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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 연대의 마음을 고취시키다

1. 들어가며


우한에서 발발한 코로나19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의 풍경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우한의 문제로, 중국의 문제로, 그리고 한국으로 유행이 번진 이후 신천지와 대구 경북의 문제로 여겨졌던 코로나19는 지구 건너편의 유럽과 미국으로 번지는 중이다. 고령자도, 젊은 사람도, 누구도 전염병으로부터 예외가 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연대의 마음으로 우리 모두 조심하면서 전염병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생활에서 실천한다. 되도록이면 외출을 삼가하고, 어쩔 수 없이 외출할 때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종교 행사 등 대중 집회를 취소하고, 술집과 클럽, 카페 등 사람들의 교류 장소를 폐쇄한다. 근대 사회와 자본주의가 강제해 온 사람들 간의 교류를 이렇게 인위적으로 늦출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춘 존재가 전염병 외에 또 있을까? 강력하게 교류를 자제하면 할수록 우리가 연결된 존재란 점을 전염병은 더 할 나위 없이 각인시킨다.

출처_질병관리본부


'사회적 거리두기'는 안전한 나(그리고 가까운 가족) 만의 공간, 집을 필요로 한다. 집이 없는 거리나 시설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노숙인, 요양시설 거주자, 병원의 환자들은 코로나19와 같은 호흡기전염병에 더욱 취약하다. 그러나 집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가족끼리라도 같이 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가까이에서 대화 나누면서 '밀접 접촉'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전염병 유행 앞에서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는 시민이 실천해야 할 강력한 의무로서 요청되고 있다. 그러나 거리두기의 결과일 단절과 고립의 느낌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 괴로움으로 다가오기 쉽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화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관계맺기는 더욱 긴요하게 필요하다. 온라인 테크놀로지가 발전한 오늘날에는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사회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가능하지만 과거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격리와 거리두기에 관한 과거의 기록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 공포로 오늘날에도 생생한 목소리로 전해져 오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의 두려움만큼이나 연대와 돌봄을 통해 고통을 나누는 모습도 곧잘 찾아볼 수 있는 과거의 모습이다. 돌봄을 제공하는 이웃, 사회, 더 나아가 국가는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다. 질병의 위력 앞에서 사회와 이웃이 어떻게 아픔을 나누었는지 과거의 모습을 오늘날 코로나 19 유행에 빗대어 살펴보자.


2. 거리두기를 하더라도 돌봄은 필요하다.


조선시대에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있었을까. 실록에서 보듯이, 활인서(活人署)에서 출막(出幕)이라는 임시 시설을 성 밖에 두고 전염병 환자를 별도로 이 곳에 격리하여 환자들을 돌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설에는 전염병 환자만 머문 것은 아니었고 역병의 유행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병원과 같은 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궁핍을 견딜 수 있는 이들은 금난수(琴蘭秀·1530~1604)의 기록처럼 집 안으로 환자를 들여 돌보았다. 그리고 떠날 수 있는 이들은 다른 곳으로 보내어 전염을 막으려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유민(流民)들은 전염병을 더욱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염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며느리라도 아픈 아들을 간호하지 못하게 만류하는 모습은 코로나 19 때 자가격리 대상자로 지정되면 가족이라도 마주보고 대화하지 못하게 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역병 때 아픈 이를 돌보려는 인지상정은 전염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늘 상존하였다.

남편을 살린 아내의 간호  더보기
금난수, 성재일기(惺齋日記), 1579-03-02~1579-04-08


출처_스토리테마파크


3. 자발적으로 구휼에 나서다.


질병이나 재난의 위기가 깊어지면 평상시에 활용할 수 있는 의료 자원이 한계를 드러낸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의창(義倉)과 같은 관청에서 직접 죽이나 양식을 무상분급하기도 하였으나 16세기 들어서는 비축 곡물이 부족하여 사족이나 부민(富民)의 사적 구제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存愛院)의 예처럼 국가의 통치 권위가 약해지거나 기대기 어려워지는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병들고 굶주린 이들을 돌보려는 민간의 유지가(有志家) 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자발적으로 백성을 구제하려는 이들의 모임은 환난 시기의 궁핍을 버텨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코로나19 유행에서는 부족한 의료 자원을 메꾸기 위해 숙소나 급식, 마스크, 가운 등 자신의 자산을 무상으로 기부하는 모습, 그리고 위기에 처한 취약 계층 복지를 돌보기 위한 시민들의 연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난은 공동체의 위기이나 한편 그 사회의 자발적인 연대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작동한다.

존애원을 설립하다  더보기
이준(李峻), 존애원기(存愛院記), 미상


존애원, 임진왜란 뒤에 질병퇴치를 자치적으로 해결하고자 1602년에 성람, 정경세 등이 설립한 사설의료기관
출처_스토리테마파크


4. 벗들과 곁을 나누며 위로하다


질병의 고통은 물리적 신체적 고통만이 아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 결과를 알 수 없음에 따른 불안 모두 온전히 본인만이 겪어내어야 할 몫이다. 코로나 19처럼 새로운 전염병은 질병의 경과에 대해 알려져 있는 것이 많지 않기에, 불안과 두려움은 더욱 가중된다. 전염병으로 가족을 만날 수 없다면 고립의 아픔도 더해진다.

