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세금 문제가 사회적 공론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아마도 그 경향은 더 확대될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정상적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기 때문이다. 세금이야말로 개인과 정부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다. 그 통로를 타고 오가는 것들이 얼마나 투명하고 질서 있느냐가 그 나라의 수준이고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조선왕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정부는 크게 세 가지 종류로 세금을 거두었다. 농사지은 것에 대한 수취, 고을에서 나는 수많은 산물들에 대한 수취, 그리고 사람의 노동력에 대한 수취가 그것이다. 농사지은 것에 대한 세금으로 거두는 물품은 주로 쌀이었고 일부는 콩이었다. 전국 각 고을에서 나는 산물의 종류는 수백 가지에 달했다. 예를 들면, 전라도 영광의 굴비, 경상도 봉화의 버섯, 역시 경상도 안동의 은어, 경기도 가평의 잣 같은 것들이다. 정확한 명칭으로 말하면, 농사지은 것에 대한 세금을 ‘전조(田租)’, 지역의 산물을 ‘공물(貢物)’이라고 불렀다.
전조와 공물이 수많은 종류의 ‘물품’들이었다면, 사람의 노동력에 대한 수취인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은 성인 남자의 노동력이었다. ‘역(役)’이란 오늘날 '서비스업'이라고 할 때의 그 서비스(Service) 혹은 용역(用役)을 뜻한다. 군역은 군대에 가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젊은 남성이 져야 하는 군사 의무는 사실상 전근대 군역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요역은 여러 용도에 쓰였다. 요역의 여러 사용처들 중에서 사람과 물품의 운반은 요역 전체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전근대 사회에서 사람과 물품의 운반은 큰 문제였다. 지금은 자동차, 화물차, 기차, 비행기, 거대한 크기의 배 등이 사람과 물품을 실어 나른다. 세계적으로 석유 가격 변동에 그토록 민감한 것은 그것이 그 운반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사람과 물품의 운반은 상당한 정도 인력에 의존했다. 전조로 거두는 쌀과 콩은 원칙적으로 배로 운반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각 고을의 쌀과 콩을 배가 있는 곳까지 운반하려면 그 고을 사람들의 요역을 이용해야 했다. 그것은 대가 없이 치러야 하는, 여러 날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 일이 걸리는 순수한 의미의 노고(勞苦)였다.
오늘날 세금 수취의 전산화는 수취 과정의 부정을 없애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물론 수취 과정을 전산화했다고 해서 세금 수취의 공정성이 만족스러워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세금 수취 전산화가 그 과정의 투명성을 상당히 개선했지만, 수취 원칙과 관련된 공정성까지 개선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듯이, 문제는 원칙만이 아니라 과정에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문제는 무시하기에는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조선시대 세금 수취와 관련해서 그 과정의 폐단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전조 수취에는 엄격한 기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공정성을 결과 차원에서도 담보하지는 못했다. 전세의 경우에 매년 내는 몫은 그해의 작황을 반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해마다 개인의 전년도 소득 결과를 평가해서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전조는 그해 농사지은 것을 기준으로 했다. 경작지마다 풍흉의 영향을 다르게 받았다. 전조 수취의 원칙은 정상적으로 농사지은 경작지에 부과하는 것이었다.
정상적으로 농작이 이루어진 경작지를 ‘시경(지)(時耕(地))’이라고 했다. 시경은 전조가 부과되기 이전에 각 고을 아전이 조사해서 상부에 보고했다. 만약 농사가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는데 제대로 지어졌다고 보고한다면, 그 경작지에는 과도한 세금이 부과될 수밖에 없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경작자의 몫이었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도한 농사의 부실은 날씨 탓도 있지만 해당 고을 수령의 업무 태만으로 이해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농사가 정상적으로 지어졌는데 망쳤다고 보고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그 차액은 아전과 수령의 차지가 되었다.
