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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테마파크를 쓰다

선 넘는 모임

행동강령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에피소드 1에서 박상민, 조태훈 그리고 염미정은 카페 창가에 일렬로 나란히 앉아 있다. 사내 동호회 가입 압박에 시달리던 세 사람은 ‘해방클럽’이라는 동호회를 결성하고, 첫 모임을 하는 중이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세 사람, 그들이 만든 ‘해방클럽’의 행동강령은,

1.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2.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3. 정직하게 보겠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출처: JTBC)


부칙은 ‘1. 조언하지 않는다. 2. 위로하지 않는다’ 이다. 강요된 소속감에 반기를 들 듯 ‘해방클럽’의 행동강령은 직장인의 사회적 가면을 벗기고 시작한다. 행복한 척, 불행한 척하지 않고, 조언하거나 위로하지 않으며 정직하게 사회생활 하는 것이 가능할까?

에피소드 7에서 ‘해방클럽’ 참관을 온 사내 행복지원센터 소향기는,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시계를 본다는 박상민의 말을 듣고, 위로를 건넨다. 우리는 《나의 해방일지》 속 소향기처럼 때때로 타인의 삶에 대해 억지 공감과 영혼 없는 위로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혹은 그렇게 해야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방클럽’의 행동강령과 부칙은 쉬운 것 같지만 지키기 어려운 규칙이다.

《나의 해방일지》 속 염미정의 주변 인물 중에는 탱고·탁구·볼링·등산 같은 운동 동호회나 연극·뮤지컬·영화 같은 관람 동호회 혹은 독서 토론·에세이 쓰기·낭독회 같은 독서 동호회 등을 두세 개씩 하는 열정 부자들도 많다. 드라마 아닌 현실 속 사람들 또한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유대감을 형성한다.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모임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길 바란다. 이러한 지속적인 관계 맺기를 위해서는 구성원들 간에 합의된 모임 규칙이 필요하다.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와 각자의 열망이 담긴 모임 규칙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지혜다.




녹동정사의 규약(規約)


1852년 11월 11일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 1759~1789)을 제향하기 위해 만든 녹동정사에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기로 약조하였다. (……)

一. 공사원(公事員) 1명과 유사 2명을 선출하는 일, 공사원은 2년의 임기로 한다. 유사는 1년의 임기로 하되, 보자[寶上]를 혹시라도 다 받아내지 못했을 경우에는 유임한다. (……)

一. 3년마다 사람을 추천하여 가입시키는 일, 세 번 참여한 사람은 바로 명부에 기록하고, 2번 참여한 사람은 권점을 쳐서 참여시키되 연한은 25세로 한다. 회원이 30명 미만일 때는 천거하지 않는다. (……)

一. 나이 순서로 자리에 앉되, 오직 당상관에 이른 사람은 나이에 구애받지 않을 것. 유사는 별도로 앉는다. 건너편에 피하여 앉는 자는 유사의 아래에 앉힐 것이니, 나이가 비록 많더라도 유사의 위에 앉힐 수는 없다. (……)

