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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웹툰 독(獨)선생전


인정보다 돈 때문에 찾아오는 친지와 지인들


으레 한 고을의 수령이 되면 각지에서 천릿길이 멀다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시달리곤 했다. 삭주 부사가 된 노상추도 예외는 아니었다. 변방인 삭주에서부터 고향인 영남지역까지는 말 그대로 천 리가 넘는 거리였다. 하지만 고향에서부터 친구와 친지들이 꾸역꾸역 찾아왔다. 노상추가 정말 그리워서 찾아온 것이었겠는가. 다 뭔가 얻을 것이 있기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삭주부사의 읍황이 1만 금에 달한다는 헛소문이 퍼져 있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노상추가 쓸 수 있는 하루 읍황은 13냥 5전이니, 다른 고을에 비해서는 수령이 쓸 수 있는 비용이 적은 편이었다.

선산(善山)에서부터 찾아온 옛 친구 박한우(朴漢禹)와 박한주(朴漢柱)는 한참 연락이 뜸했던 사이였다. 그래도 옛 인연이니 다시 보게 되어 기쁘긴 하지만, 어쩐지 갑자기 이렇게 멀리서부터 찾아오는 그 정성 속에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듯해 찜찜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고향에서 올라오면서도 노상추의 집 편지 한 장을 전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말로만 노상추의 집안에는 별일이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삭주에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 조카 정엽을 역참에서 만나지도 못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도 좀 이상했다.

더 노골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서울의 경력 윤홍심(尹弘心)은 남자종 삼득(三得)을 보내 노상추에게 200금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상추는 그렇게 큰돈이 어디 있냐고 탄식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종형(從兄) 최사요(崔師堯)도 노상추에게 돈을 바라고서는 천릿길을 걸어서 왔다가 걸어서 돌아갔다. 노상추가 줄 수 있었던 돈은 그의 여비 정도였으니, 천릿길을 왕복한 것이 다 허사였다.

어째서 만금의 읍황 소문은 그렇게 널리 퍼지는데 막상 가니 얻을 것이 없더라는 소문은 안 퍼지는지, 선달 장지원(張趾元)도, 서울의 선전관 허칭(許稱)도 모두 노상추를 찾아와 돈을 요구하러 먼 길을 왔다. 노상추가 보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그저 돈에만 관심이 있어서 찾아오니 노상추는 도리어 답답해졌다. 허칭은 지난봄부터 겨울까지 거의 600여 금을 받아 갔다. 그의 요구에 응하느라 관아에서 읍채(邑債)까지 졌다. 노상추는 그저 자신이 나라의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94-05-01 ~ 1794-10-27
장소 : 평안북도 삭주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박한우, 박한주, 노정엽, 윤홍심, 최사요, 장지원, 허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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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갑자기 쓰러지다


오늘은 아침부터 채춘령 군이 최흥원을 찾아왔다. 평소 자주 내왕하던 사이였는데, 최근 발걸음이 뜸해 궁금하던 차여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서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고 막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채춘령 군이 혼절하여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은 매우 놀라 어찌할 줄 모르다가, 서둘러 호흡을 확인하고 맥을 잡아 보았다.

그런데 호흡이 희미할 뿐 아니라 맥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대로 두면 바로 목숨을 잃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우선 집안의 종을 시켜 종의 집으로 채춘령을 옮겨 누이도록 하였고, 바로 사람을 보내 그의 조카를 부르고 또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이들이 올 때까지 최흥원은 곁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목숨이 끊어질까 봐 여간 노심초사한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채춘령의 집안에서 사람들이 도착하였다. 이들은 바로 그를 업고 집으로 향하였는데 다행히 채춘령은 그때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채춘령을 업고 가면서 최흥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겼다. 최흥원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둔곡 마을의 한 사람이 최흥원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머물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이번 변고에서 최흥원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 주었다. 일처리가 아주 영민하였는데, 두고 쓸만한 사람 같았다. 최흥원은 채춘령이 집으로 돌아가자, 그를 불러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출전 : 역중일기(曆中日記)
저자 : 최흥원(崔興遠)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53-09-24 ~
장소 : 대구광역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최흥원, 채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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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옷가지를 요청하는 불청객


