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지 않은 지 벌써 오래라, 망허촌 사또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봄철에서 여름철로 넘어가는 이때는 춘궁기라 불린다. 가을에 수확한 쌀이 똑 떨어지고 겨울에 파종한 보리는 아직 수확할 수 없는 때인지라 이 시기를 넘기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는 연이은 기근과 양반, 탐관오리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19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출처: ㈜ 쇼박스)
목금이도 눈치가 좀 보이긴 했지만 점심, 저녁을 백이네 집에 죽치고 앉아서 먹어치우곤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은 굶고 나오는 것이니 사실상 하루 끼니를 모두 백이에게 의지하는 셈이었다. 물론 망허촌에서 제일 큰 집인 정 진사네 입장에서 여자아이 입 하나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날이 이렇게 가무니, 보리농사 다 망할까봐 다들 혀가 바짝 타고 있다더라.”
목금이 바깥소식을 백이에게 전했다.
“관에서 환곡은 아직이라니?”
“환곡은 벌써 지난달에 다 풀었지. 그나마 그거라도 있어서 미음이라도 먹었다는 집들이 태반이야.”
백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을되면 환곡이 그렇게 무섭다는데, 다들 아무 생각도 없는 건지 그걸 다 받아먹었구나.”
“그런 게 아니지. 지금 안 먹으면 가을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먹은 것뿐이야.”
백이의 얼굴도 그 말에 심각해졌다. 두 소녀는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015년, 극심한 가뭄에 안동 와룡면 지리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출처: 영남투데이)
“비라도 오면 마음이 좀 편해질 텐데.”
“참, 목금아, 사또 나리가 기우제를 지낸다는 말이 있던데, 그래도 소용없나 보지?”
목금이는 괜히 얼굴을 붉혔다.
“몰라. 사또 나리가 뭐 하시는지는.”
그때였다. 밖에서 삼월이가 말했다.
“목금 낭자, 주인마님이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널 왜 찾는 거지?”
찾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식객 처지에 주인이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목금은 냉큼 사랑채로 달려갔다. 백이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목금과 함께 갔다.
“부르셨습니까?”
섬돌 아래서 인사를 올리니 정 진사가 사랑채 문을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었다.
“그래, 왔느냐? 이리 올라오너라.”
두 소녀가 자리를 잡자 정 진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뭄이 극심하여 참으로 걱정이 크구나.”
목금이 대답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런 가뭄은 본 적이 없다고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올해 드디어 목화를 수확할 해가 되었다고 연초에 기대가 많았는데, 이래서야 목화가 열리기나 할지 걱정이구나.”
목화는 물을 많이 필요로 한다. 지독한 가뭄으로 물이 말라버렸으니 목화가 열릴지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목화보다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들도 다들 기진맥진해서 축 늘어져 있는 실정입니다.”
“환곡이 더 나올 가능성도 없는 것 같고. 사또는 철 모르고 기우제나 올린다고 산속을 돌아다니기만 하니… 쯧쯧쯧.”
그러다 정 진사는 문득 정색을 하고 목금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수고해 줄 일이 있다. 하필 지금 마름이 배탈이 나서 꼼짝 못 하고 있구나. 우리 소작인들이랑 외거노비의 형편이 어떤지 좀 살펴보고 와 다오.”
백이가 이의를 제기했다.
“아버님, 그거라면 돌쇠를 시키시면 되지 않아요?”
“돌쇠는 글을 모르잖아. 집집 사정을 적어 올 수가 없어서 안 된다. 돌쇠는 목금이랑 같이 다니라고 할 생각이다.”
목금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들 형편이 어려우니 제가 빨리 알아보고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너만 믿겠다. 형편이 너무 어려운 집은 어떻게든 도와야겠지. 그러니 잘 살펴보고 와다오. 옛날 영조 대왕께서 계비 간택 때 후보 아기씨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가 무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다들 여러 고개 이름을 댔는데, 정순왕후께서 보릿고개라 답하셨단다. 사람들이 넘기 제일 어려운 고개가 보리가 미처 여물지 않은 바로 이때라는 이야기지.”
“당부 명심하겠습니다.”
〈「사창절목(社倉節目)」. 사창은 조선시대 각 촌락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마을 사람들 상황은 정 진사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목금이가 보고한 것에 따라 정 진사는 곡식 창고를 열어 소작인들에게 곡물을 풀었다. 정 진사가 이렇게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김 생원도 따라 해야만 했다. 사또는 두 가문의 선행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고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까지 했다.
물론 공짜로 푼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자는 받지 않고 가을 추수 후에 내준 것만 받기로 했다.
“아버지, 이렇게 하다가 우리도 굶는 거 아니에요?”
백이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투정하자, 정 진사는 엄한 얼굴로 답했다.
“소작인들이 없어지면 농사는 누가 짓는단 말이냐? 당장 눈앞의 이익만 보고 행동했다간 큰 낭패를 보게 마련이다.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세상이니 그런 말은 농으로라도 해서는 안 된다.”
공연히 농담 한마디 했다가 야단맞은 백이는 시무룩해져서 홀로 집을 나왔다. 목금이나 보러 가려고 생각하고 세책방으로 가는데, 문득 등허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불돌이가 따라왔나?”
불돌이는 영물 양수지조(陽燧之鳥)로 불길을 끌고 다닌다. 백이네 구들장 밑에서 살고 있었다.
“아니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불돌이는 뭔가 편안하게 따스한 불기운을 보내는데, 지금 느껴지는 것은 화상이라도 입힐 듯이 따가운 느낌이었다.
“위험해!”
목금이 달려오며 외쳤다.
“몸 숙여!”
목금의 말에 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땅바닥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머리 위로 뜨거운 불길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뭐, 뭐야?”