『괴담입향시일기(槐潭入享時日記)』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괴담입향시일기』〉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괴담입향시일기』는 1852년 11월 11일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 1759∼1789)의 신주를 ‘녹동정사’에 봉안할 때까지의 과정과 규약 및 처벌 조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일기에는 녹동정사 건립의 실무를 담당할 임원을 선출하고 그들의 임기에 관한 조항이 기록 되어있다. 향교나 서원에서 일하는 공사원은 1명이 2년 동안, 모임의 경리·연락·문서 작성 등의 업무를 하는 유사는 2명이 1년 동안 맡게 된다. 단, 빌려준 곡식의 이자를 다 받지 못한 유사는 연임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녹동서원〉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모임의 자리 배치에 관한 조항이 인상적이다. 벽을 등지고 출입문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나 경치가 좋고 시야가 탁 트인 가운데 자리가 상석으로 여겨지는데, 연장자거나 당상관에 오른 고위직의 회원은 상석에 앉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신규 회원 모집 방식이 흥미롭다. 회원 추천제는 기존 회원의 추천을 통해 신규 회원을 모집하는 시스템이다. 기존 회원이 신규 회원을 보증함으로써 신규 회원에 대한 긍정적인 후광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다른 회원들은 신규 회원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며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회원들끼리의 결속력을 강화하여 모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녹동정사에서는 3년마다 기존 회원의 추천을 받아 신규 회원을 가입시키는데, 세 번 참여한 사람은 명부에 기록했다. 이는 지속적인 참여가 회원의 중요한 덕목임을 말해준다. 회원이 30명 미만일 때는 새로운 회원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두었는데, 이는 조직의 규모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회원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방식은 안정적인 모임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성곡동회 회원이 되고 싶은 노상추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카 정엽(珽燁)과 성곡동회(省谷洞會)에 갔다. 이왕 고향에 내려왔으니 이번 기회에 성곡동의 계 좌목(座目)에 이름을 올리고자 한 것이었다. 동사(洞舍)에는 상존위 조명여(趙命汝), 박지원(朴之源), 도완모(都完謨)가 모여 있었다. 노상추가 다른 계원들은 언제 오느냐고 묻자 다른 계원들은 오지 않을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 계모임은 아무래도 파투 난 듯하다.

낭패를 보고 집으로 돌아온 노상추에게 인척 정유건(鄭惟健)과 정유경(鄭惟儆) 형제가 와서는 다른 계원들이 노상추가 계에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계원인 김이옥(金理玉), 김수옥(金粹玉), 윤형로(尹衡老)가 계모임에 오지 않은 것이었다. 두 김씨는 노상추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윤형로는 들에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미리 추가로 계원을 받지 말자고 뜻을 모아 결정했다고 한다.

노상추는 어이가 없었다. 부친 노철과 형 노상식이 이미 50년 전에 계에 이름을 올렸고, 노상추도 계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29년 전에 상존위를 역임했다. 그리고 노상추의 역할을 조카 정엽이 대신한 것도 28년에 이른다. 노상추보다도 늦게 계에 들어온 사람들이 감히 노상추가 계에 이름을 올리고 말고를 결정하다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노상추(盧尙樞),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를 재구성하여 쓰다.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노상추는 조카 정엽과 함께 성곡동회에 참석했지만, 모임 장소에는 세 사람만 있었다. 몇몇 회원들이 불참하여 그날의 모임은 무산되었다. 뒤늦게 노상추는 자신이 성곡동회 회원이 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이 추가 회원을 받지 말자고 뜻을 모으고, 그 결정을 관철하기 위해 단체로 모임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상추의 아버지와 형은 50년 전부터 성곡동회의 회원으로 활동해 왔고, 노상추 자신도 이름만 올라가지 않았을 뿐 성곡동회를 위해 노력해 왔는데, 자신보다 늦게 온 사람들로부터 따돌림당한 사실이 어이없었다.

모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회원 간의 합의가 매우 중요하다. 기존 회원들이 반대하는 인물이 모임에 들어오게 되면, 회원들 간의 불화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모임의 지속적인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과거에 성곡동회의 일원이었던 노상추네 집안이라 하더라도, 현재 그 모임을 주도하는 세력이 사회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여론은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 모임의 목적과 방향에 부합하는 인물을 영입하고자 한 회원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명분 없는 집단 따돌림은 폭력이다.




녹동정사의 처벌 규정


- (……)
- 이웃에게 우호 있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
- 쟁송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 언행이 패려 하고 악한 사람.
- 조약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
- (……)
이상은 상벌(上罰)로 퇴출시킨다.

