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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즐거운 나의 집, 오헌(吾軒)

토요일 밤


평일의 어느 날,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들에 지칠 때 맥주 한 잔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그런 날엔 그냥 걷는다. 대신 고단했던 평일 끝을 단정하게 매듭짓고 토요일을 만난다. 쓰레기를 비우고 냉장고를 채우며 다가올 일주일을 챙긴다. 그리고 가족과 저녁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후 경건히 맥주와 새우깡을 준비한다. 토요일 밤, 나는 혼술을 한다.

지난 시간을 위로하고 앞날을 응원하며 내가 나에게 술 한 잔을 건넨다. 씁쓸하면서 달콤한 에일맥주가 온몸을 휘감고 나면 ‘이 하나하나에도 못됐음 못됐음’이 가득한 미운 사람이 용서된다. 《나의 해방 일지》 속 염기정 혹은 염미정이 된 나는 먹고사는 고단함을 탄산 가득한 라거 맥주와 함께 흘려보낸다. 그리고 《멜로가 체질》의 상수가 되어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한다. 그러고 나면 《눈물의 여왕》의 홍해인처럼 ‘행복한 기억들을 모으는 데 더 집중해’ 볼 힘이 생긴다.

맥주와 넷플릭스가 있는 토요일 밤, 밀물처럼 행복이 몰려오면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이라 말한 『빨간 머리 앤』의 앤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나는 앤이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초록 지붕 집’을 꿈꾸곤 했다. 정원 아래로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집 주위에는 온통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매슈와 마닐라처럼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나와 다른 삶을 살았던 이방인을 기꺼이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꿈꾸었다.

중국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은 「독산해경(讀山海經)」에서 ‘초여름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나, 집을 에워싼 나뭇가지 우거졌네. 새들도 깃들 곳 있음을 기뻐하듯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 [孟夏草木長 繞屋樹扶疎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라는 시를 남겼다. 내가 앤의 ‘초록 지붕 집’을 그렸듯, 조선 후기 오헌(吾軒)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은 도연명이 말한 ‘소박한 집’을 생각하며 세속의 부귀영화를 잊고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 즐겁게 살아가고자 했다. 만년의 그는 기거하는 곳에 ‘오헌’ 편액을 걸어 두었다.




박수(朴檖)의 만죽재(晩竹齋)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너무 좋아요.’라고 말한 앤처럼 우리는 자신을 반겨줄 따스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하는 집 밖의 삶에서 돌아와 무거운 한숨을 내려놓고 충만하게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집을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할 때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해진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무섬마을이 있다. 무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의 순우리말로 한자로는 수도(水島)로 표기한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물길이 마을의 삼면을 휘돌아 흐른다. 이 모습이 중국의 섬계[剡溪,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조아강(曹娥江) 상류]와 비슷하다 하여 ‘섬계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다.



〈영주 무섬마을〉 (출처: 네이버 지도)


350여 년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무섬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고 정착한 사람은 환학암(喚鶴庵) 박경안(朴景顔(1608~1671)의 아들 박수(朴檖, 1641~1709)였다. 1666년, 박수는 강 건너 서쪽에 있는 원암[遠巖, 영주시 문수면 탄산리]에서 무섬으로 옮긴 후 만죽재를 지었다.

25살의 젊은 박수가 무섬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버지 박경안의 권유 때문이라 전해진다. 무섬은 예부터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또는 매화나무가 아래로 늘어져 매화가 땅에 닿아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해서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으로 불리며 길지(吉地) 중의 길지로 뽑혀 자손에게 복(福)이 트이는 곳으로 여겼다. 길지로 이사할 생각을 한 박경안은 ‘박경안 네가 무섬에 들어가 살면 위험하다’는 꿈을 세 번 꾼 후 둘째 아들 박수에게 명당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곳, 집에도 인연이 있다.

무섬에 정착한 박수는 1남 1녀를 낳았다. 박수의 장남 박창은(朴昌殷, 1669~1742)은 선성김씨 김윤일(金允一)의 딸과 혼인했고, 박수의 딸은 선성김씨 김범석(金範錫)에게 출가했다. 박창은의 차남 박이장(朴履章)은 선성김씨 김대(金臺, 1732~1809)를 사위로 맞았는데, 그때부터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 두 집안의 집성촌이 되었다.

