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조선시대 회답사에 대한 접대


일본내 '한류의 원조'라면 흔히 조선통신사가 거론된다. 그들은 막부에 대한 동향 탐지, 일본인 개화 등을 이유로 17-18세기에 집중적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조선통신사는 막부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도대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제임스 루이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일본 막부정권이 당시 농업생산량의 3-12%에 이르는 막대한 재화를 통신사 접대비로 썼고, 이로 인한 조세 증가와 노역으로 민란이 발생할 정도로 불만이 폭주했다고 주장했다.

루이스 교수는 31일 '17-19세기 동아시아 지식정보의 유통과 네트워크'를 주제로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문명의 가격 17-19세기 조선의 일본사절의 역할과 비용'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일본의 각 지방정부와 막부정권은 조선통신사 접대를 위해 "도로 정비, 도로 건설과 청소, 교각 정비와 건설, 휴게소 건설 등을 하고 심지어는 야외 화장실을 건설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는 1655년에는 100만석, 1682년에는 300만석의 쌀을 조선 사절단을 위해 사용했다는 보고서가 있는데 이를 1697년 일본 쌀 총생산량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전체 농업생산량의 약 3.2-11.8%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이어 "17세기 일본 국부의 최소한 3% 이상이 통신사를 접대하는데 사용했고, 18세기에 이 비용은 더 증가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같은 막대한 비용은 자연스레 국민에 대한 조세 부과로 이어졌고, 이는 일본 민초들의 불만을 자극했다.

루이스 교수는 막부가 조선 사절단이 지나가는 경로의 마을에 특별세를 부과하고 많게는 노역에 수만 명을 동원했다며 통신사가 온 1764년에 20만 명의 농민이 조세 감면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민란에도 통신사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통신사에 대한 엄청난 지출은 막부로서도 부담이 됐다. 루이스 교수는 "19세기에 이르러서, (통신사 접대) 비용은 파괴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조선의 통신사는 중지됐다"고 말했다. 막부가 발전된 문명국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기를 바랐지만 엄청난 비용 때문에 결국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는 '18-19세기 지식정보의 유통메커니즘'(진재교 성균관대), '18-19세기 조선사회 서양의학 수용양상'(신동원·카이스트), '작자의 초상 동아시아 도서사의 일단면'(오키 야스시·도쿄대) 등의 논문 발표와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부산일보> 조선통신사는 어떤 대접 받았을까?

조선통신사는 1607~1811년 200여 년간 모두 12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됐다. 일본 막부는 이 가운데 11회를 시모노세키에서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데, 1711년 8번째 통신사가 방문했던 때 '지역 제일의 진수성찬'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최고 요리를 내놓는다.

일본은 통신사 일행의 식사 때는 3사(정사, 부사, 종사관)를 직접 대접했는데 3사에 대한 요리 대접은 통신사의 배가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밤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때 제공되는 요리가 오오삼(553)선(膳). 553선은 본선, 이선, 삼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선과 이선에는 각 5가지(품)의 나물, 삼선에는 3품의 나물이 들어갔다고 한다. 초기엔 칠오삼(753)선의 요리가 있었지만, 예산 감소로 553선의 요리로 조정됐다.

753선이나 553선은 의전용 본전요리의 최고급으로 다만 예를 갖추기 위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먹지는 않고 보기만 하는 의식용 음식이었다고 한다. 손님을 접대할 때 한국에선 구첩, 칠첩, 오첩 반상이 있다면, 일본에선 다분히 의식용이긴 하지만 753선, 553선이 있는 셈이다.

조선통신사 역사관(부산 동구 범일동)은 조선 중기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가 시모노세키에서 대접받았던 요리를 재현한 '조선통신사 요리재현 모형전'을 20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는 시모노세키 종이인형 작가인 후지이 히사코(72)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지점토와 견직물을 사용해 제작했다. 견직물을 음식재료의 색으로 물들이고 실제 거북이 발이나 새우껍질을 사용하는 등 실물과 비슷하게 제작했다.

허장수 부산문화재단 국제문화교류 팀장은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대접한 최고 향응 요리인 '나가토하지관 진수성찬'을 바탕으로 553선을 재현한 모형으로 시모노세키시에서 임시로 빌려 와 전시하고 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당시 일본 음식문화와 통신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관 입구 전시장엔 도미회와 생선구이 절임 요리, 매화와 황밤설탕조림의 5품과 우엉, 무, 표고버섯, 생선 경단을 넣은 국과 밥으로 꾸며진 본선 요리부터 이선, 삼선 요리가 전시돼 있다. 또 경사스러운 인형을 장식해 요리와 함께 나오는 장식물인 '시마다이', 복숭아와 잡초, 갈대로 장식한 안주 받침대인 '오사에' 등도 볼 수 있다. 삼선 요리 중에는 왕새우, 소라, 오리(혹은 닭고기)도 눈에 띈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에도 막부의 대접은 당시 일본 재정을 압박할 정도로 융숭했다. 그 비용이 막부 1년 예산의 절반에 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막대한 예산을 들여 통신사 일행이 머무는 일본 각 지역에서는 최고의 진수성찬이 차려지게 됐다.

관련자료링크  더보기




일본에서 도망쳐 온 어 선비


1597년 3월 28일, 정경운(鄭慶雲)은 김해에 거주하던 어(魚)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일본에서 도망쳐 김해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다.