『괴담입향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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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입향시일기』에는 녹동정사에 등록된 회원들이 서로 지켜야 할 규범을 정하고, 이를 위반했을 때의 처벌 조항을 마련했다. 이 조항은 위반 행위의 정도에 따라 상벌(上罰), 중벌(中罰), 하벌(下罰)로 나누어 처벌했다. 특히 상벌의 경우, 가족과의 화목을 지키지 않거나 이웃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켰다. 말과 행동이 거칠고 사나워 이웃과 종종 분란을 일으키며, 자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손해 보기를 싫어해 소송을 즐기는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김택룡 이야기를 들어보자.

1616년 3월 4일, 택룡은 동네의 여러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남의각·남신각 형제와 그들의 아버지 남산곡이 동네를 능멸한 것과 그들이 택룡의 아우 김기룡을 고소하여 곤장을 맞게 한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택룡은 그들을 동네의 구성원 자격을 박탈[삭적(削迹)]하고 먹고 마시는 연회에도 참석 못 하게 하여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처리를 동네 규약[동헌(洞憲)]에 의거 하여 명분을 내세우며 시행했다.

김택룡(金澤龍),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를 재구성하여 쓰다.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김택룡은 동네 규약에 따라 남산곡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동네 구성원 자격을 박탈했다. 이는 그들이 동네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깔보았으며, 김택룡의 동생을 고소하여 곤장을 맞게 했기 때문이다. 김택룡은 남산곡 부자에 대한 처분이 규약에 명시된 바에 따른 정당한 조치였음을 밝히며, 이들을 마을에서 고립시켰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을 것이다.

- (……)
- 하는 말이 긴요하지 않은 사람.
- 좌중에서 떠들고 시끄럽게 하는 사람.
- (……)
이상은 하벌(下罰)로 면전에서 꾸짖는다.

『괴담입향시일기』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공적 모임에서 가십을 퍼뜨리며 사담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분위기를 어지럽히고, 좌중을 시끄럽게 하며 자신들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즐긴다. 이들의 주도에 따라 대화가 진행되면 모임은 삼천포로 빠지고, 모임의 취지는 흐려진다. 나는 혹시 알맹이 없는 잡담으로 소중한 타인의 시간을 침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며, 노상추가 참석한 기로회 모습을 들여다본다.

계회가 거행될 때면 술과 음식을 차렸다. 하지만 늘 술이 문제다. 술을 마시고 취해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많은 것이 노상추는 늘 못마땅했다. 그래서 근년에는 술 대신 흰 떡국을 차려서 대접하니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일이 없어져서 계회의 진행도 순조로웠다.

노상추, 『노상추일기』를 재구성하여 쓰다.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83세의 노상추는 기로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들 둘과 함께 용화전에 갔다. 아침 식사 후 계회가 진행되었고, 이번에는 술 대신 떡국이 나왔다. 사실, 계회에서 술은 항상 문제였다. 술을 대접하면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상추는 이제야 계회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만족스러웠다.


〈《이기룡 필 남지기로회도(李起龍 筆 南池耆老會圖)》〉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금주령 시행 중에도 몰래몰래 술을 마시던 우리, 계회에 술이 빠질 수 없다. 권별(權鼈)은 “오늘은 문중의 계회 날이었다.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이봉이 이망(以望)의 집에서 계회를 열었는데, 크게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기보·덕성 등 5~6명이 술을 가지고 초간에 갔다. 나 또한 술을 가지고 올라갔다. 저녁에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이곳으로 와서 취하도록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중계를 행하였다”라고 『죽소부군일기(竹所府君日記)』에 (권별, 『죽소부군일기』를 재구성하여 쓰다.) 더보기 기록했다. 권별처럼 적당히 마시는 술은 모임의 분위기를 띄우고 웃음과 즐거움을 주지만 ‘적당히’ 애매하게 마신 술은 종종 말실수를 낳고 싸움을 일으킨다. 말 많고 탈 많은 술, 노상추가 참석한 계회에서 술 대신 떡국을 내 온 것은 현명한 대처였다.




