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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다


▮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다


1911년 1월 8일, 김대락은 신의주의 한 객점에서 눈을 떴다. 어제 아들 형식을 찾아 나섰건만 아들을 찾지 못하였다. 아침은 객점에서 손자사위 등과 함께 밥을 먹었다. 김대락의 다른 식구들은 신의주 10리 못 미쳐 있는 객점에 머물고 있었다. 김대락이 아침을 뜨고 막 숟가락을 내려놓을 즈음, 식구들이 머물고 있는 객점에서 손자 창로가 편지를 써서 그 객점의 주인을 보내 자신을 찾고 있었다. 식구들도 적잖이 김대락을 걱정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김대락은 그 객점 주인을 시켜 다시 아들 형식을 찾도록 하였다. 잠시 후 객점 주인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어왔다. 아들 형식은 이미 압록강을 건넜으며, 또 압록강에는 검문 등이 없다는 것이다.

김대락은 곧장 식구들이 머물고 있는 객점에 인력거 세 대를 보냈다. 이윽고 식구들은 모두 도착하였다. 김대락은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보로 건널 계획을 하였다.

김대락은 압록강에 나와 울진에서 온 손자사위 등의 사람들을 먼저 보냈다. 그러고 나서 자신과 식구들은 차례대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한 걸음에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노구를 이끈 몸 얼어붙은 압록강 위에서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강을 간신히 반쯤 건너가니 건너편에서 얼음수레를 타고 아들이 오고 있었다. 마치 10년 만에 아들을 보듯 놀랍고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였다. 우선 아들이 가지고 온 얼음수레에 식구들은 나누어 올랐다. 수레는 금세 김대락 일행을 강 건너로 데려다 주었다.

강 언덕에 올라 중국 시내를 둘러보니 건물은 조선의 건물과 달리 위로 솟아 있었다. 다시 안내를 받아 동취잔(東聚棧)이란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조선인 주인 김준선(金駿善)이 안내하였다. 그는 청나라 말을 잘해 소통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안동(丹東, 중국 단동)에서 머문 객점은 조선과 달리 바깥 창문만 있고, 내부 구조는 문이 없이 방만 구분되어 있었다. 그의 눈에 중국의 객점은 어설퍼 보이기만 하였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다

  • 출전 : 백하일기(白下日記)
    『백하일기(白下日記)』은 김대락이 만주로 떠난 1911년으로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13년까지의 일기문으로, 망명 당시의 사정과 만주 정착 과정, 만주 망명 사회의 동정이 사실 그대로 적혀 있는 자료이다. 1911년의 일기는『서정록(西征錄)』, 1912년의 것은『임자록(壬子錄)』, 또는『비망록』이라고 했고, 1913년의 것은『계축록』이라고 하였는데, 통칭하여 『백하일기』라고 한다.

  • 저자 : 김대락(金大洛, 1845~1914)
    안동 내앞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안동 지역 독립운동에서는 물론 간도 항일 투쟁에서도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늘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는 바로 『백하일기』의 저자이다. 그의 호는 원래 비서(賁西)이나, 간도로 건너간 뒤 백두산 아래에서 모든 삶을 바친다는 의미로 호를 백하(白下)로 바꾸었다. 원래 그는 유가적 선비의 삶을 살았고, 집안은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추었다. 그러던 그는 1909년 독립 운동에 대해 자각을 하고 류인식이 설립한 협동학교(協東學校)에 자신의 집 사랑채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1910년 가을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그 해 11월 매제이자 초대 대한민국 국무령인 이상룡과 함께 간도 이주를 결심하였다. 간도 이주 이후 신흥강습소 및 경학사 등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하여 이주민들의 경제적 문제와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집필자 소개

글 그림 정용연
정용연
주요 작품으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정가네소사" 1,2,3 권과 고려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룬 "목호의 난1374 제주" 가 있다.


묵호의 난
스토리테마파크의 일기를
이해하기 쉽게
그림과 글로 풀어주시는
정용연 작가의 신간이 나왔습니다.

고려시대
1374 제주를 소재로 한
‘목호의 난’

“최참봉 일가가 피난을 오다”

오희문, 쇄미록, 1597-09-17 ~

1597년 9월 17일, 오늘 저녁 오희문의 집에 참봉 최형의 온 집안 식구들이 찾아왔다. 최형의 4남매를 비롯하여 25명의 식구들과 소와 말 7마리를 데리고 왔는데, 전란을 피하여 피난을 온 것이라 한다. 강원도로 오긴 했는데, 달리 머물 곳이 없어서 오희문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지인이라 우선 아들 윤해의 집으로 들어가게 했다. 윤해의 집에는 윤해의 장모가 머물고 있었는데, 우선 오희문의 집으로 옮겨 머물도록 하였다.
오희문의 집에는 오희문의 어머니와 윤해의 장모가 와 있어, 식사는 쌀 1말과 반찬거리를 윤해의 집으로 보내서 거기서 밥을 지어 대접하도록 하였다. 마침 집에 술이 1병 있어서 이걸 가지고 최참봉을 대접하였다.

