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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꿋꿋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실천하다,
송월재(松月齋)

코로나19 시대 비대면 원격수업이 보편화되면서 학습의 트렌드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교육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 활성화 되었다면 오늘날은 자기주도적 학습에 대한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기주도적 학습은 학생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참여하며 익히는 과정을 통해 자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학생들의 창의력 향상과 공부의 흥미로 연계되어 학습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공부법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실천했던 공부 방법은 무엇일까요? 선비들은 일찍부터 자기주도적 학습을 실천했습니다. 독서를 통해 학문의 이해를 넓히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스승을 직접 찾거나 편지를 써서 답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서원 또는 가정에서 하는 교육도 있으나 서적의 습득이 쉽지 않았던 터라 스스로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없으면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것이 옛 선비들의 공부법이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선인의 일화를 통해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는 편액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송월재(松月齋) 이시선(李時善, 1625~1715)의 호인 ‘송월재’ 편액은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에 걸려있습니다. ‘송월재’는 ‘늘 푸른 소나무와 일정하게 밝은 달을 나의 행실로 삼아 살아가는 동안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겠다’는 선비의 양심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이시선은 한평생 학문적 세태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열어갔던 인물입니다.

선비의 자기주도형 공부법이라는 주제를 맞이하여 자득(自得)의 학문을 실천한 송월재 이시선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가진 선비이자 그의 아버지,
추만(秋巒) 이영기(李榮基)



추만 이영기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영모당(永慕堂)(경북문화재자료 제446호)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합니다. 아이의 인성과 도덕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입니다. 송월재 이시선의 아버지인 추만(秋巒) 이영기(李榮基, 1583∼1661)는 어떠한 인물일까요?

그는 어려서 역병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여러 험난한 일을 겪었습니다. 어린 그를 거둔 이모 황씨는 죽다 살아나다시피 한 그가 가여워 학문을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귀에 새기고 마음으로 기억하며 끝내 훌륭한 학문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매우 소박하고 후덕했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그의 덕에 좋은 영향을 받아 마음으로 따르며 그를 비난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당시 태백오현[(太白五賢: 홍석(洪錫), 홍우정(洪宇定), 정양(鄭瀁), 강흡(姜恰), 심장세(沈長世)]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던 홍우정은 가벼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덕스러운 이영기에게만은 마음을 터놓고 지냈습니다. 혹 그 집 앞을 지나게 되면 문득 들러 며칠씩 묵어가곤 하였습니다.

그는 집안사람들에게는 엄격하였고 조상을 모시는 데는 삼가고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친척들을 힘껏 돌보았고, 곤궁하고 가난한 사람들 또한 구제하는데 아낌이 없었습니다. 그 드러나지 않는 공과 덕은 말없고 자취 없는 가운데에서도 점차 익어갔습니다. 노비들에게도 너그럽고 은혜로웠으며, 비록 개미와 같은 작은 벌레들조차 차마 상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그의 잘못을 말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저 웃기만 할 뿐, 변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추만 이영기가 후학들을 양성했던 사덕정(俟德亭)(경북문화재자료 제249호)


이러한 그는 좋은 성품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때 의병참모가 되어 활약하였고, 사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었습니다.

추만 이영기는 성품이 어질었으며,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심에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며 삶을 지냈습니다. 이는 자손들이 좋은 인품을 갖출 수 있는 요인이 되어 또 다른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가는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학문을 스스로 탐색하며 연구하다,
송월재(松月齋) 이시선(李時善)



이시선의 서재이던 송월재(松月齋)


이시선은 자득(自得)으로 학문을 연구한 인물입니다. 이시선의 둘째 형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게 『논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아우가 스승 없이 공부하는 것이 걱정되어 몇 대목을 뽑아 그 깊은 뜻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시선이 하나도 막힘이 없이 대답하자 감탄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타고난 지혜가 있었던 데다 학문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였습니다. 그는 글을 읽을 때 표주박을 옆에 두고 글을 한 번 읽을 때마다 콩 한 알씩을 표주박 속에 던져서 그것이 다 차야만 글 읽기를 마쳤습니다. 어느 글은 만 번을 넘게 읽는 것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또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에게 알아줌을 구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선언할 정도로 스스로 학문을 판단하고 탐구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뚜렷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사서(四書)·육경(六經) 등 성리학, 제자백가 등에 대해 통달했습니다.

