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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테마파크를 쓰다

함께 채워가는 삶

햇살이 한결 따사로워지고 들판의 이삭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며, 논두렁에는 물이 고이고 밭두렁 위로는 어린 새순이 바람에 흔들린다. 봄이 씨앗을 뿌려 놓은 것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 바로 ‘소만(小滿)’이다. 소만은 24절기 가운데 여덟 번째 절기로, 대체로 양력 5월 20일 무렵에 찾아온다. 글자 그대로 ‘작을 소(小)’, ‘찰 만(滿)’, 즉 ‘조금 찬 때’라는 뜻을 가진 소만은, 만물이 자라서 세상을 채우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 봄의 온기가 대지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만물이 막 기지개를 켜는 시간인 셈이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서 소만을 “비 온 끝에 햇볕이 나니 날씨도 화창하다. 떡갈나무 잎이 피어날 때 뻐꾹새가 자주 울고, 보리 이삭이 패어 나니 꾀꼬리가 노래한다. 농사도 한창이요, 잠농도 방장이라 남녀노소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라고 하였다. 만물이 싹을 틔워 온 세상이 조금씩 차오르는 가운데 농촌의 분주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조선시대 밭작물을 파종하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조선시대 벼농사 모내기하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이렇듯 소만이 되면 농가(農家)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시기에는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하며, 보리를 베는 등 농사일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기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1619년 5월 28일
요즘 농가에서는 비로소 모내기를 한다. 또 보리 수확 철을 맞아 일하느라 무척 바쁘다 보니 사람들이 잠시 틈을 낼 수가 없다. 다만 시절이 너무 늦어버린 것을 생각하니 비록 모를 꼽아 놓더라도 잘 익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김령, 『계암일록』 (출처: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계암일록』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위의 내용은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이 39년간 쓴 일기인 『계암일록(溪巖日錄)』의 일부이다. 들판에 허리를 세우고 있던 보리는 이미 수확되었고, 모판의 어린 모는 이제 막 제 발로 설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위의 내용만 보더라도 농가의 일상이 얼마나 바삐 돌아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쉴 새 없이 바쁘다 보니 모내기 시기가 많이 늦어졌음을 염려하는 일기 내용은, 정신없이 바쁠 땐 작은 도움이라도 요긴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라는 속담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 선조들은 이런 농번기에 두레나 품앗이를 통해 농사일이나 길쌈 등으로 협력하기도 하였다. 두레가 촌락공동체 단위의 집단적 공동 노동이라면, 품앗이는 개인적 교분으로 맺어진 촌락 내의 소집단 성원 간에 이루어지는 공동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농사일의 바쁨과 수고로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혼자의 힘이 아닌 서로 협력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편, 농사일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한창 논에 모내기를 하고 물을 대야 하는 시기인데 가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다음은 노상추(盧尙樞, 1746∼1829)가 쓴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와 해주(海洲) 남붕(南鵬, 1870∼?)이 쓴 『해주일록(海洲日錄)』의 내용이다.

1814년 4월 16일
볕이 남.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특히 심한데, 우도나 좌도를 보면 위아래 지방의 상황이 모두 비슷하다. 모판의 절반 이상이 말라서 명거(椧車, 홈통)로 물을 대는 것은 선산善山부터 밀양密陽까지 가는 곳마다 똑같고 보리가 흉년인 것도 똑같으니, 애처롭고 불쌍한 것이 백성들의 삶이다.……집 뒤의 논에 어제부터 물이 찼으니, 내일은 이앙(移秧)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년 동안 연이은 흉년이 매번 한재(旱災) 때문에 생긴 것이니, 곤궁한 백성들의 처지가 가슴 아프고 딱하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1925년 4월 12일
날이 맑았다. 비가 온 뒤 갠 날이 매우 상쾌하였으나, 오랫동안 가물던 나머지 냇물이 이어 흐르지 않아 봇도랑에 물이 없어 모판이 이루어지지 못하니, 하늘의 뜻이 마침내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남붕, 『해주일록』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전국적인 가뭄으로 백성들의 마음도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있는 순간이다. 임시방편인 줄 알지만 모든 농사꾼이 홈통으로 물을 끌어와 논에 대고 있는 일기 내용은, 선조들의 인내와 농사에 대한 간절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한다.