하얗게 펼쳐진 백사장, 잔잔하게 흐르는 내성천 건너 숲속에 환학암(喚鶴菴)이 있다. 박경안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환학암을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포근히 감싸고 있다. 외나무다리가 보이는 곳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35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만죽재 사랑채가 보인다. 만죽재는 무섬의 중심에서 무섬을 지키고 있다.


〈환학암(喚鶴菴)〉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3호, 만죽재고택(晩竹齋古宅)〉

〈만죽재(晩竹齋) 편액〉




박제연(朴齊淵)의 오헌(吾軒)


만죽재 서쪽에 박제연의 오헌이 있다. 박제연의 호(號)이자 당호(堂號)인 오헌, 그는 평생 ‘나’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한 사람이다.

以吾觀吾吾不知吾     내 스스로 나를 보니 나는 나를 모르지만
耕吾讀吾安分是吾     내 밭 갈고 내 글 읽어 내 본분에 자족하노라
剛吾柔吾律身是吾     내 강(剛)하고 내 유(柔)하게 나는 이로 자율(自律)하고
忠吾信吾接物是吾     내 충하고 내 진실하게 나는 이로 짝하노라
進吾退吾處世是吾     내 나아가고 내 물러가며 나는 처세하는 거니
內吾外吾吾所名吾     나는 안으로 나는 밖으로 나는 ‘나’라 부르노라


박제연의 「자명(自銘)」이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나도 잘 모르지만 밭 갈고 글 읽는 것을 나의 분수로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의 「자명」을 보며 내가 나로서 우뚝 설 수 있을 때 한 가정을 온전히 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박제연의 삶을 따라가 본다.


〈자명(自銘)〉


1807년(순조 7) 12월 6일 박제연은 호조 참판 박재순(朴在純)과 안동권씨 권사선(權師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조 정랑, 봉화 현감, 사간원 사간 등을 지낸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 1764~1842)에게 수학한 박제연은 1840년(헌종 6) 34세에 문과에 급제, 승정원에서 첫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868년(고종 5)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회갑연을 축하하며 정3품 통정대부 품계에 올랐고, 병조 참지, 참의, 돈녕부 도정 등을 역임했다. 1886년(고종 23)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른 80세의 박제연은 병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 의금부사를 제수받았다.

조선 말, 박제연은 암흑시대의 문턱 앞에 서 있었다. 1875년(고종 12)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를 불법 침투했다.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공격했고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 수군을 공격했다. 그 후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 통상을 요구했다. 1876년(고종 13)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었다.

운요호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8월,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유명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박제연을 위해 ‘오헌’ 편액 글씨를 써주었다. ‘오헌’ 양옆의 여백에 오헌이 의미하는 것을 작은 초서로 써서 조형성을 더했다.

새들도 깃들 곳 있음을 기뻐하듯,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
이는 도연명의 흉금으로 사물과 내가 함께 즐거워한 것으로
혼연히 천진스러운 말이다.
무릇 자신을 아는 자는 드물지만, 자신을 온전히 하는 자는 더더욱 드문 법이다.
내가 사랑하는 바가 있는 뒤에야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를 수 있으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우리 종친 중에 그런 사람이 있도다.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
此爲陶令襟期 物吾同樂 渾然天眞語也
夫知吾者鮮矣 而全吾者爲尤鮮
吾有所愛然後 乃能從吾所好
可語此者 吾宗有其人也


〈오헌(吾軒) 편액〉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박제연은 조정에 있을 때, 박규수,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의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항상 검소한 삶을 살았던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해서는 배고픈 자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사람들과 격식 없이 어울려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거처하는 벽에 ‘충성하고 효도하며, 농사짓고 독서하자’는 ‘충효경독(忠孝耕讀)’ 네 글자를 써서 걸고 평생의 신표로 삼았다.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던 박제연은 승진에 연연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에게 사적(私的)으로 권력자를 만나 보라고 권하면, 그때마다 그는 ‘나의 푸른 수염을 보시게. 어찌 앵앵거리면서 왔다 갔다 할 사람이겠는가’라는 말로 이(利)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이란 때론 내 속내를 감추고 나를 포장하는 것일 텐데,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부하지 않았다. 50년 동안 공직 생활을 하면서 지위가 높을 때는 겸손했고 지위가 낮을 때도 비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말은 꾸밈없고 진실하며 담백했다. 가정에서의 모습은 어땠을까?