만약 아픈 이가 가족이거나 가까운 이라면 돌봄의 부담도 커진다. 환자의 아픔뿐만 아니라 옆에서 돌보는 가족의 아픔도 질병의 현장에서는 늘 같이 어루만져야 할 대상이다. 고통의 본질은 혼자만 겪어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위로를 통해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면 조금 더 든든하고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질병 당시에는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환난이 지나간 후에 볼 수 있는 님의 얼굴이 있다면 조금은 견디기가 쉬워진다. 조선시대 전염병을 피해 피신한 김광계는 아픈 가족 소식을 듣고도 만나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제종숙 김령을 만나 고생한 이야기를 나누고 회포를 풀면서 위로하였다는 이야기는 훈훈하다. 같은 전염병을 겪을 때에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도 많아지는 법이다.

김령을 만나 서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며 위로하다  더보기
김광계(金光繼), 매원일기(梅園日記), 1616-05-07~1616-05-10


5. 국경을 맞댄 이웃과 교류를 통해 서로 돕다.


질병이 유행하면 국경을 맞댄 검역과 교역 단절 등으로 이웃 국가와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나 한편으로는 물자, 인력, 그리고 질병 대응 기술을 교류하면서 상부상조할 기회가 늘어나기도 한다. 코로나 19 유행 초반에 중국으로부터 교역 검역을 강화하면서 마찰 가능성이 있었던 것, 최근 일본과의 여행 및 교역 중단 등은 전염병 유행이라는 비상시국에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질병은 한 사회의 의료 수준을 보여주는 기회이자 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코로나 19 유행에서 한국 사회의 진단 검사 동원 수준에 대해 많은 국가가 찬사를 보이며 서로 도입하고자 하는 모습은 좋은 예가 된다. 전염병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각국은 필요한 기술과 물자를 서로 교역할 필요가 있으며, 좋은 의료 기술과 약재는 전염병 위기에 더욱 긴요하게 나누어야 할 대상이다. 조선시대 청나라에서 조선의 침술을 좋은 기술로 높게 평가하여 수입한 것에서 과거의 예를 찾을 수 있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더보기
정태화(鄭太和), 임인음빙록(壬寅飮氷錄), 1662-09-29~


출처_스토리테마파크


6. 나가며


병원체로서의 바이러스의 전염은 인류라면 남녀노소, 계급에 상관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는 바이러스에 대한 노출을 인간 사회의 '공통의 것'으로 만든다. 우한의 것이었던 소위 '우한 바이러스'는 이제 인류 공통의 '코로나 19'가 되었다. 전염에 대한 노출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이 공평하고도 동등한 경험이다. 그러나 질병에 대한 경험은 온전한 개인의 경험이다. 자가격리자나, 확진자나, 밀접접촉자 또는 그 근방에 노출된 자, 사회적인 위치 차에 따라 질병은 주관적으로 경험된다. 매일 좁은 직장에서 근무해야 하는 자, 요양병원 등 집단시설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는 질병을 겪어내는 경험은 다르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바이러스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질병의 유행은 인간의 취약성을 경험하는 현장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취약성의 경험은 연대할 수 있는 이웃의 존재를 소중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더 안전한가, 아니면 더 위험해지는가. 서로를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나누어 힘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할 수 있는가. 질병에 대응하는 기술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전염에 노출되는 개인들이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집필자 소개

최은경
최은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문의학교실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감염병과 인문학>, <의학의 발전과 근대병원의 탄생> 등의 저술과 <콜레라는 어떻게 문명을 구했나>의 번역에 참여하였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오?”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허벅지 살을 베어 동생을 살린 미담이 전해지다”

박한광, 박득녕, 박주대, 박면진,
박희수, 박영래, 저상일월,
1922-05-15~

1922년 5월 15일, 박면진은 오늘 날씨처럼 상쾌한 소식을 들었다. 경주의 각산 마을에 박종필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동생이 화상을 입고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이 박종필이란 사람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서 아우를 치료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괴이한 사고와 인륜을 저버린 이야기들만 가득한 세상이었는데, 그야말로 인륜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장한 일이었다. 그런 느낌은 박면진 뿐만이 아니었는지, 벌써 사람들은 시를 지어 이 박종필이란 이를 칭송하고 있었다. 박면진은 소리 내어 이 시를 암송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 개자추는
허벅지를 베어서
임금님의 굶주린 배를 채워드렸고
지금의 박종필은
살을 깎아
앉은뱅이 아우를 일으켰네
그 임금과 신하에게는
의리가 소중하였고
이 형과 아우에게는
우애가 돈독하였네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 말하지 마라
저 하늘처럼
끝없이 빛나리라

