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페이스북PDF
선인의 일기

17세기 한 선비가 글로 그린 삶의 풍경화, 『계암일록』

김형수

일기는 개인이나 단체에서 그들의 생활 체험과 업무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정리해 놓은 기록이다. 공적 단체에서 기록한 대표적인 일기는 국가에서 기록한 『실록』,『승정원일기』 등이 있다. 국가에서 작성한 기록은 왕의 언행을 우선적으로 적고, 신하들의 상소문, 의견 개진 등을 다양하게 수록하였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었다.

이와 함께 개인의 삶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적 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의 삶을 매일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개인 일기들은 약 1천 종에 달한다.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개인의 일기자료는 많이 남아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일기로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안네의 일기』를 들 수 있다. 이 일기는 한 유태인 소녀가 나치 치하에서 겪었던 2년간의 시간을 사춘기 소녀의 눈으로 담담하게 적고 있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우리 선인들의 일기에서도 당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풍경을 엿 볼 수 있다.


계암일록의 저자 계암溪巖 김령金坽


지금 이야기할 『계암일록』도 그러한 일기 중의 하나이다. 이 일기를 기록한 김령(1577~1641)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조선이 겪어야 했던 가장 참혹한 전쟁을 연달아 겪었던 인물이다.

김령은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활발했지만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으로 인하여 선비들이 갈라서던 선조 10년에 태어나 광해군 4년(1612) 3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김령은 인조반정(1623)이 일어난 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서울을 올라가는 도중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김령의 처신에 대해서는 문중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중 매우 재미있는 것이 전한다. 김령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서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람을 만나 “주상이 옥새를 앉아서 받았는가, 서서 받았는가.”라고 묻자 “서서 받았습니다.”라고 하니, 일부러 말에서 떨어졌다는 몸에 상처를 입혔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돌아가신 선친으로부터 들었는데 선친께서는 “계암께서 물으신 것이 인조가 신하들에 의해 옹립되었는가 반정을 주도하여 왕위를 찬탈했는가를 물었던 것으로 서서 받았다는 것은 왕위를 찬탈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벼슬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울에 올라가지 않을 구실을 만들어 내었다.”라고 하신 기억이 있다.

김령이 살고 있던 예안지방은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었고, 김령의 부친인 설월당 김부륜(1631~1598)은 이황의 제자 중 걸출한 인물이었다. 부친의 형제, 사촌, 고종사촌들까지 모두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7명의 형제, 사촌들을 합하여 칠군자七君子라고 일컬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출사를 포기하고 재야에서 학문에 침잠하였다. 특히 당숙이었던 후조당 김부필(1516~1577)은 스승인 퇴계로부터 출사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하자 이황은 “후조주인은 본래 절개가 굳세어서/ 임명장이 도착해도 기뻐하는 마음이 없네/ 빙설 속에 피어난 매화 향을 대하면서/ 도의 근원 깨닫고는 음미하기 그치지 않네”라는 평가를 하기도 하였다. 김부필의 출사 거절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국정농단이 이루어지는 명종대 조정은 선비가 나아가야 할 곳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인 것이었다. 김부필 만이 아니라 김령의 부친 김부륜도 16세의 나이에 과거를 포기하고 퇴계 문하에서 성리학에만 전념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당시 집안의 가풍이 출처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계암의 인조반정 후 일화는 군자의 처신을 중요시하는 가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조정에서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 등 여러 직책을 내려 주면서 서울로 올라와 취임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김령은 계속 병을 핑계로 벼슬길에 나가기를 거부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인조반정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의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남지방에서 구전되는 당달봉사(눈뜬봉사) 선비이야기도 김령에 관한 것인데 당시 조정에서는 김령이 거짓으로 병을 칭탁했다는 의심을 가지고 임명장을 가져온 관원이 진짜 봉사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바늘로 선비의 눈을 찌르려고 하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깨벌레를 구워서 고기라고 속이고 먹이려고 하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먹으려고 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구전으로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령은 당시 영남제일인으로 회자되었고, 동계 정온이 병자호란 이후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김령을 방문하여 같이 자면서 아무도 없을 때 “그대는 우리 임금에게 백이伯夷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기도 하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재산을 기울여 의병을 지원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하자 이를 분통하게 여겨 시를 짓기도 한 것으로 보면 국가의 안위가 걸려 있을 때는 분연히 일어설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안동 MBC 한국정신문화 기획시리즈 ‘오래된 약속’ 제1편에 계암 김령과 <계암일록>이 소개 되었다. 정치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선비로서의 절개를 지켰던 김령의 삶과 그가 27세부터 39년 동안 쓴 계암일록의 가치를 담았다.