박제연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후손인 의성김씨 김한수(金漢壽)의 딸과 결혼해 박좌양(朴左陽, 1826~1872)과 박우양(朴右陽, 1831~1909) 두 아들을 낳았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집을 비워야 했던 그는 두 아들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는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 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고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하루아침에 장마가 시작되어 걱정되었는데, 뜻밖에 너희들의 편지를 받게 되니 무척 반갑구나. 아이들 모두 건강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하니 기쁘다. 게다가 머리가 아프다던 며느리도 전보다 괜찮다 하니 매우 다행이다.

1860년(철종 11) 6월 26일 아버지가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아들에게 박제연이 쓴 편지다. 그가 과거에 급제해 사회초년생으로서 벼슬 생활을 시작했던 30대, 어느덧 아들도 그 나이가 되어 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며느리의 건강과 손자의 공부 소식이 그의 근심을 덜어주는 듯하다.

천 리 먼 객지에서 한 해를 시작하니 마음이 좋지 않구나. 올해 예순이 되는 네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되는구나. 며느리의 해산이 언제인지 궁금하니 지금 가는 인편에 좋은 소식을 전해줬으면 좋겠다. 창의[氅衣, 벼슬아치가 평상시에 입던 웃옷]와 버선, 진분[眞粉, 순백색의 건축 도료]을 보냈다.

1862년(철종 13) 1월 28일 아버지가


요즘은 3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한다는 데, 조선 시대 지방 출신 관직자들은 내직이든 외직이든 원거리 근무가 필수라 두 집 살림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생활이 익숙해질 법도 한 데, 그는 여전히 외롭고 가족이 그립다. 늙은 아내에 대한 염려와 해산을 앞둔 며느리에 대한 반가움이 교차한다. 그는 편지와 함께 동봉한 창의와 버선, 진분에 대한 용도와 처리를 알려주는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영남의 진주(晋州)와 개령(開寧)의 변고와 호남의 익산(益山)과 함평(咸平)의 사건 등 여러 고을의 변고 소식이 날마다 들려오니 걱정이 되는구나.

1862년(철종 13) 4월 26일 아버지가


1862년(철종 13) 진주의 작은 고을 단성에서 시작된 농민 항쟁은 3월에는 경상도 전역, 4월에는 전라도, 5월에는 충청도에서 일어났다가 이후 제주를 포함한 전국 70여 개 고을로 번졌다. 박제연은 아들에게 영주 무섬 밖의 소식을 전했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농민 전쟁에 혹여 가족이 화를 입지는 않을까 염려되었으리라.

공무에 골몰하며 지내고 있는데 대정[大政, 해마다 음력 12월에 행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로 벼슬아치의 인사 평가를 의미함]이 20일 뒤에 있으니 반드시 체직(遞職)될 것 같구나.

1864년(고종 1년) 1월 16일 아버지가


연말에 있는 인사 평가 시즌이 되면 면직(免職)과 체직과 승진의 기로에서 어떤 인사이동 결과가 나올지 조마조마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박제연이 전한 편지 속에 직장인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1886년(고종 23) 8월 7일, 여든 할아버지가 된 박제연은 23세의 손자 박승규(朴勝圭, 1864~1923)에게 ‘과거장을 출입할 때 삼가고 조심하라’는 당부의 편지를 보냈다. 80세 정도 되면 편안한 집에서 증손자의 재롱을 보며 여생을 보낼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객지 생활이다. 그는 ‘나는 잘 지내고 있고 최근에 양현동(養賢洞) 벽송정(碧松亭)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랜 시간 동안 홀로 타지 생활을 하며 외로웠을 그이지만 그에게 영주의 무섬과 오헌, 그리고 가족이 있기에 긴 세월, 외로움을 견디며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헌고택(吾軒古宅)〉




나의 집[吾軒]


