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긴 해 탓에 아직 어두워지지도 않은 저녁, 예안(지금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 사는 선비 김택룡金澤龍(操省堂, 1547~1627)은 지역에서 발생한 돌림병으로 인해 근심에 빠져 있었다. 예안 고을 곳곳에서 돌림병이 창궐하고 있는데,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고을 전체에 대한 걱정이야 선비의 당여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다른 사람의 일이려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두워져 가는 저녁, 먼 친척이자 고을 사람 정희생이 갑자기 김택룡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정희생은 막아서는 노비를 제치면서 김택룡을 불러대기 시작했고, 그날 저녁 난동의 시작이었다.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구해달라고 했다가, 마당에 주저앉아 펑펑 울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도 했다. 울부짖으면서 어머니를 구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난동을 겨우 뜯어 멀리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만저만 참담한 일이 아니었다. 정희생의 집에도 돌림병이 돌았고, 어머니는 현재 위급한 처지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돌림병이 돌자 모두가 정희생을 외면했고, 어디 가서 약 한 첩 제대로 구할 수도 없는 지경에 처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죽음을 기다리자니 공포와 두려움이 치밀어 올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을의 최고 어른 중에 한 분이면서 그나마 먼 친척뻘이 되니, 김택룡이 무슨 대책을 세워 주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다짜고짜 뛰어든 것이다. 방법을 마련해 보자는 말로 위로하고 겨우 돌려보낸 김택룡은 상황을 이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책을 채 세우기도 전에 참담한 소식이 들려왔다. 정희생이 다녀간 다음 날 그의 어머니가 밤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에 아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모성애가 더해져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정희생은 아예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유난히 효성이 지극했던 정희생에게 어머니의 자살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김택룡 역시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지만, 이제 더 큰 문제는 어제 그 난동을 부린 정희생과 함께 장례를 비롯한 여러 문제를 수습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희생의 광란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렇다고 비록 자살이기는 하지만 돌림병에 걸린 어머니의 시신을 저렇게 놓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택룡은 우선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자신의 친척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을의 문제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과 논의를 통해 우선 정희생을 묶어 꼼짝하지 못하게 한 후 염을 하고 입관 절차를 밟기로 했다. 돌림병이 걸린 시신은 불에 태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다행스럽게 마을 사람들은 정상적인 장례절차에 찬성해주었다. 돌림병의 위험성은 알지만, 정희생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아는 이들로는 차마 불태우자는 논의를 하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정희생도 큰 광란 없이 순조롭게 장례절차를 진행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돌림병은 전쟁보다 더 무서웠다. 지금과 같은 현대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 전염병은 전쟁보다 더 강한 살상력을 가졌다. 특히 엄습하는 돌림병의 공포는 전투를 앞둔 병사의 공포보다도 더 컸다. 이 때문에 돌림병이 창궐하고 민심이 무너지면서 공포가 들이닥치면, 인정도 동정심도 뒷전일 수밖에 없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었으며, 스스로 병이 옮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그래서 뒷전일 수밖에 없다. 김택룡이 정희생의 먼 친척뻘이었고, 마을의 어른이었음에도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했던 이유이다. 돌림병이 발생하면 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떠나는 것처럼 피접을 가는 경우도 늘 발생했다.
399년이 지난 작년 2015년 6월, 대한민국은 신종 돌림병인 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에 휩싸였다.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렸고, 또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죽었다. 특히 이 병은 주로 병을 치료해 주던 병원에서 걸렸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전염병의 공포로 인해 아파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의 장례에도 참여하지 않고, 병이 옮았다고 소문난 병원에 다녀온 사람과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접촉도 꺼렸다. 근 400년이나 지나 현대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을 막지 못했던 이유는 차치하고, 그러한 상황이 되면서 전염병에 대한 인식 역시 한치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당시 중동호흡기증후군에 휩싸인 대한민국은 죽은 정희생의 어머니보다 더 많은 제2의 정희생을 양산했다. 중동호흡기증후군이 의심되어 병원에서 격리치료를 받았던 사람들은 이유 없는 주홍글자에 당황해야 했고, 이해할 수 없는 사회의 시선에 상처를 받아야 했다. 병에 걸렸다가 치료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 이후 사회적인 소외의 시선으로 인해 다시 정신적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무리 의학이 발전해도 죽음에 대한 공포의 강도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격리치료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주홍글자를 가슴에 새긴 사람들을 양산하고, 제2, 제3의 정희생을 만들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400년이 지난 올해도 지카바이러스로 인해 한국에서마저 불안해하고 있으며, 비약적으로 높아진 한반도의 온도로 인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염병의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인류는 사람과의 전쟁보다 돌림병과의 전쟁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 돌림병은 인적 희생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인정마저 파괴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재앙보다 무서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돌림병 그 자체는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공포와 인성의 파괴는 어찌 보면 극복 가능한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만들어진 공포와 파괴된 인성의 치료가 진정한 돌림병 치료의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공포와 파괴된 인성만 없다면 돌림병도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년 7월 17일 맑음.
저녁에 정희생鄭喜生이 발광하여 우리 집으로 뛰어들어 난동을 부렸다. 온 집안이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겨우 달래서 돌려보냈다. 그 집안에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여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상대를 해주지 않아 이런 뜻밖의 일을 저지른 것이다. 놀라서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1616년 7월 18일 맑음.
정희생이 또 바깥에 와서 들어오지 않고 바로 돌아갔다. 밤에 그의 어머니가 밤나무에서 목을 매 죽었다. 참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1616년 7월 19일 맑음.
아침에 정희생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랐다. 심씨 일가의 여러 사람들을 역정櫟亭에 모이게 해 상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의논했다. 정희생이 지난번처럼 크게 광란하면 범접할 수가 없다. 모두 등 뒤로 단단히 묶어 두고 나서야 일을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인 아재가 왔다가 상렴喪殮할 일에 대해 의논하고 갔다.
1616년 7월 20일 맑음 .
심운해 등이 정희생을 묶어 결박했다고 한다.
1616년 7월 21일 맑음 .
정희생은 묶어 두었더니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정희생의 어머니를 입관하고 염했다고 한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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