소만은 이른바 ‘보릿고개’와 맞닿아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보릿고개란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거의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서 농촌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대체로 음력 3월에서 4월 사이, 양력으로는 4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해당하니, 소만 절기가 자리한 양력 5월 20일 무렵은 바로 이 보릿고개의 정점에 가까운 때이다.

1610년 4월 29일
민간에서는 황정(黃精)의 뿌리를 캐어 달여 먹고, 안동 인근 백성들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1628년 4월 20일
비가 오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어 논은 물이 다 마르고 보리는 간혹 누렇게 뜨기도 했다. 백성의 굶주림이 더욱 심하여 마른 웅덩이의 물고기가 입을 벌려 거품으로 서로 힘겹게 적셔 주는 지경이다.

1632년 4월 13일
흉년으로 굶주림이 한창 극심하여 앞다투어 소나무 껍질 벗기는 것을 일삼고 있는 때에 무엇보다 전세田稅를 마련하는 것이 더 고민스럽다.

김령, 『계암일록』 (출처: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끓여 먹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위의 내용은 보릿고개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 들판에는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하지만, 수확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농가에서는 지난가을에 거둔 곡식이 이미 떨어진 지 오래이고, 산과 들에서 나물을 뜯어 허기를 달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보릿고개는 단순히 결핍의 시기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시기는 동시에 새로운 수확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과 희망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농민들은 보리가 익기를 기다리며 산나물을 캐고, 밭두렁의 씀바귀와 냉이를 뜯어 끼니를 대신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선조들의 생존 지혜는 오늘날 봄철 제철 음식 문화의 뿌리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소만 무렵에 즐겨 먹던 냉이된장국, 씀바귀나물, 보리개떡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생태 환경과 식량 사정을 반영한 음식들이다.

이렇듯 ‘소만’이라는 절기는 우리 선조들의 삶과 많이 닮아있다. 우리 선조들은 농번기에 마을 구성원들과 바쁨을 함께하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기에 이웃 간에 음식을 나누며, 가뭄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함께 고난을 헤쳐 나갔다. 이처럼 힘든 시기에 서로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었던 것은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 찬 때’라는 소만의 의미는 어쩌면 혼자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각자의 논두렁을 혼자 지키느라 힘겹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함께 채워가는 삶을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한다.




집필자 소개

류기수
류기수
고려대학교 고전번역협동과정에서 『定齋 柳致明의 「讀書瑣語」 譯注』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원에서 『近庵 柳致德의 「林廬問答」 譯注』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近庵 柳致德의 삶과 경세인식-「林廬問答」을 중심으로-」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는 『국역 안동 묘갈명 Ⅳ』 등이 있다. 주된 관심 분야는 영남학파 및 19세기 현실인식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보리타작 하는 계절”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902년 5월 29일 ~ 1902년 6월 2일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음력 5월 말은 보리타작을 시행하는 계절이다. 보리타작은 모내기가 끝날 무렵 시작되어 장맛비가 오기 전에 타작을 마쳐야 한다. 이우석의 집에서도 타작을 담당할 사람 3명을 고용하여 타작을 했다.

보리를 수확하게 되면 보릿단을 묶어서 당일이나 다음날로 되도록 빨리 보리타작을 해야 한다. 보리가 많지 않을 때에는 집 마당에서 집안 식구끼리 타작을 해도 괜찮지만, 양이 일정 정도 이상 많을 때에는 고용인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우석의 집도 그런 경우였다. 집 마당에서 보리 타작을 하기에는 보리 양이 많았기 때문에 보리를 벤 밭에 임시로 마당을 만들어 타작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 일꾼들은 묶어둔 보릿단을 돌에 내리쳐서 보리 낟알을 털어야 했다. 새끼손가락 정도의 굵기로 된 밧줄로 보릿단을 감아 묶은 이 보릿단을 어깨 너머로 들어올려 내리치는 것이다. 이렇게 묶인 보릿단을 한 바퀴 돌려가면서 낟알을 털어낸 다음, 보릿단을 풀어 바닥에 널어 놓고 도리깨로 두들겨서 보릿단 속에 묻힌 보리 이삭까지 모조리 털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도리깨질을 하면서 타작하는 일인데, 너무나 고된 작업이기 때문에 ‘옹헤야’ 같은 노동요가 보리타작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보리타작을 하노라면 보릿단이 얼굴을 찌르기도 하는 데다 한창 날씨가 더울 때 이루어지는 작업이어서 고되기 이루 말할 데 없다.