剡溪一曲流     섬계 한 구비 물가에다
爲我卜居幽     조용한 나의 살 곳 정했도다
草漲眠黃犢     푸른 초원에는 송아지 잠들고
沙明穩白鷗     맑은 백사장엔 해오라기 평온하네
山光當戶暎     산 빛은 집의 문을 비추고
水勢繞檻浮     물 형세는 난간을 둘러 떠 있는 듯
未罷漁樵話     어부와 나무꾼 얘기 끝나기 전에
於焉月上樓     어느새 둥근달 누각 위에 떠 있네


박제연의 「오헌유거(吾軒幽居)」다. 그는 영주 무섬에 ‘오헌’을 짓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고자 했다. 그는 무섬 밖에서 밭을 가는 황소가 아니라 초원에서 풀을 뜯다 잠든 송아지, 물속의 송사리가 아니라 먼 산을 바라보는 해오라기를 바라봤다. 그는 어부와 나무꾼의 한가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명리(名利)에서 떠나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오헌 마루에 앉아 고샅에 들어선 그를 본다면, 버선발로 마중 나가 그의 괴나리봇짐을 받아안고 그를 환대할 것이다. 가장(家長)의 무게 내려놓고, 이제 집에 왔으니 편히 쉬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헌(吾軒) 마루에 앉아 앞마당을 바라본 풍경〉


오헌에서 몸과 마음을 완전히 채운 박제연은 외나무다리를 건너 다시 뭍으로 나갈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무섬 사람들이 외나무다리를 건너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시장을 가고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하루의 끝, 길 위를 떠도는 지친 마음을 끌어안고 외나무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햇빛 쨍쨍한 무섬 강가 모래밭에 꼬깃꼬깃 접힌 마음을 꺼내 말렸다. 활짝 편 마음은 다시 내일을 꿈꾸게 할 것이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우리는 매일 집을 나선다. 번잡스러운 삶의 연속이지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박제연이 ‘오헌’을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내 작은 아파트를 사랑한다. 주말, 넷플릭스를 보며 맥주 한잔하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 앞의 길모퉁이가 두렵지 않다.

모퉁이 길에 무엇이 있는지 저도 몰라요.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을 거예요.

-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 앤의 말 중에서 -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더보기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더보기
4. 권진호, 『안동의 유교현판』, 민속원, 2020.
5.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38, 『반남박씨 오헌고택』, 한국국학진흥원. 2017.
6.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저, 김경미 역, 『빨간 머리 앤』, 시공주니어, 2017.
7. 백영옥,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아르테, 2016.
8. 강선일, 「마을풍수 관련 전승지식의 의미와 기능 – 영주 무섬마을의 사례를 중심으로」, 『실천민속학연구』 25호, 실천민속학회, 2015.
“딸의 혼례식-신랑과 신부가 잔을 주고 받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3월 26일~3월 27일

1616년 3월 26일, 잔치를 위해 요리사[숙수(熟手)] 이복(李福)이 김택룡의 집에 와서 이진동과 함께 요리를 했다.

다음 날 27일, 김개일과 김경건이 신랑 집안의 손님들을 맞기 위해 택룡의 집으로 왔다. 잠시 뒤 혼서(婚書)가 도착하였는데, 사위의 이름은 ‘근오(謹吾)’였다. 택룡은 언복(彦福)을 시켜서 사위를 마중하도록 했다. 오후 세 네 시쯤 되자[신시(申時)], 사위가 도착했다. 신랑을 수행하여 함께 온 사람[요객(繞客)]은 참봉 권호신과 그 아우 즉 신랑의 아버지 준신, 그리고 중방(中房) 이지남(李智男)이었다.

곧 합근례를 행하고, 예작(禮酌)을 차려 베풀었다. 택룡의 아들 김숙도 참여하여 행했다. 저녁이 되어 혼례식이 끝나고 신랑 집안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이 날 광주의 성안의가 택룡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택룡이 혼례 때문에 너무 바빠서 답장을 못했다. 다만 심부름꾼을 시켜 사정을 직접 전달하게 하고 더불어 호도와 포육(脯肉)을 보냈다. 혼례에 손님으로 온 생원 홍이성의 처와 그 아들 · 김개일의 처와 그 아들 · 남석경의 처 · 이여의 처가 택룡의 집에 남아 모두 모였다.

