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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과 사투를 벌인
조선시대 아버지 열전

위급한 시점은 많이 지나갔다고는 하지만, 최근 몇달 동안 코로나19 사태가 우리 생활에 가져온 변화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반가운 이를 만나 손을 맞잡고 머리를 맞대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평범한 일상은 사라져버렸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지키는 것이 미덕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적 거리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은 여전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손을 씻는 습관과는 거리가 멀던 철없는 가장들도 가족의 건강을 위해 자주 손을 씻는 버릇이 들었다. 답답하다고 밀쳐버리던 마스크도 31번 확진자가 등장한 이후에는 슬그머니 필수품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의 개학이 한 주 한 주 늦추어지다가 온라인 개학으로 종결되자, 학부모들이 짊어지게 된 짐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모든 것을 부모가 책임져 주어야 하는 국면이 되어 버린 것이다.

2020년 대한민국의 방역수준은 세계 최고이며, 의료체계도 원활하며, 사재기도 일어나지 않고, 온라인 쇼핑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다행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 돈을 벌어야 하고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학부모들에게 지워진 짐은 참으로 무겁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가족들은 밀접한 거리를 유지하는 공동운명체이며,
그 책임은 오로지 부모들에게 지워진다.
출처_pixabay


그런 점에서 수 백 년 전 현대의학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수고를 떠올려 보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감염병이 가족을 괴롭혔다. 많은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감염시켜서 떼죽음에 이르게 하는 감염병은 당시 의료체계로서는 치료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병이었기에 역질, 역병, 돌림병이라고 불렸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병이었던 것이다. 치료법이 있다 해도 경제적인 이유로 약 한 첩 제대로 못 써보기도 하고, 전란으로 인해 제대로 의사 한번 만나보지 못하는 사례도 허다했다. 조선시대 평균 수명이 24세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죽음을 겪어야 했겠는가. 어려운 형편에도 살려보려고 모든 수를 내어 최선을 다했건만 아무 소용없이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그 마음은 한결같은 보편적 정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란에 역병으로 먹을 것이 떨어져 소나무 껍질을 벗겨 끼니를 이었다.
출처_스토리테마파크


조선시대 선비들이 소소한 일상사들이 빠짐없이 기록해놓은 일기류 곳곳에는 자식의 병을 고치려 애쓰는 부모들의 기록이 남겨져 있는데, 읽다보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과 선현들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키워봐야만 부모의 은혜를 안다


『계암일록』의 저자인 김령은 1604년에 큰 아이를 이질로 잃는다. 열흘 가까이 앓던 아이가 어느 순간이 되자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죽은 아이를 스스로 묻고 돌아온 김령은 비참한 심경으로 한동안 일기조차 쓰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김령의 자식들은 차례로 홍역과 학질을 앓게 된다. 자식을 잃어본 김령은 크게 근심하고 자녀들의 병세를 자세히 일기에 기록하는데, 다행스럽게도 모두 완쾌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앓았던 홍역과 부모님의 수고와 은혜를 떠올렸으며, 그 마음을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출처_스토리테마파크


“최근에 아이의 병 때문에 근심하고 애를 많이 썼더니 돌아가신 어버이께서 나를 키우고 기르신 수고가 생각나 감탄스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버이의 은혜는 그지없다. (중략) 내가 최근에 겪은 상황 때문에, ‘자식을 키워 봐야만 부모의 은혜를 안다’는 구절을 이번에 세 번이나 반복하여 되뇌었다.” - 계암일록 중에서

죽은 아이를 스스로 묻는 아버지, 비통함에 잠식되다   더보기 홍역과 학질, 아이들을 괴롭히고 아버지를 근심케 하다   더보기


어떻게 아내의 얼굴을 대할 수가 있겠는가


『역중일기』의 저자 최흥원은 1741년 6월 큰 아들인 용장을 돌림병으로 잃는다. 마을에 돌림병이 돌 때, 빨리 아이를 다른 곳으로 옮겼어야 했는데 결국 지체하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최흥원은 스스로를 원망하는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전 해에 아내가 병으로 앓다가 죽으면서 두 아들을 잘 키워달라고 신신당부하였던 것이다. 최흥원은 자신도 모르게 목 놓아 통곡을 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2년 후인 1743년 1월에 둘째 아들인 용채가 돌림병에 걸리자, 병이 깊은 어머니께서 돌림병에 걸릴까 싶어 용채를 종의 집에 내다두고 종들에게 간호하도록 하였다. 아비가 되어 아픈 아이를 종의 집에 두자니 사람의 도리가 아닌 듯 하여 자책하는 마음이 크게 일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일족 아재가 돌림병을 각오하고 용채를 간호하였는데, 열이 내리고 차도가 있었다. 최흥원은 긴장이 풀리면서 자칫 주저앉을 뻔하였다.