“배고픔에 처자식을 길에 버리다”

오희문, 쇄미록, 1593-07-15 ~

1593년 7월 15일, 오희문은 일가를 데리고 전라도로 피난을 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고부군 앞을 지나는데, 문득 길가의 좌우를 둘러보니 밭과 들이 모두 절반이나 황폐해 져 있었다. 비록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린 곳도 간간히 있었으나 모두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어떤 땅에는 호미로 김매기를 한 흔적도 있었으나, 이미 7월 중순인데도 자란 것이 겨우 두어 치 높이에 불과하였다. 호남은 예부터 넓은 들판으로 조선 제일의 곡식 생산지였는데, 이제 천리나 되는 기름진 들판이 거친 풀로만 덮여 있는 것을 보니, 올해와 내년 굶주린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할지 벌써부터 큰 걱정이었다. 아마 내년이 오기 전에 시체들이 구덩이를 가득 메울 것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걱정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문득 길가에 7-8세 가량 된 아이가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여인도 한명 있었는데, 그 역시 길가에 앉아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보니, 여인의 말이 남편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리곤 우리 모자는 장차 굶어죽게 되었다며 슬픈 목소리로 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들으니 슬프고 불쌍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요,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이로 비록 짐승이라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심지어 사람의 탈을 쓰고 처자식을 길에 버리고 돌아보지 않다니! 그 배고픔이 얼마나 컸으면 어찌 이런 지극히 괴이한 일이 벌어졌겠는가! 정녕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이러한 배고픔으로 모두 없어질 지경에 이를 것인가! 오희문은 울고 있는 모자를 쳐다보며 거듭 탄식이 배어나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무주에 남아있는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서 지례읍으로 향해 오다”

여중룡, 갑오병신일기

1894년 10월 어느날, 여중룡은 난리를 피하여 지례읍(知禮邑)에 들어가서 친척인 호운(湖雲)과 같은 집에 있다가 10월 11일에 식구를 다 데리고 이사를 하였다. 한편, 무주(茂朱)의 동학도는 계속 존속할 우려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고을의 수령이 대구부(大邱府)에서 병사 20명을 청하는 등 동학농민군을 막을 채비를 갖추었다. 어느날 보니 무주 근방의 동학군이 정황을 살펴보니 몇 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지례읍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서 포수와 창잡이를 보냈다.

“항도촌 첫 정착지에서의 생활”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이주한인들 ⓒ독립기념관
김대락, 백하일기,
1911-01-15 ~ 1911-01-24

1911년 1월 15일, 김대락은 서간도의 첫 조선인 정착지인 항도촌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보내는데 방에는 커튼처럼 가리는 가리개도 없어 추위가 매우 심하였다. 다른 사람들, 특히 울진에서 온 사람들은 방 하나에 여러 사람이 기거하여 그 비좁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 온 사람들은 뜻이 통하면 가문과 성씨가 다르더라도 이제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협동하여 처리하였다. 김대락이 보기에 이역 땅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역의 중국 땅은 김대락이 보기에 예가 무너진 나라였다. 김대락은 우연히 결혼식을 보았다. 그들은 통소를 불면서 떠들썩하게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신부의 결혼 행차를 앞장서서 이끄는 것이었다. 김대락에게는 이것이 이국의 낮선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예가 무너진 중국으로 보였다. 김대락은 전통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옛날 도와 예가 행해지던 때를 그리워하였다.

“이역만리에서의 고깃국 파티”

김대락, 백하일기, 1911-06-22 ~

김대락과 그 가족들은 이역타국의 삶에서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넉넉한 식량이 없어서도 잘 먹지 못해서이지만, 타국의 낯선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아 먹지 못한 적도 많았다. 1911년 6월 22일, 김대락의 식솔들이 청나라 사람의 집에서 개를 한 마리 사왔다. 개의 가격은 중국돈으로 7각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조선에서 쓰던 돈으로 환산해보니 2냥8전이었다. 매우 싼 가격이다. 중국은 물가가 모두 비쌌는데, 이것은 매우 쌌다. 이것이 이렇게 싼 이유는 청나라 사람들은 개를 즐겨 먹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침 신흥강습소 기숙사에서 황서방(황병일)이 왔다. 마침 개장국이 있자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이날 식구들은 오랜만에 조선의 방식으로 개장국을 끓여 입맛에 맞게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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