, 가옥의 수리, 밭의 경작 등의 일을 시키면서 그들의 이름을 빼 놓지 않고 적어두고 있다.
김택룡(1547~1627)이 1612년(66세), 1616년(70세), 1617년(71세)에 쓴 일기는 많은 양은 아니지만, 조선 중기의 사대부의 일기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날마다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고, 특히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한 편집을 거치지 않은 자필 수고본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김택룡의 <조성당일기>는 조선중기 한 사대부의 일상을 그 어떤 자료보다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김택룡의 인적교류‧경제 활동‧사회 활동 등 외적인 활동을 비롯해 질병‧음주‧음식‧주거‧의복 등과 관련한 의식주, 독서‧문학 창작‧자연의 감상‧감정의 변화 등의 개인의 정서와 취향, 그리고 지역 사회 내에서 발생한 사건‧풍속 등의 사회적 환경 등등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아래는 지금부터 400년 전 오늘 김택룡의 일기다.
1617. 10. 10. 맑음
아침에 운심을 보내 원의 누님의 병을 문안했다. 간혹 차도는 있으나 아직 낫지 않아 걱정이라고 한다. 분국(粉麴, 누룩)을 옮기는 일로 종남을 부르니 큰 소리로 화를 많이 내어, 혼을 내 주려다 일단 그만 두었다. 제 아비를 믿고 그러는 것 같다. 김응희가 대하(臺下) 논벼를 베고 종만이 창답 벼를 벳다. 저녁에 걸어가서 봤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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