또한 그는 도전정신이 강하여 직접 눈으로 보고 세상을 이해하려 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온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기를 즐겼습니다. 그는 가까이는 청량산, 태백산, 소백산, 좀 멀리는 주왕산, 금오산, 속리산, 가야산, 아주 멀리는 삼각산, 금강산, 구월산, 지리산, 등을 비롯한 명산대천과 동남쪽 바닷가 절경을 두루 답사하였고, 평양, 경주, 개성 등 옛 사적의 자취를 일일이 밟았습니다. 이는 그가 비록 뜻을 세상에 펼치지는 못했지만 가슴 속에 큰 포부를 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아래는 이시선이 가야산에서 머물며 기록한 내용입니다.


가야산에서 신비한 불상(佛像)의 이야기를 듣다
「유가야산기(遊伽倻山記)」, 이시선  더보기


가야산 정상에서 인간의 욕심에 대해 생각하다
「유가야산기(遊伽倻山記)」, 이시선  더보기


그는 일생동안 벼슬을 탐하지 않고 만년에 송월재라는 3칸짜리 작은 서재를 짓고는 책상 하나만을 들여 놓은 채 독서에 전념했습니다. “과거공부는 남자가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아니니 과거를 위한 공부는 그만두라.”고 가르친 아버지의 말씀대로 정치 다툼을 숙명으로 하는 벼슬길은 대장부가 취할 길이 못된다고 하여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했습니다. 그런 그의 이름이 후대에까지 전해진 것은 그의 독특하고 탁월한 학문과 뛰어난 행실이 당시 정치를 주도한 양반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절구(絶句)


청산은 예닐곱 길靑山六七丈
초가 두세 칸白屋二三間
그 가운데 한 선비 있어中有一迂士
평생토록 글 짓고 또 지우네平生述與刪


송월재에는 그의 삶을 가식 없이 그리며 학문의 즐거움을 노래한 「절구」가 걸려있습니다. 당시 그의 학문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시선은 늘 제자들에게 “선비의 행실은 ‘마음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불괴심(不愧心)’ 3자에 지나지 않는다[士之爲行, 不過不愧心三字]”고 말하여, 선비의 양심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공부법으로 표주박에 콩을 채워가며 서적이 이해가 될 때까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실천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배움은 끝이 없으니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려는 마음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꿋꿋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실천하다, 송월재(松月齋)



송월재(松月齋)


송월재(松月齋)는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송월재 이시선이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전리에 건립한 서재의 편액입니다.

‘송월’은 이시선의 호로, 모든 식물이 시들어버린 뒤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松]의 늘 푸른 절개와 기울었다 찼다를 반복하는 한결같은 달[月]의 의미를 취해 지었습니다. 이시선은 「송월자전(松月子傳)」에서 “소나무는 굳센 절개를 지녀 자기가 지키는 바를 바꾸지 않음을 표창하니, 이는 절개를 고집하는 방도다.[彰厥勁節 不移其所守 是固執之道也] 달이 그믐과 초하루, 차고 이지러짐의 변역에도 그 노정을 결코 잃지 않으니, 이는 시중의 도다.[晦朔盈缺變易 不失其程 是時中之道也]”라고 하여, 늘 푸른 소나무와 일정하게 밝은 달을 나의 행실로 삼아 살아가는 동안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겠다는 선비의 양심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시선은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추구하는 인재였습니다. 그는 스승이 없이 스스로 학문을 하였지만 꿋꿋한 절개와 한결같은 행실의 뜻인 ‘송월’의 의미를 실천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같은 사물이나 현상 등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고 생각해 새로운 결과물을 도출하는 창의적 사고는 오늘날에 가장 필요한 단어입니다.

