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어느 날,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들에 지칠 때 맥주 한 잔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그런 날엔 그냥 걷는다. 대신 고단했던 평일 끝을 단정하게 매듭짓고 토요일을 만난다. 쓰레기를 비우고 냉장고를 채우며 다가올 일주일을 챙긴다. 그리고 가족과 저녁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후 경건히 맥주와 새우깡을 준비한다. 토요일 밤, 나는 혼술을 한다.
지난 시간을 위로하고 앞날을 응원하며 내가 나에게 술 한 잔을 건넨다. 씁쓸하면서 달콤한 에일맥주가 온몸을 휘감고 나면 ‘이 하나하나에도 못됐음 못됐음’이 가득한 미운 사람이 용서된다. 《나의 해방 일지》 속 염기정 혹은 염미정이 된 나는 먹고사는 고단함을 탄산 가득한 라거 맥주와 함께 흘려보낸다. 그리고 《멜로가 체질》의 상수가 되어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한다. 그러고 나면 《눈물의 여왕》의 홍해인처럼 ‘행복한 기억들을 모으는 데 더 집중해’ 볼 힘이 생긴다.
맥주와 넷플릭스가 있는 토요일 밤, 밀물처럼 행복이 몰려오면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이라 말한 『빨간 머리 앤』의 앤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나는 앤이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초록 지붕 집’을 꿈꾸곤 했다. 정원 아래로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집 주위에는 온통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매슈와 마닐라처럼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나와 다른 삶을 살았던 이방인을 기꺼이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꿈꾸었다.
중국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은 「독산해경(讀山海經)」에서 ‘초여름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나, 집을 에워싼 나뭇가지 우거졌네. 새들도 깃들 곳 있음을 기뻐하듯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 [孟夏草木長 繞屋樹扶疎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라는 시를 남겼다. 내가 앤의 ‘초록 지붕 집’을 그렸듯, 조선 후기 오헌(吾軒)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은 도연명이 말한 ‘소박한 집’을 생각하며 세속의 부귀영화를 잊고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 즐겁게 살아가고자 했다. 만년의 그는 기거하는 곳에 ‘오헌’ 편액을 걸어 두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너무 좋아요.’라고 말한 앤처럼 우리는 자신을 반겨줄 따스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하는 집 밖의 삶에서 돌아와 무거운 한숨을 내려놓고 충만하게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집을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할 때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해진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무섬마을이 있다. 무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의 순우리말로 한자로는 수도(水島)로 표기한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물길이 마을의 삼면을 휘돌아 흐른다. 이 모습이 중국의 섬계[剡溪,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조아강(曹娥江) 상류]와 비슷하다 하여 ‘섬계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다.
〈영주 무섬마을〉 (출처: 네이버 지도)
350여 년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무섬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고 정착한 사람은 환학암(喚鶴庵) 박경안(朴景顔(1608~1671)의 아들 박수(朴檖, 1641~1709)였다. 1666년, 박수는 강 건너 서쪽에 있는 원암[遠巖, 영주시 문수면 탄산리]에서 무섬으로 옮긴 후 만죽재를 지었다.
25살의 젊은 박수가 무섬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버지 박경안의 권유 때문이라 전해진다. 무섬은 예부터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또는 매화나무가 아래로 늘어져 매화가 땅에 닿아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해서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으로 불리며 길지(吉地) 중의 길지로 뽑혀 자손에게 복(福)이 트이는 곳으로 여겼다. 길지로 이사할 생각을 한 박경안은 ‘박경안 네가 무섬에 들어가 살면 위험하다’는 꿈을 세 번 꾼 후 둘째 아들 박수에게 명당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곳, 집에도 인연이 있다.
무섬에 정착한 박수는 1남 1녀를 낳았다. 박수의 장남 박창은(朴昌殷, 1669~1742)은 선성김씨 김윤일(金允一)의 딸과 혼인했고, 박수의 딸은 선성김씨 김범석(金範錫)에게 출가했다. 박창은의 차남 박이장(朴履章)은 선성김씨 김대(金臺, 1732~1809)를 사위로 맞았는데, 그때부터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 두 집안의 집성촌이 되었다.
하얗게 펼쳐진 백사장, 잔잔하게 흐르는 내성천 건너 숲속에 환학암(喚鶴菴)이 있다. 박경안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환학암을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포근히 감싸고 있다. 외나무다리가 보이는 곳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35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만죽재 사랑채가 보인다. 만죽재는 무섬의 중심에서 무섬을 지키고 있다.
〈환학암(喚鶴菴)〉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3호, 만죽재고택(晩竹齋古宅)〉
〈만죽재(晩竹齋) 편액〉
만죽재 서쪽에 박제연의 오헌이 있다. 박제연의 호(號)이자 당호(堂號)인 오헌, 그는 평생 ‘나’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한 사람이다.