“양봉을 시도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8년 5월 7일

1598년 5월 7일, 오희문은 올해 양봉을 해 보기로 하였다. 강원도에서는 벌이 많기도 하였고, 식구들에게 새로운 먹거리도 마련할 겸, 처음으로 양봉을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얼마전 지인에게 몇 개의 벌통을 받았는데, 가져올 때 잘못하여 벌들이 대부분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어제는 신수함에게서 벌통을 받았는데, 이 벌통의 새끼벌들을 오희문의 벌통으로 옮길 셈이었다. 신수함의 벌통에 연기를 쏘이자 새끼벌들이 나왔다. 이후 벌통을 동쪽 울타리 밖의 배나무에 매달고 종 수이로 하여금 벌들을 벌통으로 받으려 하였는데, 이 벌들이 도로 흩어져서는 뒷산 한마장이나 되는 숲 나무 밑에 모였다. 그리하여 간신히 이 벌들을 통에 담았다가 희철의 방 밖에다가 앉혀두었다. 거의 벌들을 날려 버릴 뻔하다가 도로 잡았으니 기쁜 일이었다. 종 수이는 처음 해보는 양봉이라 벌을 치는 법도 잘 모르고, 미끄러운 그릇에 벌들을 담으려 했는데 그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들어보니 미끄러운 그릇에 받게 되면 얼마 안가 벌들이 다 도망한다고 한다.

“관청에서 모내기를 ‘정(井)’자로 하도록 지시하다”

남붕, 해주일록(海洲日錄),
1926년 5월 8일 ~ 1926년 5월 11일

1926년 5월 11일 이날은 남붕도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는데, 먼저 아침 일찍 옥금(玉今)으로 가서 소작인과 일꾼들에게 논 5두락에 모내기를 시작하게 했다. 그런데 봇물이 오지 않아 일손을 멈추고 나머지 일을 뒤로 미루었다. 봉후(峰後), 유전(田畓), 강단(江端)의 논 7두락에도 모내기를 하였는데, 일꾼 20여 명을 썼다.

이번 모내기에 예전과 달리 이렇게 많은 일꾼을 쓰게 된 것은 모두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해서였다. 엊그제 마을 사람들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온 후로 예전 방식으로 모내기를 하자 면사무소에서 사람이 나와 아직 모내기하지 않은 집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반드시 ‘정’자로 모내기를 해야 한다고 성화를 하고 다녔다. 남붕 또한 면사무소 사람의 방문을 받고 마지못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결국,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하는 바람에 한 줄씩 모를 심었으므로 일꾼은 전보다 더 들었고, 앞으로 곡식 소출도 이익이 없고 감소될 것이 분명하니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모내기를 어렵게 하는 가뭄”

이우석, 하은일록(霞隱日錄),
1897년 5월 9일 ~ 1897년 6월 11일

요즘은 모내기철이다. 이우석(李愚錫)은 최근 여러 논에서 모내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위네 집에서도 월초에 모내기를 한다고 소식을 들었는데 이우석은 몸이 아파서 가지 못한 적이 있다. 모내기를 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지만 평창에는 저수지가 그렇게 많지 않아 비가 충분히 내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방도가 없다. 그런데 걱정스럽게도 요새는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고, 잇따라 맑은 날씨만 계속되고 있다.