“권문해,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돌보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7-07-01~1587-08-09

1587년 7월 1일, 권문해는 관아에 나아가 일을 보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3년 전 맞이한 두 번째 부인 함양 박씨가 몹시 아팠기 때문이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오른쪽 무릎에 독기가 몰려 구부렸다 폈다 하지를 못하였다. 이날은 아내에게 냉약(冷藥)을 쓰고, 또 침을 써서 터뜨렸다. 권문해는 다음날에도 관아에 나아가 잠시 공부를 수행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 곁을 지켰다. 그 다음날도 권문해는 오한과 발열과 함께 고통을 참아내는 아내 옆을 지키며 간호하였다.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보살폈지만 아내의 증상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타 들어가는 권문해는 칠곡에 사는 품관 이함(李諴)이 부종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청해오도록 하였다.
7월 12일, 이함이 궁중에서 파견된 약재 검사관 이운영과 함께 왔다. 이함과 이운영은 아내의 병을 습사(濕邪)로 인하여 온몸이 붓는 것 같다며, 부종에 효험이 있다는 곳을 찾아 가 보라고 하였다. 이에 권문해는 아내를 데리고 그 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서도 말하길 ‘혈종이 아니고 습종이다.’라고 하였다. 아내 함양 박씨의 무릎에 침을 놓아 피를 빼고, 대강활산(大羌活散)을 지어 먹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내의 통증은 계속되었다. 찌르는 듯 한 통증을 참는 아내를 보는 권문해의 마음도 찢어졌다. 권문해는 수소문한 끝에 문경에 사는 내금위 진곤(陣崑)이 부종을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아내를 치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아픈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

김광계, 매원일기, 1626-10-18

1626년 10월 18일, 김광계는 밤까지 등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누웠다. 까무룩 잠이 들려는데 바깥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문고리를 두드리더니 곧장 대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한숨 같은 소리가 들려와 누구냐고 몇 번이나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의문의 침입자는 곧이어 중문까지 열어젖혔다. 김광계는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침입자는 곧장 김광계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두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김광계는 한참 살핀 뒤에야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오랜 친구 이지형이었다. 본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뱃놀이도 즐기고 술자리도 가지며 절친하게 사귀던 사이였으나, 1623년 이지형이 그만 풍증(風症)이라 불리는 정신질환 증세를 나타내면서 왕래가 끊긴 지 이미 몇 년째였다. 정신질환의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던 이 시기 정신질환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가족에 의해 감금되어서 오래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지형 역시 집안 사람들에 의해 갇혀 있었는데 어쩌다 틈을 타 탈출해서는 가까운 거리도 아닌 친구의 집까지 용케 찾아왔던 것이다.

“김령을 만나 서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며 위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6-05-07~1616-05-10

1616년 5월 7일, 전염병을 피해 가족들을 천남(川南)으로 피신시켜 놓고 김광계는 며칠 전 능동재사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막내아우 이직(以直)이 설사 증세까지 생겼다고 해서 몹시 걱정을 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마을로 가 보았다. 그러나 마을은 전염병 기운이 여전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노산(蘆山) 재종조부 집에 가서 약재를 얻어 들여보내기만 한 후 답답한 마음에 그길로 설월당(雪月堂)으로 향했다. 김령 재종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재종숙 김령은 지난 1월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만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전염병 때문에 가족들을 챙기느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월당에 도착해보니 덕여(德輿) 형 형제와 김참(金墋) 아재, 이일도(李逸道), 임지경(任之敬), 이의적(李義迪)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는데, 수재 전치(全偫)도 있었다.

“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4-06~1616-08-12

1616년 4월 6일, 이행이 정임수와 함께 왔다. 정임수에게서 아들 김적의 천식약인 담박호(痰剝蒿)를 구했는데 찾아서 온 것이다.
5월 15일, 이날 저녁 김택룡이 큰 아들 김숙이 산양으로 출발했다. 동생 김적의 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6월 20일, 아침 무렵 중소(重紹)가 산양(山陽)에서 와서 김택룡은 아들 김적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편지를 보니 아들의 병이 여전해서 김택룡은 걱정이 깊어졌다. 춘궁기가 이어져서 곡식이 모자란 터라 김택룡은 아들 김적에게 곡식을 나누어 보냈다.
7월 24일, 산양에 사는 아들 김적의 병이 중해서 그 집의 노비인 임인이 왔다. 김택룡은 부랴부랴 의원에 부탁해 무명 한 필 반으로 약을 지어 임인이 돌아가는 편에 보냈다. 김택룡이 들으니 산양의 아들 편지가 영주[榮川(영천)]의 산장(山庄)으로 왔다고 하는데, 산장에서 잊어버리고 자신 쪽으로 전해주지 않고 있었다. 김택룡은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써 있는지 몰라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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