以吾觀吾吾不知吾 내 스스로 나를 보니 나는 나를 모르지만
耕吾讀吾安分是吾 내 밭 갈고 내 글 읽어 내 본분에 자족하노라
剛吾柔吾律身是吾 내 강(剛)하고 내 유(柔)하게 나는 이로 자율(自律)하고
忠吾信吾接物是吾 내 충하고 내 진실하게 나는 이로 짝하노라
進吾退吾處世是吾 내 나아가고 내 물러가며 나는 처세하는 거니
內吾外吾吾所名吾 나는 안으로 나는 밖으로 나는 ‘나’라 부르노라
박제연의 「자명(自銘)」이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나도 잘 모르지만 밭 갈고 글 읽는 것을 나의 분수로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의 「자명」을 보며 내가 나로서 우뚝 설 수 있을 때 한 가정을 온전히 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박제연의 삶을 따라가 본다.
〈자명(自銘)〉
1807년(순조 7) 12월 6일 박제연은 호조 참판 박재순(朴在純)과 안동권씨 권사선(權師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조 정랑, 봉화 현감, 사간원 사간 등을 지낸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 1764~1842)에게 수학한 박제연은 1840년(헌종 6) 34세에 문과에 급제, 승정원에서 첫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868년(고종 5)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회갑연을 축하하며 정3품 통정대부 품계에 올랐고, 병조 참지, 참의, 돈녕부 도정 등을 역임했다. 1886년(고종 23)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른 80세의 박제연은 병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 의금부사를 제수받았다.
조선 말, 박제연은 암흑시대의 문턱 앞에 서 있었다. 1875년(고종 12)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를 불법 침투했다.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공격했고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 수군을 공격했다. 그 후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 통상을 요구했다. 1876년(고종 13)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었다.
운요호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8월,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유명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박제연을 위해 ‘오헌’ 편액 글씨를 써주었다. ‘오헌’ 양옆의 여백에 오헌이 의미하는 것을 작은 초서로 써서 조형성을 더했다.
새들도 깃들 곳 있음을 기뻐하듯,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
이는 도연명의 흉금으로 사물과 내가 함께 즐거워한 것으로
혼연히 천진스러운 말이다.
무릇 자신을 아는 자는 드물지만, 자신을 온전히 하는 자는 더더욱 드문 법이다.
내가 사랑하는 바가 있는 뒤에야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를 수 있으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우리 종친 중에 그런 사람이 있도다.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
此爲陶令襟期 物吾同樂 渾然天眞語也
夫知吾者鮮矣 而全吾者爲尤鮮
吾有所愛然後 乃能從吾所好
可語此者 吾宗有其人也
〈오헌(吾軒) 편액〉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박제연은 조정에 있을 때, 박규수,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의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항상 검소한 삶을 살았던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해서는 배고픈 자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사람들과 격식 없이 어울려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거처하는 벽에 ‘충성하고 효도하며, 농사짓고 독서하자’는 ‘충효경독(忠孝耕讀)’ 네 글자를 써서 걸고 평생의 신표로 삼았다.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던 박제연은 승진에 연연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에게 사적(私的)으로 권력자를 만나 보라고 권하면, 그때마다 그는 ‘나의 푸른 수염을 보시게. 어찌 앵앵거리면서 왔다 갔다 할 사람이겠는가’라는 말로 이(利)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이란 때론 내 속내를 감추고 나를 포장하는 것일 텐데,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부하지 않았다. 50년 동안 공직 생활을 하면서 지위가 높을 때는 겸손했고 지위가 낮을 때도 비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말은 꾸밈없고 진실하며 담백했다. 가정에서의 모습은 어땠을까?
박제연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후손인 의성김씨 김한수(金漢壽)의 딸과 결혼해 박좌양(朴左陽, 1826~1872)과 박우양(朴右陽, 1831~1909) 두 아들을 낳았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집을 비워야 했던 그는 두 아들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는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 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고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하루아침에 장마가 시작되어 걱정되었는데, 뜻밖에 너희들의 편지를 받게 되니 무척 반갑구나. 아이들 모두 건강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하니 기쁘다. 게다가 머리가 아프다던 며느리도 전보다 괜찮다 하니 매우 다행이다.
1860년(철종 11) 6월 26일 아버지가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아들에게 박제연이 쓴 편지다. 그가 과거에 급제해 사회초년생으로서 벼슬 생활을 시작했던 30대, 어느덧 아들도 그 나이가 되어 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며느리의 건강과 손자의 공부 소식이 그의 근심을 덜어주는 듯하다.
천 리 먼 객지에서 한 해를 시작하니 마음이 좋지 않구나. 올해 예순이 되는 네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되는구나. 며느리의 해산이 언제인지 궁금하니 지금 가는 인편에 좋은 소식을 전해줬으면 좋겠다. 창의[氅衣, 벼슬아치가 평상시에 입던 웃옷]와 버선, 진분[眞粉, 순백색의 건축 도료]을 보냈다.