선 앞에서


배달 앱의 주문 내역, 즐겨 듣는 음악, 그리고 대출 중인 도서 목록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이듯, 내가 가입한 모임이 나를 말한다. 과거의 나는 독서 토론, 시·소설 창작, 시 낭독회, 학교 도서관 봉사회 등의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했다. 그때의 내 관심사는 ‘이야기’였고, 다양한 방식으로 내 이야기를 담고 풀어내며 활동했다.

현재 나는 간헐적으로 '미니멀 라이프' 온라인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이 카페는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취향이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으면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라서 좋다. 자랑이나 험담, 정치, 종교, 광고 및 협찬, 이벤트와 공동구매 등 모임의 취지와 맞지 않는 '금지 글'에 대한 규정을 정하고 이를 준수하려는 카페 운영자와 회원들의 노력 덕분에 '미니멀 라이프'는 편안한 커뮤니티가 되었다.

복닥복닥한 세상이 갑갑해 혼자 있고 싶다가도 여럿이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살고 싶다. 그래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가지가지의 모임을 만든다. 사람이 모이는 곳엔 규칙이 있고, 합의된 규칙은 우리를 안전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슬아슬하게 혹은 과감하게 선을 넘는다. 도로 위 중앙선 침범하듯, 타인의 삶에 훅 들어와 자기 멋대로 휘젓고 다니며 선 넘는 행동과 선 넘는 말을 한다. 《나의 해방일지》 속 ‘해방클럽’처럼 선을 지키는 모임에 가입하고 싶다. 그러면 김광계(金光繼) 일족들처럼 모두가 시인이 된 듯 행복하지 않을까?

오시가 되어 각자 가지고 온 음식과 술을 모아 다시 분배하고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며 강회(講會)를 열었다. 노래와 악기도 연주하였다. 모인 인원은 서른 명이었다. 김광계뿐만 아니라 모든 일가 친족들은 좋은 계절에 일가가 모여 집안의 일을 의논하며 친분을 나누니 모두 흡족하고 즐거워했다. 밤이 되자 보름달이 밝게 비추니 정이 더 깊어지고 흥취가 가득했다. 김령 재종숙이 먼저 4운 한 수를 짓자 앞다투어 또 시 한 수가 읊어졌다. 밤이 깊도록 자리가 파하질 않았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를 재구성하여 쓰다.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집필자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아버지께서 문언박의 기영회를 흉내내시다”

『기영회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엄경수, 부재일기, 1708년 3월 10일

1708년 윤3월 10일. 아버지께서 친구들과 함께 필곡에 있는 임감사 댁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시고는 식후에 가마를 타고 갑산부사 성숙 영공 어르신께 함께 가셨다. 얼핏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거 송나라 명재상이었던 문언박이 부필과 함께 모의하여 개최했던 낙사기영회를 흉내내어 나이가 지긋한 친구분들과 함께 잔치하시려는 모양이었다. 문언박의 기영회에서는 모두가 당대의 명사가 모였었다.

오늘 아버지의 기영회에 모신 분은 참판 남필성, 판결사 임당, 참의 임윤원, 감사 임순원, 참판 강선, 판서 강현 어르신이었다. 이분들이 처음 기로회를 결성하시고자 하였는데, 다만 문제가 있었다. 성숙 어르신과 강대감, 임씨 형제분들은 이제 겨우 60세를 넘었거나 아직 60세가 되지 못하신 분들이었다. 기영회를 흉내내는데 옛 규례에 어긋나는 점이 있어 다소 아쉬웠다.

모이신 분들은 서로 규례를 정하고 자리 순서를 정하느라 분주하셨다. 서로 나이나 관직으로 자리를 양보하기도 하고, 나이가 적은 어른들은 서로 말석을 차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이처럼 예로 서로 모여 유흥을 즐기니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김령, 계암일록, 1603년 9월 28일~1619년 10월 4일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9월 26일, 아침에 참이 와서 연포(軟泡)를 만들어 반찬으로 나누어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 김시량(金時亮)이 와서 여러 사람들과 놀며 이야기했다. 저녁이 되어갈 무렵에 이운(李芸)과 서원의 사람[院人]이 왔는데, 서원에서 김령의 사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정장(呈狀)을 되돌려 주었다. 김령 일행은 이날도 유숙했다.