5월 22일은 하지였는데, 가뭄 든 논이 많아 근처 논에서 태반이나 모내기하지 못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내기하는 시점에 물이 부족해서 모내기에 실패하면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게 된다. 이우석은 올해 농사가 매우 걱정스러웠다. 지금 시점까지 이 정도로 모내기하지 못한 상황이어서는 곤란하다. 30일이 되어서 들린 소식인즉, 횡성에 있는 갑천 같은 곳에서는 예년과 같이 모내기가 시작됐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태반이나 모내기를 시작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장마 후 들판에 남은 곡식들을 살피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65년 5월 3일 ~ 1765년 5월 16일

노상추의 집안에서 경작하고 있는 논밭은 낙동강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가장 높은 소출을 내는 논은 포(浦) 인근의 밭이었다. 낙동강이 실어온 퇴적물이 좋은 영양분이 되어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비가 많이 내려 낙동강이 범람하면 논밭에 심어놓은 곡식이 모두 쓸려 내려갔다. 여름이 되자 올해도 여지없이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났다.

비가 많이 내리기 전에 노상추의 집안에서는 보리타작을 미리 해두었다. 홍수가 나면 보리마저 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제때 수확해서 양곡을 저장해 둬야 했다. 이번 하짓날에 타작한 보리는 이전에 미리 거둬 둔 것이었고, 아직 밭에는 채 수확하지 않은 보리들이 있었다. 노상추는 내리는 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장대비가 그치자마자 밭으로 나가 보았다. 다행히 들에 보리가 남아 있었다.

남은 보리를 갈무리하자 또다시 며칠 동안 굵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이번에야말로 강물이 넘쳐 포 인근의 논밭이 잠기게 될 것 같았다. 보리를 거둬들인 후 포의 논밭에 남겨놓은 것은 밀뿐이었다. 과연 포 인근의 논밭은 모두 잠겨버렸다. 하지만 밀은 기특하게도 물에 둥둥 뜬 채 떠내려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덕분에 밀도 보리와 마찬가지로 거둬들여 타작할 수 있었다. 장마철은 매일같이 하늘을 보며 일희일비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머니 생신에 친지들이 곡식을 보내어 오다”

최흥원, 역중일기(曆中日記),
1746년 12월 14일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인근의 친족들도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종지 마을과 지묘 마을에 사는 친지들이 모두 찾아와서 어머니께 축수를 올렸다. 그리곤 곡식을 수십 섬이나 최흥원의 집으로 보내어 온 것이 아닌가. 까닭을 들어보니 얼마 전 최흥원의 집 창고에서 불이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안사람들끼리 운영하는 종계에서 곡식을 내어준 것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최흥원은 친척들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감사했다. 이 친척들은 집안의 종손이라 하여 최흥원의 집을 신경 써준 것이리라. 그러나 최흥원은 이 곡식을 받지 않기로 하였다. 사적인 일에 종계의 곡식을 축내다 보면, 애써 만든 종계의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리라. 최흥원은 이러한 뜻을 친지 어른들에게 간곡히 설명하며 마음만 받겠노라 이야기하였다. 비록 곡식은 물렸지만, 여러모로 마음이 따뜻한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감사가 향약을 시행하도록 명하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35년 3월 5일

1635년 3월 5일, 잠깐 비가 내리다가 종일 흐린 날이 계속되었다. 얼마 전 예조에서 전국에 향약을 시행하는 것을 건의하였다고 한다. 주상의 재가를 얻어 경상도 감사가 주와 현에 반포하여 각 고을마다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인근 고을 현풍에서는 수령 김세렴(金世濂)이 이미 예전부터 시행해왔던 것인데, 여씨향약과 주자향약, 퇴계 선생이 정한 향약을 아울러서 향약의 약법을 만들었고, 그 내용 중에는 율곡 이이의 향약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향교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옛 규례를 취하고, 거기에다가 『소학』의 훈계를 추가하여 이름을 학규(學規)라고 지었다. 이 학규는 향교 제생들에게 시행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명이 내려오자 감사가 현풍의 향약과 향규를 가지고 경상도 고을 모두에 반포하였다. 예안 현감인 남연(南碝)은 평소 향약을 매우 싫어하였는데, 지금은 나라에서 시행하는 것이니 막거나 무너뜨릴 수가 없게 되었다.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었다. 예안 고을 내의 간악한 무리들 모두 향약을 불편하게 여겨 온갖 방법으로 소란을 피워댔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나라에서 법으로 권면하는 것을. 이 간악한 자들이 그들 뜻을 펼 수 없게 되었으니, 더더욱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김령은 아무쪼록 향약이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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