1862년(철종 13) 1월 28일 아버지가
요즘은 3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한다는 데, 조선 시대 지방 출신 관직자들은 내직이든 외직이든 원거리 근무가 필수라 두 집 살림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생활이 익숙해질 법도 한 데, 그는 여전히 외롭고 가족이 그립다. 늙은 아내에 대한 염려와 해산을 앞둔 며느리에 대한 반가움이 교차한다. 그는 편지와 함께 동봉한 창의와 버선, 진분에 대한 용도와 처리를 알려주는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영남의 진주(晋州)와 개령(開寧)의 변고와 호남의 익산(益山)과 함평(咸平)의 사건 등 여러 고을의 변고 소식이 날마다 들려오니 걱정이 되는구나.
1862년(철종 13) 4월 26일 아버지가
1862년(철종 13) 진주의 작은 고을 단성에서 시작된 농민 항쟁은 3월에는 경상도 전역, 4월에는 전라도, 5월에는 충청도에서 일어났다가 이후 제주를 포함한 전국 70여 개 고을로 번졌다. 박제연은 아들에게 영주 무섬 밖의 소식을 전했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농민 전쟁에 혹여 가족이 화를 입지는 않을까 염려되었으리라.
공무에 골몰하며 지내고 있는데 대정[大政, 해마다 음력 12월에 행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로 벼슬아치의 인사 평가를 의미함]이 20일 뒤에 있으니 반드시 체직(遞職)될 것 같구나.
1864년(고종 1년) 1월 16일 아버지가
연말에 있는 인사 평가 시즌이 되면 면직(免職)과 체직과 승진의 기로에서 어떤 인사이동 결과가 나올지 조마조마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박제연이 전한 편지 속에 직장인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1886년(고종 23) 8월 7일, 여든 할아버지가 된 박제연은 23세의 손자 박승규(朴勝圭, 1864~1923)에게 ‘과거장을 출입할 때 삼가고 조심하라’는 당부의 편지를 보냈다. 80세 정도 되면 편안한 집에서 증손자의 재롱을 보며 여생을 보낼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객지 생활이다. 그는 ‘나는 잘 지내고 있고 최근에 양현동(養賢洞) 벽송정(碧松亭)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랜 시간 동안 홀로 타지 생활을 하며 외로웠을 그이지만 그에게 영주의 무섬과 오헌, 그리고 가족이 있기에 긴 세월, 외로움을 견디며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헌고택(吾軒古宅)〉
剡溪一曲流 섬계 한 구비 물가에다
爲我卜居幽 조용한 나의 살 곳 정했도다
草漲眠黃犢 푸른 초원에는 송아지 잠들고
沙明穩白鷗 맑은 백사장엔 해오라기 평온하네
山光當戶暎 산 빛은 집의 문을 비추고
水勢繞檻浮 물 형세는 난간을 둘러 떠 있는 듯
未罷漁樵話 어부와 나무꾼 얘기 끝나기 전에
於焉月上樓 어느새 둥근달 누각 위에 떠 있네
박제연의 「오헌유거(吾軒幽居)」다. 그는 영주 무섬에 ‘오헌’을 짓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고자 했다. 그는 무섬 밖에서 밭을 가는 황소가 아니라 초원에서 풀을 뜯다 잠든 송아지, 물속의 송사리가 아니라 먼 산을 바라보는 해오라기를 바라봤다. 그는 어부와 나무꾼의 한가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명리(名利)에서 떠나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오헌 마루에 앉아 고샅에 들어선 그를 본다면, 버선발로 마중 나가 그의 괴나리봇짐을 받아안고 그를 환대할 것이다. 가장(家長)의 무게 내려놓고, 이제 집에 왔으니 편히 쉬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헌(吾軒) 마루에 앉아 앞마당을 바라본 풍경〉
오헌에서 몸과 마음을 완전히 채운 박제연은 외나무다리를 건너 다시 뭍으로 나갈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무섬 사람들이 외나무다리를 건너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시장을 가고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하루의 끝, 길 위를 떠도는 지친 마음을 끌어안고 외나무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햇빛 쨍쨍한 무섬 강가 모래밭에 꼬깃꼬깃 접힌 마음을 꺼내 말렸다. 활짝 편 마음은 다시 내일을 꿈꾸게 할 것이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우리는 매일 집을 나선다. 번잡스러운 삶의 연속이지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박제연이 ‘오헌’을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내 작은 아파트를 사랑한다. 주말, 넷플릭스를 보며 맥주 한잔하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 앞의 길모퉁이가 두렵지 않다.
모퉁이 길에 무엇이 있는지 저도 몰라요.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을 거예요.
-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 앤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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