“아버지와 봉황의 꿈”

최흥원, 『역중일기』, 1738년 7월 11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책을 보는 선비에게도 농사를 돌보는 것은 집안의 급무이다”

남붕, 『해주일록』,
1932년 10월 10일~10월 13일

1932년 10월 10일. 남붕은 아침에 아이 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후 머슴들을 시켜 똥거름과 재거름 위에 미려에 심을 보리 종자를 쌓아 놓았다. 내일 보리 파종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미려의 논에 보리를 파종했는데, 남붕은 새벽 일과를 마치고, 아침에 아이들을 가르친 후 올해 시전에 관해 논의하는 문제로 종파에 편지를 써서 부치느라 아침에 다소 분주했다. 그리고 백일동 어머님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오후에야 미려의 논에 나가볼 수 있었다.

머슴과 일꾼들이 보리 파종할 땅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다듬은 후 보리를 파종했는데, 일꾼이 몇 명 안 되어 겨우 일을 마치기도 했지만, 남붕이 가기 전까지 해놓은 일이 온전하지 않아 일이 늦기도 했다. 남붕이 보아하니 새로 흙을 갈아엎어 놓긴 하였으나 주먹만 한 흙덩이가 바둑알처럼 어지럽고 별처럼 깔려서 이 상태로는 보리 종자를 넣을 수 없었다. 남붕은 결국 머슴과 일꾼에게 다시 써레질로 곱게 부시게 하고 그런 뒤에 보리를 파종하게 했다.

남붕은 만약 자신이 이때 나가 보지 않고 거친 땅에 이미 파종을 한 다음에 나갔거나, 머슴에게 맡겨놓고 나가보지 않았다면 이번 보리농사는 허사가 되어 심하게 후회할 뻔 했다고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는데, 남붕은 이제 겨우 한 번 나가서 보리농사를 감독했는데 일이 이와 같았다.

다음날에도 파종하는 일로 소란스러워 남붕은 종일토록 공부를 접었다. 독서하는 선비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고수하면서 전혀 농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농사에 힘쓰는 한 가지 절차는 집안의 급무이고, 배우는 자가 세상은 알지 못하면서 오래도록 책만 보는 것은 집안을 보전하는 양책이 아니다.

“든든한 아들과 함께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년 4월 18일 1635년 6월 20일

1635년 4월 18일, 김광계는 기제사를 준비하러 지례(知禮)로 떠났다. 원래는 김광계의 마을에서 지낼 기제사였으나 김광계의 넷째 아우 김광악(金光岳)의 부인 권씨가 4월 11일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마을이 불안하여 지례로 제사 장소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지례로 가는 길에 아들 김렴이 따라왔다.

4월 25일에는 아들과 함께 『심경心經』을 강독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김광계 홀로 운암사(雲巖寺)에 갔는데, 곧 염이 따라와 김광계와 함께 머무르며 『상서』를 강독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운암사에 있다가, 4월 30일에는 함께 배를 타고 침락서재로 갔다. 5월 2일에도 역시 아들 염을 데리고 광산 김씨의 묘소들이 있는 거인(居仁)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5월 20일, 6월 20일에도 염은 자신의 사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러 와서 며칠간 머무르다 갔다.

그 뒤에도 끊임없이 제사와 성묘가 있었기 때문에 염은 자주 김광계를 만나러 와야 했으며, 김광계 역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길 때 염을 데리고 다니며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염은 서서히 김광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든든한 존재로 성장해 나갔다.