〈《운룡도(雲龍圖)》. 용 그림은 비를 내리게 한다는 믿음으로 기우제에 자주 사용되었다.〉
(출처: 갤러리조선민화)
“강철[罡鐵]이야.”
헉헉대며 달려온 목금이 백이를 부둥켜안으며 가쁜 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강철?”
“사람에 따라서는 용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무기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괴물이야. 강철이 나타나면 연못이고 강이고 다 말라버리고 온갖 재해가 일어난다고 해. 오죽하면 강철이 지나가면 가을도 봄이 되어버린다고 할 정도야. 가을 추수할 게 하나도 남지 않아 씨도 뿌리기 전처럼 되어버린단 이야기지.”
“어쩌냐? 그럼 빨리 내쫓아야지!”
“용을 무슨 수로 내쫓아?”
목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백이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이렇게 하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호랑이도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진 않아. 배가 고프니까 그러는 거잖아. 강철이 어떤 일로 화가 나서 이러는 거라면 그걸 풀어주면 되지 않을까?”
“네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러려면 먼저 강철을 만나기라도 해야…”
그때 공중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맹랑한 꼬맹이들이구나! 네까짓 것들이 내 화를 풀어보겠다고?”
얼마나 큰 소리였는지 두 소녀는 얼른 귀를 막았다. 고막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목금이 외쳤다.
“이러나저러나 얼굴 좀 보고 말하면 안 될까요?”
“좋다. 하지만 내 화를 풀지 못하면 잡아먹을 테다.”
그러더니 흙바람이 무시무시하게 일어났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커다란 황소 한 마리가 흉폭한 눈빛으로 두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이가 목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용이라더니, 소였어?”
“크하하하! 나를 뭘로 보는 거냐? 너희들과 이야기하기 편하게 소 모양을 한 것뿐이다. 그럼 이런 모양으로 말해주랴?”
빛이 번쩍하더니 황소는 땅바닥에 엎드린 괴물로 변했다. 긴 주둥이와 촘촘히 박힌 엄니, 칼도 안 꽂힐 것 같은 딱딱한 등가죽 위로는 뾰족한 돌기가 솟아있었고 커다란 꼬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목금이 입을 딱 벌렸다.
“으… 저건 악어라는 괴물이야. 책에서 그림으로 본 적은 있는데, 이렇게 눈으로 볼 줄은 몰랐네.”
다시 한번 빛이 번쩍이더니 강철은 다시 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목금이 말을 걸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크하하하! 인간 따위의 잘못으로 내가 진노했단 말이냐? 턱도 없는 소리.”
백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지 이유라도 말씀해 주세요.”
“좋다. 그다음에 너희를 아작아작 씹어서 삼켜주마. 나는 망허산 밑의 연못 망허소에서 천 년을 수련한 이무기다. 드디어 여의주를 얻게 되어 승천할 수 있었지. 그런데 올라가던 중에 망허산에 쓰러진 시체를 보고 만 거다. 호랑이에게 물어뜯긴 사람의 시체였지. 그런 흉한 것을 보고 말았으니 어찌 상서로운 승천이 가능했겠느냐? 나는 그대로 추락해서 다시 망허소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이쿠, 맙소사. 목금과 백이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사람을 죽인 호랑이들은 모두 노승 호랑이가 인도해서 멀리 떠났는데, 그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날 줄이야.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호랑이놈들은 내가 처벌하러 갈 줄 알았는지 잽싸게 내뺐더군. 그래서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게 된 거야! 알겠냐? 이 천지벌거숭이들아!”
강철은 말하다가 다시 화가 났는지 있는 대로 고함을 질렀다. 목금과 백이는 나무둥치를 붙들고 날아가지 않게 버텼다. 목금이 고함을 쳤다.
“그럼 여의주는 어떻게 되었나요?”
강철은 그 말에 약간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망허소 안에 떨어진 모양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나타나질 않아. 누군가 낼름 훔쳐 간 거지. 그래 좋다! 그걸 가져올 때까지 이 땅을 지글지글 태워주마!”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통구이가 될 뻔했다. 열기가 두 소녀를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할게요! 할 수 있어요!”
열기가 멈췄다.
“뭐라고?”
“여의주 찾아다 드릴게요.”
목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백이는 목금이 뭘 믿고 이러는지 몰라 걱정이 태산이었다.
“말미를 사흘만 주세요. 사흘 후에 망허소에서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사흘 후. 목금은 강철을 만나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여의주를 건네주었다.
“어, 어떻게 이걸…”
“물속에 떨어진 걸 연못 밑의 커다란 메기가 삼켰더라고요. 이제 찾아 드렸으니 이번엔 잘 승천하시고요. 우리 마을에 비도 내려주셔야 해요.”
“물론이다! 그러고말고.”
〈김홍도의 《벼타작》〉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다음 날, 마른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더니 시원하게 비가 쏟아졌다. 백이가 약과와 유밀과를 들고 와 목금에게 내밀었다.
“여의주는 어떻게 찾은 거야?”
목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연못 속을 훤히 아는 배씨 자매한테 부탁했지.”
배씨 자매는 억울하게 살해돼 연못 속에 버려졌는데, 목금이 그 원한을 풀어주었었다. 배씨 자매가 그 은혜를 이렇게 갚아준 것이다.
“망허소에 떨어졌다고 하는 순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와, 진짜!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이 어떻게 나니?”
“그거야 이렇게 맛있는 간식을 가져다주는 좋은 친구가 있으니까?”
백이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네 간식은 내가 평생 책임진다.”
“무르기 없다.”
“그럼, 그럼. 우린 세상에서 제일 높은 보릿고개를 같이 넘어간 사이니까.”
두 소녀가 마주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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