1619년 10월 4일, 김령은 밥 먹을 때 연포(軟泡)를 만들어 북대(北臺)에 올라가 둘러보았다. 다시 강물을 건너 노천을 둘러보았는데, 새로 큰 집을 지어놓았으니,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할 만했다. 운암(雲巖) 앞 천석(泉石)을 거닐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개와 이지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차례로 방문했다.

숙경.자개와 함께 이지의 집에서 잤다. 숙경이 온 것은 본래 김령 무리를 찾아보고 또 도산 서원에 가기 위함이었는데, 청량산을 본 적이 없다 하자 김령이 충동해서 가게 했다. 숙경이 산행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도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나는 짐짓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고 허락하지 못하고 있었더니, 숙경이 심하게 졸랐다.

“끈끈한 과거급제 동기 모임”

금난수, 성재일기, 1580년 1월 13일~1580년 4월 24일

1561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던 금난수는 그 해에 함께 입격한 여러 동기들과 서로 도와가며 친밀하게 지내 왔다. 1580년 새해에도 생원시 동기인 구효연(具孝淵)을 찾아가 함께 눈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밤이 되어 떠나려는 금난수를 자리에 다시 앉힌 것은 김복일(金復一)과 이교(李㝯)였다. 김복일은 이황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이고, 이교는 이황의 조카였다.

손에 손마다 술을 들고 찾아오니 이날 밤은 일찍 자기는 틀렸다는 생각에 함께 어울렸다.

금난수가 다시 사마시 동기와의 연을 생각하게 된 것은 4월에 개성에 갔을 때였다. 문충공 서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둘째 아들 금업을 만나고, 서원에서 유숙하기로 하였다. 금난수가 서원에 아들을 맡겨놓은 이유 중 하나는 서원의 원장이 곧 금난수의 사마시 동기인 김지(金漬)의 아우인 김유(金濡)였기 때문이었다. 개성뿐 아니라 금난수의 동기들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금난수가 봉화에 갔을 때에는 그곳에 사는 박대임(朴大任)을 잊지 않고 찾아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동기였기 때문이었다.

비단 금난수와 그 동기뿐 아니라 어렵고 힘든 과거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끼리는 동병상련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기 때문에 일종의 동기 모임인 동기계를 만들어 소속감을 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이러한 계에서 특별히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것이 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팍팍한 관직생활 속에서 동기라는 의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형제와도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마음에 큰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봄날의 낚시 모임 - 노천에서 회와 어탕을 즐기다”

김령, 계암일록, 1621년 4월 22일~1621년 4월 29일

1621년 4월 22일, 봄이 한창이었다. 김령은 벗들과 물고기를 잡기로 약속을 하였다. 일부는 어정(漁丁)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였고, 김령은 남은 몇몇 지인들과 침락서당(枕洛書堂)에 들렀다가 합류했다. 사람들은 느즈막 할 때까지 잡은 고기로, 회를 치기도 하고 끓이기도 했다. 술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이 낚시 모임은 일주일 후인 29일에도 열렸다. 여희와 덕여가 어정을 데리고 일찌감치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고, 김령은 정오 즈음해서 나아갔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은 물가의 돌 옆 땅바닥에 앉아서 끓인 물고기와 회를 부족함 없이 먹었다. 이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서로 헤어졌다.

“취미생활, 매사냥을 즐기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년 1월 27일~1625년 12월 2일

1625년 1월 27일, 권별이 키우는 수지니(길들인 매나 새매)가 묶어 놓은 것을 풀고 날아 가버려서 종일 쫓았으나 팔에 내려앉지를 않았다. 날이 저문 뒤에 사불랑 촌에서 팔에 내려앉았다.