“들판에는 목화 집안에는 돼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2년 8월 15일~26일

그리 점잖은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으나 집안 살림 경영은 힘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노상추의 집안 살림은 그리 넉넉지 않았고 가끔은 곤궁하다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였다. 노상추가 서울에 올라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을 돌본 것은 조카들과 아들이었다. 이들이 해 놓은 집안일이 노상추의 눈에는 영 마뜩잖았다. 그래서 노상추는 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집안 살림을 효율적으로 경영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농사란 것은 사람이 아무리 애쓴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흉작을 면키 어려웠다. 올해도 목화가 흉작이었다. 처음 시장가격은 30근에 1백 동이었다. 모름지기 흉작이라면 그 가격도 오르기 마련이건만 올해 목화는 너무나도 헐값이었다. 듣자 하니 수령이 농민들에게 성전(城錢)을 빌려주고 3할의 이자를 거두기로 하였는데, 시장이 한 번 열릴 때마다 이자를 마구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농민들이 이자를 내기 위해 목화를 마구 팔아야 해서 목화 값이 헐값이 된 것이다. 덕분에 노상추의 목화 값도 똥값이 되었다.

노상추는 목화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먼저 상수리나무와 잣나무를 심어서 도토리와 잣을 수확해 보기로 했다. 조카 기엽을 수월산에 보내서 상수리를 심어놓은 것을 살펴보게 했고, 또 집 뒤 언덕에 심어놓은 잣나무도 살펴보았다. 상수리는 심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수확할 것이 없었으나 잣나무는 열매를 맺어서 18송이를 딸 수 있었다. 이 잣나무는 무술년(1778) 봄에 대곡사 인근 잣나무 숲에서 딴 잣을 심어놓은 것이었다. 벌써 25년이 흘렀는데, 크게 자란 잣나무가 17그루이다. 노상추는 수확한 잣을 사당에 올렸다.

또 돼지도 한 번 쳐 보기로 했다. 많이 길러서 그 고기를 팔면 어떨까 싶어서 돼지우리도 지었는데 과연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3년 12월 28일

1763년 12월 28일. 계미년도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흐린 날씨에 간간이 눈발이 뿌리는 날이었고, 어머니 병환도 어제와 같은 정도였다.

최근 딸아이가 부쩍 몸이 쇠하여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무언가 기운이 날 만한 보양 음식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 한탄스러웠다. 얼마 전 아들을 잃고 난 최흥원은 남은 딸들마저 허약한 몸으로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걱정이 부쩍 늘었다. 그리하여 어제는 사람을 시장에 보내어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좀 사 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장에 보낸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즘 시장에 어물 귀하기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청어도 1냥이나 하고, 생대구도 1냥 정도는 줘야 구할 수 있습니다. 어물 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여서 꿩 한 마리도 7전이나 나가니, 도저히 그 가격으론 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최흥원이 들어보니 정말로 그 정도의 가격이라면 쉬이 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파리한 딸의 얼굴을 보며 최흥원은 고민에 빠졌다. 무리를 해서라도 보양이 될만한 생선이나 꿩을 좀 사다가 딸아이에게 먹여야 하는지... 한편으론 아프신 어머니 반찬거리를 대기도 어려운 형편에 무리한 처사인가 싶어 최흥원은 쉬이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힘든 하인을 격려하고 동네의 작은 잔치를 열며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6년 3월 9일~1859년 6월 21일

1846년 3월 9일, 서찬규는 회시에 합격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닷새 안에 가야 해서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달려가니 신석룡은 뒤따라 갈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천천히 오라고 하고, 덕우와 함께 갔다. 연일 길을 재촉했더니 노복들은 힘들다고 하고 창졸들도 발이 부르텄다고 했다. 서찬규는 밤에 개를 삶도록 하고 술을 사서 하인배들을 배불리 먹였다.

1849년 3월 4일에는 남산의 족형 재씨·자형 평선씨 등 모두 10여 이 술을 가지고 수레를 타고 공부하고 있는 서찬규를 찾아 암자로 왔다. 그들은 함께 예계동으로 들어가 화고를 삶고, 오후 늦게 암자로 돌아와 함께 묵었다.

서찬규는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1850년 4월 29일에 산격의 선영에 가서 성묘하고, 이종 원규[자는 선장(善長)]씨 집으로 갔다. 그가 먼 길에서 돌아왔다고 개고기를 삶고 술을 마련해 주었다.

1859년 5월 5일, 서찬규는 여러 친구들과 뱃놀이하며 개를 삶아 먹고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50~60인이 되었다.

6월 21일에는 서찬규의 부친이 연신제의 말애 폭포로 목욕을 하러 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동네 사람이 거의 다 모였다. 오후에는 구암서원에 가서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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