공물은 전조에 비해서 매우 복잡했다. 전조는 경작지라는 움직이지 않는 명확한 부과 대상이 있고, 수취하는 물품도 크게 보면 쌀과 콩에 국한되었다. 쌀과 콩은 품질 차이가 크지 않고 보관도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보관이 용이하다는 것은 운반에 큰 이점이다. 수확 시기가 비슷한 것도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수납 행정에 유리했다. 반면에 공물은 많은 점에서 전조와 달랐다.
공물은 개별 고을에 부과되었다. 고을들 사이의 경제적 능력 차이는 대단히 컸지만, 그것은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공물은 산에서 나는 임산물,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 강에서 나는 것 등 온갖 종류가 있었다. 때문에 공물은 사실상 일 년 내내 수취 기간이었다. 또 같은 종류의 물품에서 품질 차이도 컸다. 운반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여름에 안동에서 나는 생선을 서울까지 변질 없이 운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안동 석빙고>
안동 석빙고는 예안 현감으로 부임한 이매신(李梅臣)이 은어를 국왕에게 진상하기 위해
녹봉을 털어 1737년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대동법(大同法)은 흔히 현물을 쌀이나 포로 바꾸어 내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동법이 실시되기 오래전부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거나 가능했더라도 대단히 불편했기 때문이다. 대신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쌀이나 포를 거두어서, 그것으로 서울에서 자기 고을이 내야 할 물품을 구매하여 관청에 납부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각종 부정행위가 만연했다는 점이다. 고을 아전과 수령, 중앙정부 관리들, 힘 있는 벼슬아치들이 이 부정하고 수익이 많은 일에 다투어 참여했다. 그리고 이것은 고을 수령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대동법이 성립되기 이전인 17세기 전반에 조선의 공물 폐단은 극도에 달했다. 수취규정 자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공물은 중앙정부 혹은 지방 고을에서 자의적으로 운영했다. 공정하게 거두어서 계획에 따라 규모 있게 집행되지 못했다. 중앙정부는 쓸 곳이 있으면 그때마다 무계획하게 지방에 공물을 부과했고, 각 고을은 그 과정에서 수취액을 덧붙였다. 수취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비용을 고려하면 불가피했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그 수취를 이용해서 수령이나 아전들이 착복하는 일이 많았다. 그 부담은 모두 고을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공물을 베로 내는 것은 운반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 다른 부정이 발생했다. 인간사회에서 부정부패만큼 창조성이 두드러지는 행위도 찾기 힘들 것이다. 베의 종류는 다양했다. 정부에 내는 베의 기준은 보통 5승포(升布) 35척(尺)이었다. 이를 ‘정포(正布)’라고 했다. ‘승’(민간에서는 ‘새’라 했다)은 가늘고 굵음의 정도를 표시하는 단위이다. 1승이 80올이었다. 말하자면 5승포는 400올의 면포였던 것이다. 오늘날 메리야스도 40수, 60수, 100수, 120수 등이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수가 높을수록 고급이고 비싼데,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전이나 수령, 혹은 중앙정부조차 수납하는 면포 기준을 높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말하자면 5승포 대신에 8, 9승포를 거두는 경우가 있었고, 길이도 35척을 넘어서는 경우가 흔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군사문제는 경제적 문제와 곧바로 연결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군사력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실제로 집행되지 않는다. (훈련에 들어가는 비용은 잠시 놔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은 언제나 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큰돈이 든다. 말하자면 군사 분야만큼 큰돈이 들면서도 늘 준비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는 분야는 드물다. 때문에 군사비는 정부 전체의 예산으로 보면 일종의 예비비 같은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조선시대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조선시대에는 자신이 직접 군대에 가는 대신, 일정한 돈을 내면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관행이 되자 정부도 재원이 필요할 때마다 군역 명목으로 포를 거두었다. 군역이 사실상 공물과 다를 것이 없게 된 것이었다. 그 피해는 군역 의무가 있는 평민들을 넘어 노비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노비들에게는 원칙적으로 군역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정부 재정이 부족해지자 노비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했다. 이 문제로 양반들은 정부와 갈등하는 일이 많았다.