『계암일기』가 보여주는 17세기 조선사회


이러한 김령이 남긴 일기가 『계암일록』 이다. 이 일기는 김령이 27세 때가 되던 1603년부터 김령이 죽는 해인 1641년까지 모두 39년간 쓴 것이다. 이 중 정미년(1607)의 일기는 김령의 친필로 기록된 것이고, 나머지의 일기들은 후손들이 다시 필사한 것이다. 이 일기는 과거에 급제하여 잠시 서울에 갔을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김령이 살았던 안동, 예안지방의 사건들과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일기에는 그의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것을 꼼꼼히 기록하였다. 김령은 그 자신이 도산서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기 때문에 당시 지역사회를 이끌어 나가던 인물이었으므로 지역사회에 대한 각종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도산서원에 이황의 제자 조목을 종향할 때 자신이 겪었던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예안현감을 비롯한 지방관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세금 납부와 관련된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김령이 만났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이다. 김령은 자신의 처신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매우 엄격한 잣대를 대었다. 물론 면전에서 평가한 것은 아니지만 일기에 있는 평가들을 보면 자신이 선비로서 처신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선비로 처신하기를 바랐다. 만약 김령이 생각하기에 선비로서 할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할 경우 일기에는 그 사람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으로 기록하였으며, 이는 자신이 살고 있던 예안지방을 다스린 현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일기를 기록할 때는 현감에 대하여 기대를 걸기도 하였으나, 세금 징수라든가 도산서원에 와서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또한 자신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신이 보기에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그 사람에 대한 기록은 매우 엄정하였다. 대표적으로 김중청의 경우 과거시험에 응시할 때 같이 행장을 꾸려 동행하는 등 매우 친밀하였으나, 도산서원에 조목을 종향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김중청이 하자, 김령은 조목을 위한 것이 아니라 김중청이 개인의 입지를 위하여 추진하려 한다고 쓰는 등 매우 인물에 대한 평가는 준엄한 편이었다. 반대로 김상헌에 관해서는 처음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자호란 때 김상헌이 행한 행동과 그 후의 행동을 보고 대의를 아는 인물이라고 평가를 바꾸기도 하였다.

한편 이 일기에는 자신의 병이나 주변인들의 질병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기도 하였다. 김령은 젊을 때부터 지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1607년의 일기에는 그 자신이 앓았던 병의 증세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였다. 비슷한 시기 예천에 살았던 권별의 일기에도 자신의 병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당시 지배층이었던 사족들이라도 전쟁 직후 경제가 피폐해지고 힘들어진 상황에서 영양상태가 좋지 못해 많은 질병을 앓았음을 알 수 있다.

좀처럼 낫지 않는 폐병, 각종 보약과 지인들의 병문안
김령, 계암일록,   1606-07-20 ~ 1609-08-17

고양이가 엎지른 죽력 그릇, 병자는 화가 치밀어 오르다
김령, 계암일록,   1606-07-20 ~ 1609-08-17

또 주변에 전염병이 도는 정황을 상세히 기록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는 일반 백성들로는 감내하기 힘든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쪽에는 청나라가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다시 일본이 쳐들어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국가에서는 군비를 확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세금과 군역은 매우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지켜보면서 세금을 납부해야할 주민으로서, 그리고 주변의 친척들과 고을 사람들이 겪는 고초를 꼼꼼히 기록하였다.

김령의 『계암일록』은 17세기라는 격변의 시대를 배경으로 영남 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한 선비가 쓴 생활일기이다. 이 책 속에는 개인, 사회, 국가를 포괄하는 다양한 영역에서의 삶의 모습과 사회상이 묘사되어 있다. 이 일기를 통하여 무엇을 얻느냐는 독자의 몫이다.




작가소개

김형수
이외숙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전시운영 팀장 조선시대 지역사회 구성과 학파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 및 사림들이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전체’와 ‘부분’, ‘보편’와 ‘특수’라는 관점으로 역사와 시대를 읽고 해석하고 있다.
“뒷배 믿고 기고만장한 관노, 말에서 내릴 줄을 모르다”