1754년 5월 26일. 맑은 날씨였다. 어머니 환후는 다행히 어제보다 심해지지 않았다. 오늘 최흥원은 다소 황당한 손님을 만났다. 식전부터 종이 와서 한 과객이 최흥원을 뵙길 청한다는 것이었다. 인근 고을에서 최흥원과 교유하는 사람들의 얼굴이며 이름은 종들도 미리 다 알고 있을 터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처음 최흥원의 집에 들른 손님인 듯하였다. 이름을 알아 와라 종을 다시 보냈더니, 돌아온 종이 하는 말이 횡설수설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괴이하게 여긴 최흥원은 손님을 불러 맞이하였는데, 이 손님이란 자는 갓도 쓰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파주 고을에 사는 이가라고 소개하였는데, 어떤 연유로 최흥원을 찾아왔는지 이야기도 하지 않고는 대뜸 옷가지를 좀 얻고 싶다고 이야기하였다. 최흥원은 불청객의 행사가 몹시 괴이쩍었지만, 혹 자신과 잘 아는 사람의 지인일지 몰라 천천히 이야기를 좀 들어보려 하였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기색을 보니, 참으로 드세고 패악한 부류였다. 최흥원이 최근 듣기에 부모와 형제를 버리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부류들이 있다고 하던데, 이 자가 바로 그런 사람인 듯하였다. 사람으로서 자식 된 도리도 저버리고 떠돌아다니면서 대체 무엇을 얻으려 한단 말인가. 그럴 것이면 차라리 머리를 깎고 산으로 가서 수행할 것이지, 행색은 거지같이 하면서 사람의 도리는 내팽개치는 아주 형편없는 사람들이라 할 만했다.

최흥원은 이 파주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차마 그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정중한 말로 요청을 거절하고 손님을 돌려보냈다. 손님은 돌아가면서도 예의를 차리지 않고 불편한 말들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은 속에서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출전 : 역중일기(曆中日記)
저자 : 최흥원(崔興遠)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54-05-26 ~
장소 : 대구광역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최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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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연이은 술자리로 술병이 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1635년 1월 5일, 손님을 접대하고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는 으레 술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김광계는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인 계화(季華)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계화는 발이 넓었는지 그가 김광계의 집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집안의 친척들과 근처 사는 지인들까지 모두 김광계의 집으로 모였다. 김광계는 별 수 없이 그들을 모두 대접하며 술을 연거푸 마셔야 했다. 술병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635년 1월 30일에도 피병하러 오신 제천의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자개(子開)와 만났는데, 자개는 이날따라 술을 계속 권해 피하지도 못하고 과음을 하고 말았다. 2월의 첫날에 하려고 세워놓은 계획도 무산시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2월 8일에는 사무를 보러 도산서원에 갔는데, 김시추(金是樞)가 크게 취한 채 셋째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인 2월 9일에 김시추와 김광계는 도산서원 앞 누대인 천연대에 올라가 또 술을 마셨다. 김시추가 아직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랬는지 멋진 경치에도 불구하고 술은 조금만 마셨다. 하지만 다음날에 김광계는 숙취에 시달리게 된다.