광해군(재위 1608~1623)은 임진왜란 때 세자의 신분으로 아버지 선조(재위 1567~1608)를 대신했다. 선조가 전쟁 초기에 왕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왕이 된 이후에도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현실적 감각을 잃지 않았다. 18살에 세자가 되어 전쟁을 지휘하며 얻은 국제적인 감각과 험난한 현실에서 얻은 경험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내치(內治)의 경우, 특히 세금문제에 대해서 광해군은 외치(外治)에서만큼 현명하지 못했다. 그의 재위 시절은 세금문제에 관한 한 암흑시대에 가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해군 재위 시절에 여러 개의 궁궐이 재건되었다. 장기간 전쟁으로 궁궐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공사의 정도가 과도했고, 그 과정도 혼란스러웠다. 전쟁이 막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작지는 황폐화되었고, 민생의 피폐는 극에 달했다. 정부의 조세수취 체계도 거의 파괴된 상태였다. 재정 수입은 전쟁 전에 비해서 20%에 불과했다. 때문에 그의 정부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민생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공정한 조세수취 체계를 신속히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들에 앞서서 궁궐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더욱이 그 과정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절이 어렵다고 모두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을 틈타 사익을 챙기는 자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무서운 사람들이다.
광해군 시절에 궁궐 공사의 비용이 공물을 거두는 형식으로 각 고을에 부과되었다. 올해 거두는 총액이 얼마이니 고을마다 얼마씩 내라고 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1년에 몇 번이고 필요할 때마다 얼마씩 자주 수취했다. 이런 상황이니 수취 과정이 공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 집행 과정도 공정하지 않았다. 궁궐 공사에 동원되는 일군에게 품삯으로 지불되어야 할 면포는 부정한 방식으로 탕진되었다. 왕실이나 힘 있는 벼슬아치들이 자신들의 종을 거짓으로 일꾼으로 만들어서 그 품삯을 챙겼다.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자들이었다.
조선의 세금 행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그 부정적 측면이 긍정적 측면을 압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양상이 지속되면서도 나라가 오래 유지된 사례는 없다. 조선에서 세금 행정이 가장 어두운 국면에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와 19세기였다. 조선은 19세기의 양상을 헤어나지 못한 채 결국 망하고 말았다. 나라가 망했을 때 백성들이 당연히 슬퍼했을까?
조선은 광해군을 이은 인조(재위 1623~1649) 때에 점차로 조세 행정을 정상화해 나갔다. 문란한 전조가 먼저 정비되었다. 공물보다 전조가 먼저 정상화되었던 것은 전조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공물을 정상화시키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조선 초에 이상적으로 전조를 운영해 봤던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해 봤던 것은 다시 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법이다. 공물은 전조를 정상화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창의성 있는 현실감각, 정교한 기획력, 규율 있는 행정력 같은 것들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것들이 합쳐서 만들어진 제도가 17세기 후반에 확립된 대동법이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 大同法施行記念碑>
대동법 시행 기념비는 대동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쳐야 했던 이전의 폐단을 없애고, 쌀로써 대신 바치도록 한 조세제도이다. 조선 선조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효종 2년(1651) 충청감사로 있던 김육(金堉)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를 하여 왕의 허락을 얻어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백성들의 수고가 덜어지는 등 좋은 성과를 이루게 되자, 왕은 이를 기념하고 만인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미 많이 알려졌지만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OECD 평균에 비해서 많이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 인상에 대해서 국민들의 저항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이 자신들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금은 전근대사회의 세금과 달리 부(富)의 사회적 재분배를 중요한 기능의 한 가지로 가지고 있다. 불평등한 재산과 소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세금에 의한 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대개의 선진국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때문에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한국에서도 점차 공론이 되고 있다.
여기에 중요한 장애가 정부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조선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조선은 19세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망국(亡國)의 상황을 맞았지만, 17세기에는 대동법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백성들은 이 문제를 해결한 정부를 믿었고, 그래서 조선은 좀 더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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