조선시대는 요즘처럼 교육시설이 대중화되지 않아 본인의 열정과 노력이 없으면 공부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는 본인이 주체가 되어 학문과정을 스스로 이끌어 나가야만 지속적인 공부가 가능할 것입니다. 송월재 이시선은 학문적 스승이 없음에도 자신의 노력으로 공부하여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책을 만번 읽었던 표주박 이야기, 여러 지역을 유람했던 것은 그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융·복합 지식시대에 필요한 창의적 인재에 발맞추기 위해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세상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인문학에 주목하고 대학에 융합전공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융·복합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시선의 이야기는 창의적인 공부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      리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유교넷(http://www.ugyo.net)
전통과 기록(http://portal.ugyo.net)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
한국의 편액(http://pyeonaek.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2017년 정기기획전도록 - 선비, 공부를 말하다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퇴계학 자료총서 해제(제5차분):
이도현 저, 『계촌집』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문집해제: 『송월재집』
“꿈으로 공부를 완성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5-09 ~ 1616-05-14
1616년 5월 9일, 장흥효의 성리학 공부는 꿈속에서 완성되었다. 아무리 논어와 맹자를 들여다보아도, 이황과 김성일, 정구와 같은 선현들의 글을 들여다보아도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는 공부하는 내내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파헤쳐 보았지만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문제는 선현들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이미 그들은 고인이 된지 오래되었으므로 남아 있는 선현들의 글 속에서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흥효에게는 자신만의 독특한 공부 방법이 있었다. 바로 꿈이었다.
하루는 꿈에 학봉 김성일 선생께서 나오셔서 집에서 도(道)를 강론하셨다. 이틀 뒤에는 꿈속에 한강 정구 선생님을 모시고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캤다. 다음날에는 꿈속에 북송시대 유명한 유학자였던 소순이 나타나 집 근처의 상이 나서 하관하는데 호상(護喪)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연일 세 번이나 꿈속에 나타난 선현들을 보고 자신의 공부가 미진한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한강 정구 선생께서 몸소 약초를 캐서 자신에게 보여준 것은 장흥효 자신의 마음속 병을 고치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래서 장흥효는 삼가 충(忠)과 서(恕) 두 글자로 마음을 치료하는 약방(藥方)으로 삼고 이 마음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면서 성현께서 타일러 주신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하였다.

“오늘 공부한 내용이 꿈에 나오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7-02-20 ~

1617년 2월 20일, 장흥효는 마을 친구들과 더불어 『논어』의 이인 편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라고 하니 증자가 말하기를, “예”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하나의 도로 만 가지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친구들과의 『논어』 강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꿈에 류성룡 선생이 나타나셨다. 선생께서 당에 앉아 있는데 그는 띠와 주머니를 드리며 예를 갖추자 선생께서 앉으라고 청하셨다. 선생께서는 장흥효가 낮에 공부했던 일을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천하의 일을 어찌 감당하셨던가.” 장흥효가 이해하지 못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러자 장흥효가 궁금했던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선생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장흥효가 생각한 바를 말하도록 했다. 그는 “하늘은 하나일 뿐인데 무슨 번거로움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생께서는 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예전에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셨다.
장흥효는 그제야 공자가 말한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즉 기로 말하자면 만 가지 변화가 한결같지 않을 수 있지만 이로 말하자면 굳이 그러한 번거로움 자체가 불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꿈속 선생의 말씀을 통해 공자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용혹문을 외우고 다시 중용을 외우다”

