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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요소마다 깃드는 장인의 솜씨


건물을 짓거나 수리하는 일 외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전문적으로 제작을 담당하는 장인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장인이라 함은 정교한 세공품을 만드는 사람만이 아닌 나무와 돌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까지 모두 포함한다. 금난수는 1575년에 백운재궁(白雲齋宮)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은 일종의 사당이었다. 금난수는 목수 잇손(㗡孫)을 불러 건물을 짓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건물의 틀이 갖춰지는 데는 꼬박 반년이 걸렸다. 9월에 시작한 목조 공사는 다음 해 3월에서야 마무리되어 비로소 기와를 얹을 수 있게 되었다.

비단 큰 건물을 짓는 일뿐 아니라 목수는 작은 가구를 만드는 일도 담당하였다. 이러한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소목장(小木匠)이라 한다. 금난수는 책 상자 3개를 만드는 일을 소목장 무로지(無老只)에게 맡겼다. 나무를 다루는 일 외에도 돌을 다룰 일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벼랑을 깎아 논에 물을 대는 봇도랑을 만드는 일 등이었다. 금난수는 왕모산의 월란대(月瀾臺) 아래 벼랑에 봇도랑을 내도록 석공에게 지시하였다. 이 도랑으로 흐르는 물은 의인(현 도산면 의촌리)에 새로 장만할 논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손재주 좋은 장인들의 솜씨는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해 주고 가뭄에도 논이 마르지 않게 하여 농지를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출전 : 성재일기(惺齋日記)
저자 : 금난수(琴蘭秀)
주제 : 미분류
시기 : 1575-09-12 ~ 1578-11-04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금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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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 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 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의국 사람을 불러 약을 조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2-05-11 ~ 1642-05-13~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광계의 약에 대한 관심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약장수가 오면 귀한 약재를 받아놓기도 했다.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환약을 만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조제법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642년 5월 11일, 김광계는 이날 몸이 아파서 일과를 접고 쉬었다. 하던 일을 하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찜찜하였는데, 이게 모두 건강 때문이다 싶었는지, 결국 안동 읍내에 있는 의국(醫局)에서 막숙(莫叔)을 불러와서 자음지황환(滋陰地黃丸)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자음지황환은 숙지황환(熟地黃丸)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혈과 신허(腎虛)로 눈앞이 아찔하며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약이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약이 아닌지 막숙은 여러 날 김광계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김광계가 글을 읽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 막숙은 자음지황환 2첩을 조제하고, 추가로 소풍산(消風散) 15첩을 조제하였다. 소풍산은 풍간(風癎)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인데, 풍간은 간질이나 뇌혈관장애 후유증의 일종이다. 김광계가 조제하라고 한 두 약이 치료하는 병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가 허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것인데, 김광계가 스스로 허약해졌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업은 그 다음날인 5월 13일 오후에서야 겨우 끝났고, 마침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국 사람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가뭄, 비를 기다리는 버드나무와 눈먼 무당의 기우제”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6-01-01 ~ 1786-01-06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었던 조선에서는 홍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국가 운영의 가장 큰 변수였다. 1614년 봄에도 가뭄은 찾아왔다. 기다리는 봄비는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고, 가뭄이 너무 심하여 보리와 밀이 타들어 갔다.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농사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기우제를 연달아 지냈다. 눈이 먼 무당이 북을 두드리고 꽹과리를 쳤고, 방방곡곡 집집마다 향을 피우고 버드나무를 꽂아두게 하였다.

4월 4일, 드디어 비가 내려 모두가 기뻐하였다. 빗줄기가 마치 삼대 같았다. 그러나 비는 오랫동안, 고루 내리지 않았고, 닷새 후 방방곡곡엔 다시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다시 향을 사르며 버드나무를 꽂고, 아이와 눈먼 무당이 서교(西郊)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철 장인이 수리용 쇠못을 만들어주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6-01-01 ~ 1596-01-05

1626년 7월 15일, 을유. 맑음. 권별은 한익길의 집에 갔다가 곧바로 쇠못을 보고 오후에 올라왔다. 초간에 갔다가 해가 진 후에 돌아왔다.

1626년 7월 25일, 을미. 맑음. 권별은 귀래곡 철장(鐵匠)의 집에 가서 못 90여 개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초간에 갔다. 밤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6일, 병신. 맑음. 서까래가 부족하여 수심에 가서 서까래 네 바리를 얻어 와서 곧바로 초간(草澗)으로 갔다. 임이섭이 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8일, 무술. 초간에 갔다. 목수 진상이 와서 어제부터 연못의 방죽을 고쳐서 쌓고 있다. 여균·이망이 와서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일, 임인. 맑음. 초간에 가서 제방 고치는 일을 마치고 물을 끌어댔다. 달보·경보·원백·여유가 와서 보고 갔다.

“기와장이가 닷새에 걸쳐 새 지붕을 덮다”

미상, 봉강영당이건일기, 1862-06-03

1862년 6월 3일, 기와장이[瓦匠]에게 지붕을 덮게 했는데, 이 일을 5일만에 마쳤다. 마친 날이 1862년 6월 3일이다.

“한 달에 걸쳐 사당 건물에 단청을 입히다”

미상, 봉강영당영건일기, 1866-05-01

1806년 4월 2일에 화공승(畵工僧) 2명을 시켜서 단청을 하기 시작했는데, 전후로 30여 일이 지나서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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