어(魚) 선비의 말에 의하면, 임진년(壬辰年) 즉,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붙잡혀 일본에 갔다가, 이때서야 비로소 도망해 오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어(魚) 선비는 당시 일본 소식을 전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국내의 병사를 징집하여 나고야[名護屋]에 모아두고,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을 하려고 독촉하였다고 한다. 이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가을에 군사를 동원하자고 청하고,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은 한여름에 쳐들어가서 보리를 베어 양식을 삼고 조선에서 파종한 벼를 김매고 북돋우면 된다는 상반된 요청한다는 것이다.

출전 : 고대일록(孤臺日錄)
저자 : 정경운(鄭慶雲)
주제 : 포로
시기 : 1597-03-28 ~
장소 : 경산남도 김해시, 일본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어(魚) 선비

관련자료링크  더보기




일본에 잡혀간 포로가 돌아오다


1601년 4월 7일,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남녀 11명과 일본 사람 한 명이 돌아왔다.

출전 : 고대일록(孤臺日錄)
저자 : 정경운(鄭慶雲)
주제 : 포로 송환
시기 : 1601-04-07 ~
장소 : 부산광역시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조선인 포로 11인

관련자료링크  더보기




왜장이 된 이이송


1604년 3월 3일, 이이송(李而松)이 일본(日本)에 생존하여, 자식 두 명을 낳고 왜장(倭將)이 되어 병사를 이끌고 출입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출전 : 고대일록(孤臺日錄)
저자 : 정경운(鄭慶雲)
주제 : 전쟁 포로
시기 : 1604-03-03 ~
장소 : 일본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이이송

관련자료링크  더보기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포로


임진왜란 시기에 전쟁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은 최대 10만 명쯤으로 추산하는데, 돌아온 인원은 7,500명 정도였다. 이들의 귀환 경로는 대개 자력으로 탈출한 경우와, 일본인의 도움으로 돌아온 경우 그리고 조선에서 파견환 회답 겸 쇄환사가 데리고 귀국한 경우 등이다. 도자기 장인으로 유명한 이삼평(李參平, ?∼1655)과 같이 돌아오지 못한 경우에는 그곳에 정착해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이이송의 경우도 그러한 경우라 여겨진다.

관련자료링크  더보기




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조선시대 군인들의 강무”

마상재(馬上才)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재주로, 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마기(馬伎),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또는 말광대, 말놀음 같이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이들 용어 가운데 훈련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는 무마(舞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용어는 기수가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여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마상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붙여진 명칭으로 민간에서는 주로 마기(馬伎)라 불렀다. 하지만 마기가 아니라 희마(戱馬)가 옳다는 주장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희마가 옳은 표현으로 보인다.
마상재는 기마술의 일종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별도로 때를 가리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후기에 들어와 마상재가 관무재라는 무예 시험의 종목으로 시행되면서 봄과 가을에 주로 많이 행해졌다.
마상재에는 키가 크고 빛깔이 좋으며 훈련이 잘된 말을 골라서 썼으며, 암말보다도 수말이 적당하다고 했다. 특히 부루말(흰말)을 높이 쳤으며, 가라말(검정말) 중에도 네 발굽이 흰 것은 무방하게 여겼다. 이러한 말에 온갖 치레를 갖추었으며 마상재를 하는 사람은 전립 또는 투구를 썼다. 옷은 민소매로 만들어진 붉고 노란 호의(더그레)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었으며 목화나 짚신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말을 탔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 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한 조선의 인삼”

인삼은 5~6세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에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이 1,000근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조선은 금과 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나, 세종대에 금과 은의 조공을 중단하고 그 대신 인삼을 조공하기도 했다. 명 말기부터 중국인들의 인삼수요는 더욱 커졌다. 조선은 사신단의 조공품목 뿐만 아니라 무역품목으로도 인삼을 가지고 갔는데, 경비가 떨어지면 인삼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인삼은 귀한 물품이었고, 명나라 사행단이 지나가는 곳의 중국 관리들은 의례히 예단을 받았는데 요동 도사 왕소훈이 예단을 돌려보낸 이유를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한 것이라고 짐작할 만큼 중국에선 조선의 인삼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인삼의 수요가 또 다시 급증한 것은 청조 말기인데, 당시 아편중독에 인삼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841년 조선에서 수입하는 홍삼의 수출량은 2만 근이었는데, 1847년엔 2배인 4만 근까지 급증하기도 했다.

“포로 쇄환”

조선은 일본에 3차례의 회답 겸쇄환사를 파견하였다. 1607년 외교가 재개된 첫 번째 사절에게 일본은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쓰시마와 막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이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많은 피로인들이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미 귀국을 거부하고 일본에 정착하려는 포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1617년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사신들에게는 막부나 쓰시마와의 교섭 외에 피로인에게 귀국의 정당성을 알리며 설득하는 과제가 늘어난 것이다. 쇄환을 위해 데려온 포로가 다시 돌아가 버리거나 따라왔다가도 마음이 변해 가버리는 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피로인은 설득의 대상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할 조선인이었다. 1624년 회답 겸쇄환사에게는 자발적으로 돌아가겠다고 찾아오는 피로인들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 이미 세대가 바뀌어 완전히 일본 습성에 젖은 포로들이 등장했다. 1636년과 1634년에도 극소수의 쇄환이 있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인 포로의 쇄환은 1624년으로 막을 내렸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