저자미상, 을묘청의변, 시기미상
1859년 봄, 예안지역의 신유(新儒: 새로 유안에 편입된 유생)들이 김수근의 위패를 운계서원에 배향하였다. 서원 공사가 역시 광대하였지만, 예안 현감이 성심으로 돌보고 도와주었다. 예안 사람들은 김진형과 연관 되었다고 지목하였다. 예안 사람들의 말은 확실히 믿을 수가 없거니와, 관노(官奴) 이종릉(李鍾陵)은 운계서원의 공사에 상당한 노고가 있음으로 인하여 한양의 권력자들에게서 믿음이 적지 않았다. 예안 현감이 거꾸러지며 반가이 대우하니 이종릉이 그가 거꾸러지며 반가이 대우하는 것을 보고, 자기 눈앞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휘녕의 장례를 봉성(鳳城)에서 치를 적에 관가의 말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달려가다가 판중추부사 이효순(李孝淳)의 가마를 만나서 들이받을 뻔하여, 판중추부사가 일어나 지나갔는데, 조심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의 집을 헐어버리고 관내 다른 지역으로 쫓아버렸다. 그 사람이 한양으로 도망가서 사동 행랑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예안 현감이 매양 살뜰한 정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다. 예안 현감의 둘째 아들이 1861년(철종12, 신유) 봄에 문과에 급제를 하자 이종릉이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 둘째아들이 영광스럽게 고향에 돌아옴에 이르러 이종릉이 말을 나란히 타고 길에 올랐다. 예안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전하는 자가 많았다.

“ 서책을 찍을 종이를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다 ”

김령, 계암일록, 1631-05-10 ~
1631년 5월 10일, 완연한 봄인데도 날이 흐리고 추웠다. 금처겸이 하회 마을에서 돌아와 그의 장인인 류계화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류계화는 김령과 오랜 친구 사이였는데, 얼마 전 합천 군수를 제수 받고 서울에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이제 조만간 합천군으로 부임할 것이라 한다. 오랜 친구가 관직을 얻었다고 하니 김령은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러나 흡족한 마음도 잠시, 오후에는 다소 언짢은 소식도 들었다. 이번에 나라에서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인쇄하도록 경상도 감영에 명령하였던 모양이다. 감사 조희일이 이 서책을 인쇄하는 데 쓸 종이를 각 고을에 배정하여 거두어들었다. 우리 예안현에는 숙후지(熟厚紙) 6권, 후백지(厚白紙) 12권, 백지(白紙) 6권 등 총 24권을 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가뭄에 백성들의 요역이 더욱 많아졌으니 괴로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태평어람』과 『자치통감』은 올바른 정치를 가르치는 역사책인데, 이런 책들을 백성의 고혈로 찍어내고 있으니 황당한 마음도 드는 김령이었다.

“ 7년 간 휘두른 영의정의 무소불위 권력, 서서히 막을 내리다 ”

김령, 계암일록,
1608-01-29 ~ 1608-03-29
1608년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동궁을 모위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충주의 진사 이정원과 경상우도의 하성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 했다고 한다.
영경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 성난 평양 백성들, 목숨 걸고 왕의 피난길을 막아서다 ”

정탁, 피난행록,
1592-05-07 ~ 1592-06-09
1592년 5월 7일, 선조는 왜적들의 난을 피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후 선조는 정치적으로 여러 인사를 단행하였다. 비록 여러 가지로 정세는 어수선했지만 선조는 평양에 머물며 백성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과거를 실시하여 군사들을 충원하려 하였다.
그런데 6월 1일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이르렀다. 행재소의 경계는 삼엄해지고 급한 마음에 선조는 파직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다시 불러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여유로운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동강이 적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선조는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6월 6일 내전(內殿)과 세자빈을 보다 안전한 함흥부(咸興府)로 곡절 끝에 보냈다. 또한 명나라에서 온 관료들을 맞이하여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 규정을 위반한 좌수, 마을의 논의를 통해 파직되다 ”

김령, 계암일록,
1620-07-09 ~ 1620-11-20
온 동네가 좌수 이협(李莢)의 이야기로 어지럽다. 그의 죄상이 매우 심각했던 것이다. 지난 6월 15일에 여러 사람들이 도산에 모였는데, 고을에 문서를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내쫓기로 했으나 일단 유보하였다. 이협은 이 소문을 듣고서야 병을 핑계대고 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머지않아 이협은 좌수직에서 내려왔다. 김령은 침락정(枕洛亭)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이 소식을 들었는데, 이를 들은 자들이 모두 다행스럽고 시원해 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죄를 바로 잡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협이 좌수직에서 내려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별감 황유문(黃有文)이 왔다. 좌수 자리에 누구를 천거할 것인가를 의논하러 온 것 같았다. 이 날은 향임들이 모여 그동안 사용한 대동포(大同布) 공물의 여러 가격을 조사해보았다. 그랬더니 이협이 항상 규정 이외로 백여 필을 소비한 것이다. 이밖에도 자잘하게 규정을 위반한 것이 실로 헤아릴 수 없다. 듣고 보니 놀랍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닌 것이 없었다.
겨울이 되었다. 별감 신진부(申盡夫)가 이협의 죄를 정하는 일 때문에 물으러 왔는데, 훼가출송(毁家黜送)은 심한 것 같았다. 그 밖의 벌은 어떤 벌도 괜찮다고 생각되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