2월 12일에는 사숙과 함께 또 술을 예닐곱 잔 정도 마시게 되었다. 밤새도록 술기운에 괴로워 잠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엔 일어나는 것도 힘겨웠다. 김광계는 술 마시는 일을 경계해야만 한다고 반성했다. 하지만 반성이 무색하게도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난 2월 26일에 김광계는 제사를 지낸 뒤 뱃놀이를 하며 또 술을 마셨다. 너무 취해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연일 손님대접에 거덜 나는 살림살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812-08-01 ~ 1812-08-27

노상추가 부임한 가덕진에는 연일 손님이 드나들었다. 외직에 부임하면 으레 손님을 치르게 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전에 부임했던 갑산은 워낙 멀고 길이 험해서 그런지 손님이 자주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있는 가덕도는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과 왜선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노상추의 친인척은 물론이고 먼 친척과 지인, 그리고 승려들까지 모두 일부러 배를 타고 가덕도까지 들어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노상추를 따라 섬에 들어와 한동안 함께 지내고 있는 아들 익엽은 공무로 바쁜 아버지 대신 손님들을 명승지로 인도하였다. 고향에 있는 암자에서 온 승려들과 손님 두 사람을 데리고 큰 항구와 천수대를 구경시켰는데, 노상추는 한창 관사를 허물고 새로 짓는 공사를 감독하느라 따라가지 못했다. 손님 중 무과 급제자들은 역시 왜선이 궁금한지 일부러 천성까지 가서 정박해 있는 왜선 두 척을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승려들도 보고 싶은 것이 많은지 통영에 가고 싶다고 해서 노상추는 병교가 합험을 하러 타고 가는 배를 함께 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돈 손진악과 손해경도 일부러 바다를 구경하러 찾아왔다.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오는 길에 노상추의 고향집이 있는 화림에 들러서 집 소식을 알아보고 전해주었다. 집안은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노상추는 연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마침 달빛도 아주 밝았다. 그래서 아이 6, 7명도 함께 데리고 두 친구와 함께 진남루에 올라 악공들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밤늦게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그대로 배를 타고 호수도 돌았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노상추는 방으로 조용히 감색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님 접대에 사용한 비용을 정산해 보도록 했다. 감색은 이리저리 계산하더니 원래 진에 책정된 비용보다 400금이나 초과해서 사용했다고 말하였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많은 손님을 접대하느라 노상추는 매일같이 쓰는 일기도 건성으로 썼다. 봄철 이후로 찾아온 손님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니 50명 정도 된다. 많은 손님이 찾아주어 기쁘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손님치레에 소란스러운 관아, 가벼워진 주머니”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02-14 ~ 1794-03-27

노상추가 삭주부사에 임명되자 고향인 선산 등 영남 각지에서, 그리고 노상추가 관직 생활을 하던 도성에서까지 변방인 이곳 삭주까지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의 김영억(金永億)은 노상추에게 자신이 상(喪)을 당했음을 알리고 부의금을 얻으려 1천 6백 리를 산 넘고 물 건너왔다. 지나칠 정도로 대단한 행동력이니, 노상추는 혀를 차면서도 부의금을 마련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김영억에게 돈 150금을 주어서 상을 치르며 진 빚을 갚게 했다. 그런데 김영억과 함께 온 최생(崔生)이라는 자는 이미 삭주에 도착했을 때부터 등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병이 낫지 않아서 김영억과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삭주 관아에 남게 되었다. 최생의 체류에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노상추의 몫으로 남았다. 손님이니 내칠 수도 없고, 그저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먹이고 재워 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반가운 손님도 있기는 했다. 노상추의 손님인 아들 노익엽은 이운경(李運慶)과 같이 첩을 데리고 삭주로 왔다. 노익엽이 삭주로 오면서 군식구도 더 늘었다. 노익엽의 이종사촌, 그러니까 노상추에게는 처조카가 되는 예안(禮安)의 김주옥(金調玉)도 천 리가 멀다 하지 않고 삭주로 왔다. 이 사람은 특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 노상추의 현재 사정이나 형편도 알아보지 않고 온 듯했다. 곤란하게 되었다. 곧이어 조카 노정엽과 내종숙 조석년(趙錫年), 동생 영중도 삭주로 왔다.