남붕, 해주일록,
1922-05-15(윤) ~ 1922-05-19

남붕은 아침마다 어머님께 문안을 드리고 사당을 배알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1922년 윤5월 15일, 이날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마친 남붕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어머님께 문안을 올리고 사당에 배알을 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마을 안에 있는 선조의 사당에도 찾아다니며 두루 배알하였다.
집에 돌아 온 남붕은 책부터 펼쳤다. 아침에 어머님께 문안인사를 올리고 사당을 배알한 후에 책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 지고 머리가 맑아 글이 더욱 잘 외워지기 때문에 이미 오래된 습관이 되었고, 게다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아이들이 공부를 하러 오기 때문에 이 시간은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요즘 남붕은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외우고 있다. 이젠 꽤 많이 외웠기 때문에 며칠 내에 책을 뗄 작정으로 집중하여 외웠다.
아이들을 가르친 후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엔 『심경心經』을 읽었는데 내용이 친절함을 자못 깨달았다. 밤에는 온 집안사람들을 가르치고 훈계하였다.
사흘 뒤에 드디어 『중용혹문』 외우기를 마친 남붕은 며칠 전 읽었던 『심경』이 떠올랐다. 과연 이렇게 부지런히 읽고 음미하며 체득한 학문을 한결같이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이날 밤엔 『중용』을 외우기 시작했다.
5월 19일(윤) 아침 일찍 어머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배알을 한 남붕은 전날부터 외우기 시작한『중용』을 다시 펼쳤다. 아침을 먹기 전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고 하루 종일 집안일과 마을 일을 돌본 후에 저녁에 집에 돌아왔다. 밤에 다시『중용』을 외웠다.

“아들이 공부할 책을 직접 쓰다”

금난수, 성재일기,
1585-06-04 ~ 1585-08-12

금난수는 막내아들 금각을 유별나게 아꼈다. 금각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이미 7살에 『논어』를 읽었다. 그 뒤로도 형들을 따라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기특한 아이였다. 금난수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하루에 책 10장씩을 암기하도록 하였는데, 일견 가혹한 처사인 것 같지만 금각은 책을 곧잘 외우곤 하였다. 금난수는 그런 막내아들을 무척 귀여워하여 임지에도 데려가 여러 어른들에게 인사시켰고, 금각의 총명함을 특별하게 여긴 주위 어른들은 금각이 읽을 책을 직접 구해다 주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금난수는 임지에 금각을 데리고 갔다. 이번에는 『강목(綱目)』, 즉 주희가 지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아들이 읽도록 할 참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었으니 이제는 좀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은 공부를 하는데 자신이 노는 것도 교육에 좋지 않겠다고 여겼는지 금난수는 『강목』을 날마다 7장에서 10장씩 베껴 쓰기로 하였다. 금각은 아버지의 결심을 듣고 자신은 매일 『강목』을 15장에서 17장씩 외우겠다고 하였다. 두 부자의 굳은 약조는 일단 순조롭게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금난수는 약속한 날로부터 보름쯤 지난 6월 12일까지 『강목』 1권을 베껴 썼다. 또 12일이 지난 24일에는 2권을 베껴 써서 아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는 손님도 많고 제사도 있어서 다음 책을 베껴 쓸 때까지는 조금 더 기일이 소요되었다. 금난수가 『강목』 필사를 끝낸 것은 8월 12일이었다. 공무로 바빴기 때문에 아들의 공부를 매일 봐 주지는 못하였지만 아버지가 바쁜 와중에도 매일 조금씩 필사해 나간 『강목』을 읽으며 금각은 아버지의 사랑을 물씬 느꼈을 것이다.

“책을 널어 말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7-05-25 ~ 1607-05-27

1607년 5월 25일, 요 며칠 날씨가 계속 맑았다. 김광계는 오전에 기제사를 지낸 후에 방으로 들어가 방안 곳곳에 있던 서책을 모두 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책 말리기를 하려는 것이다. 꺼내 온 책을 마루며 마당이며 곳곳에 펴서 널어놓기 시작하는데 덕유(김광업) 형이 와서 찾아 왔다. 덕유는 김광계가 펼쳐 놓은 책을 간간히 넘겨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이틀 뒤에는 집에 있는 옛날 책을 모두 점검하였다.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라 얼룩이 지거나 벌레를 먹은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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