1625년 9월 2일, 맑음. 수지니를 놓아서 1마리를 잡았다.

1625년 10월 26일, 이봉(以奉) 형제와 더불어 구계(鷗溪)에 가서 매사냥하는 것을 보았다.

1625년 11월 29일, 맑음. 이른 새벽에 화장(花莊)으로 갔다. 기운이 몹시 편치 않았다. 수지니를 잃어버린 지 2개월쯤 만에 노비의 팔에 내려앉아 간신히 도로 찾았다 하였다.

1625년 12월 2일, 화장에 머물렀다. 의숙(義叔)이 같이 잤다. 이술(而述)은 매사냥하는 일로 들어와서 그와 더불어 같이 잤다. 새 매가 날아 가버려서 잡지 못하였다.

“소년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먹으며 시회를 열다”

고기 바구니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년 6월 20일

1617년 6월 20일, 맑고 몹시 더운 날이었다. 김택룡이 역정에 나가는데 아들 김숙과 생질 정득이 따라왔다. 유사 김개일 · 상사 김회일 · 권전룡 등도 역정에 왔다. 그리고 물고기 회식을 벌였는데, 소년들을 모아 나누어 보내어 물고기를 잡아오게 하고 각기 보리밥을 하고 물고기를 끓여 사람들을 먹였다.

모인 사람 모두는 김택룡의 두 아재인 심신과 심지 · 생질 정득 · 아들 김숙 · 권취중 · 박선윤 · 황유문 · 심학해 · 이춘발 · 손흥선 · 심수해 · 심이달 그리고 관동[丱童, 어린 아이] 6, 7명이었다. 김택룡이 촌료주(村醪酒) 한 동이를 구해서 대접하였다. 그리고 김회일로 하여금 운(韻)을 부르게 하여 김택룡이 정(亭), 병(屛), 정(酲) 자 세 자로 『역정절구(櫟亭絶句)』를 지었는데, 아들 김숙과 그 곳에 모인 여러 공들이 김택룡의 시에 화답했다.

날이 저물어 시회를 파하고 헤어졌다. 김회일은 지장리(紙匠里)로 가고, 김개일은 심 봉사 집에서 잤다. 숙도 김회일 공을 따라 지장리에 가서 잤다.

“딸의 만류로 문중 모임에 늦어버리다”

1631년에 태어난 관리의 친목모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최흥원, 역중일기, 1759년 9월 30일

1759년 9월 30일. 최흥원은 아침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최근 며칠 최흥원은 석전 마을에 있는 딸의 집에 머물렀다. 인근 지인의 상가를 조문하는 길에 들렀다가 딸의 집에서 며칠 묵게 된 것이다. 이제 제법 큰 외손자도 만나보는데, 제법 아이의 품성이 착하고 아름다워 마음이 흐뭇하였다. 사위가 다소 잔병이 있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딸의 집안은 대체로 큰일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본래 문중의 모임이 있는 날이라, 최흥원은 본래 어제 길을 나서 문중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쉬이 놓아 보내주고 싶지 않은 딸이 최흥원을 간절하게 울며 붙잡는 것이 아닌가. 어미를 일찍 여의고 부모라고 살아있는 사람은 애비인 최흥원뿐이니, 최흥원은 새삼 딸의 만류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결국 하루를 더 묵고 오늘 아침 일찍 길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임 장소까지는 역시 먼 길이어서, 이미 도착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행히 문중의 모임은 끝나지 않았는데, 최흥원을 보자 사람들이 모두 꾸짖으며 역정을 내었다. 최흥원이 늦은 것도 문제였지만, 집안의 동생 중 아무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무안한 마음에 얼굴이 벌게진 최흥원은 사람들에게 거듭 사과를 하였다. 문중에서 재사를 지을 일을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무안해진 최흥원은 마음속으로 빨리 회의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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