자신의 친척과 지인이 수령으로 있는 지역을 굽이굽이 지나치며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대접을 받는 노상추의 친구 이동겸(李東謙) 같은 자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손님이 관아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총 10명이나 되었다. 10명에는 또 따라온 남자종 4명, 여자 종 1명, 겸인 1명이 있었으니 매일같이 관아가 소란스러웠다. 수령으로서 매일같이 해야 하는 업무들도 있었는데 많은 손님까지 신경 써야 하니, 근심스럽고 어지럽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노상추는 손님들을 돌려보내기로 마음먹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기로 했다. 친구 이동겸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주고, 하인과 말을 딸려서 안주(安州)의 중영(中營)으로 보내버렸다. 이국연(李國延)에게도 노자 1천 동을 주어서 보냈는데, 불만스러워하면서 곱지 않은 말투로 툴툴거렸다. 아마도 이동겸에게 해 준 것처럼 하인과 말을 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이국연은 이미 하인과 말을 갖추고 왔기 때문에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 김주옥에게는 1천 7백 동의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냈고, 홍(洪) 군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지(池) 군에게는 5백 동의 노자를 주었다. 이들은 애초에 삭주까지 올 때 걸어서 왔고, 노자를 받아 떠나는 날에도 걸어서 돌아갔다. 손님들이 걸어서 돌아가는 행색이 초라해 보여서 노상추는 자신이 마치 박대한 것처럼 보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도 노상추로서는 새로 부임해서 어렵고 궁핍한 처지에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대접한 것이었다. 이제 손님들이 다 돌아가니, 관아에는 노상추의 정말 가까운 일가붙이만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나흘간의 초례, 손님접대 하느라 술고래가 된 외삼촌 김령”

김령, 계암일록,
1621-02-16(윤) ~ 1621-02-20(윤)

1621년 윤 2월 16일, 영천으로 시집갔던 김령의 누이가 세월이 흘러 사위를 보는 날이었다. 신랑은 류원립(柳元立)군. 신랑을 따라온 손님들 중에는 영천 수령도 있었다. 김령은 누이 부부와 함께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잔치는 다음 날인 17일까지 이어졌고, 손님들은 내리던 비가 그치자 이날 오후 돌아갔다.

윤 2월 18일에는 김령의 자형 전경업(全景業)이 그의 여러 며느리들을 친지들에게 인사시켰다. 지인들이 다음날 향교 재사에 모여 글을 검토하자는 전갈을 보냈지만, 김령은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형과 몇몇 벗들과 함께 어울려 계속해서 묽은 막걸리를 마셨다. 취한 그들은 군내(郡內) 벗의 빈 집, 향교 등으로 자리를 옮기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결국 김령은 벗 중 한 명이 만취해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윤 2월 20일, 초례를 치른 지 나흘 만에 신랑 류원립은 제 집인 임하로 돌아갔다. 김령은 신랑을 보내고 안으로 들어가 자형과 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정오에 문 밖을 나서서,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앓아누웠던 김령, 머리에 빗질을 하고 경상감사를 맞이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2-10-16 ~ 1622-10-22

1622년 10월, 승정원일기 수정작업을 위해 도성에서 두 달 가까이를 머물렀던 김령은 건강이 악화되었다. 10월 중순의 그는 몸이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조리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힘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를 22일 경상도 감사 김지남(金止男)이 방문하였다. 김령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수하고 빗질을 하고는, 감사를 사랑방으로 맞아들여 접대하였다. 조용한 가운데 이야기를 나누며 간혹 술잔을 들었다. 조카와 문중의 자제들도 모두 와서 인사하도록 하였다. 감사는 인사를 나누고는 정오 즈음 안동으로 향하였다. 김령은 자신의 집을 방문해주었던 감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안동으로 아이를 보내 사례하였다.

감사가 떠난 후 김령은 수령을 보러 갔다. 감사의 행차로 인해 수령이 그 부근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수령을 만나고는, 손님들, 친지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흩어졌다. 김령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술을 마셔서 꽤나 취한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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