용채는 2년 후인 1746년 2월에도 돌림병을 앓게 되는데 이때에는 배의원이라는 사람이 보름이나 최흥원의 집에 머물며 용채와 집안 아이들의 병을 돌보았다. 배의원은 돌림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극진히 살펴서 병의 고비를 넘기게 해준 것이다. 집안의 어른으로 역병을 다스리느라 정작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던 최흥원은 용채를 살려준 성석 아재와 배의원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큰 아들 용장을 잃었는데, 용채마저 잘못된다면 어찌 아내의 얼굴을 대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아들 용장이 세상을 떠나다   더보기 아들 용채가 돌림병을 이겨내다   더보기 목숨을 걸고 아이들의 목숨을 살린 배의원   더보기


왕자도 피하지 못한 역병에서 딸을 구해내다


1588년 선조의 아들인 의안군이 역병으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성재일기』의 저자 금난수의 딸인 종향도 같은 역병에 걸리게 된다. 금난수는 왕자도 살려내지 못한 역병을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을지 크게 염려하였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보기로 결심한다. 의녀 일곱 명을 불렀는데, 의녀들은 몸의 기를 보하는 것이 역병을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환약을 지어주었다. 약 덕분인지 종향은 이레 만에 집 밖 출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지만, 금난수는 마음을 놓지 않고 종향을 역병이 도는 도성에서 멀리 있는 곳으로 옮겨가도록 한다.

그해 가을, 금난수는 종향이 다시 두통을 앓게 되자 약을 구하려 말을 타고 궐 안에 들어가다가 낙마하는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막내아들 금각을 잃은 상황에 막내딸마저 잃게 되면 어쩔까 하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앞섰던 까닭이었다.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궐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약도 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금난수는 포기하지 않고 여러 방편을 써서 약을 구하고야 만다. 막내딸을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딸을 위해 모인 일곱 명의 의녀들   더보기 막내딸의 약을 구하다 낙마하다   더보기


누구에게도 역병은 예외가 없었다. 궁궐의 왕자들이든 양반의 자식이건 일반 백성들이든
역병 앞에서는 모두 평등했다. 출처_스토리테마파크



그 때 그 시절 아버지의 마음으로


일기류에서 보여지는 조선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은 매우 인간적이다. 때로는 인간적인 이유로 인해 그들이 굳게 믿고 있던 유교의 가르침에서 다소 벗어나는 일들도 발생한다.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은 막내딸의 병세를 알기 위하여 미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점을 치고 기도를 드리며, 막내딸이 죽은 후에는 아내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굿을 허락해주며, 무당이 막내딸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자신도 콧등이 시큰거렸다고 고백한다. 꿈에서 막내딸을 보고는 깨어나 아내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새벽닭이 몇 번이나 울 때까지 대성통곡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오희문은 논어 팔일편에 나오는 ‘애이불상(哀而不傷)’을 논하며 성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이야기한다.

『조성당일기』의 저자 김택룡은 아들을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까지 하였지만, 어쩔 도리 없이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다. 아들을 장사지내고 난 김택룡은 힘이 다 빠져서 잘못을 저지른 하인을 꾸짖을 기운도 없고, 제사를 지낼 기운도 없으며, 서원 유생들이 제출한 시험지를 채점하는 것도 망각할 정도다. 부자간의 정이야 끝이 없지만, 운명을 어찌하겠는가 스스로 생각은 해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아버지의 슬픈 마음인 것이다.

『초간일기』의 저자 권문해는 오십이 넘어 처음으로 얻은 귀한 딸을 역병으로 잃고 애끓는 마음을 부여잡고 통곡한다. 권문해는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딸이 죽은 다음에도 “역병으로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혹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며 딸이 다시 살아나 주기를 바랄 정도였다. 가망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일기 속에서 보여지는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또다시 가정의 달을 맞이한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왼쪽 눈이 뿌옇게 보인다는 나의 말에 다음날로 서울 공안과에 데려갔던 나의 아버지, 약시 진단을 받게 되자 너무나 통탄해 하셨던 나의 아버지, 안경을 처음으로 쓰게 되어 신이 났던 철없는 딸에게 제과점 아이스크림과 곰보빵을 사주셨던 나의 아버지. 이십육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증은 어느덧 다 사라져 버리고, 더없이 다정했고 최선을 다했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만 남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좋지 않은 상황, 없는 형편에서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더불어, 이 세대는 역병과 사투를 벌이며 자식들을 구하려고 애썼던 조선시대 아버지들의 DNA를 물려받았기에,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의 몸과 뼈와 생각 속에 깊숙히 뿌리박혀 있는 부모님들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멈출 수 없게 한다.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움직이게 한다.




집필자 소개

조정미
조정미
스토리텔러 조정미는 다양한 기록에서 흥미로운 이야기 소재를 찾아내는 것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며, 누구에게나 한 권의 책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언론대학원에서 문학과 출판을 전공하였으며, 상명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역사콘텐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간 《현대시》의 신인추천문학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7년간 월급 받는 생활을 하며 세상살이의 이치를 익혔고, 콘텐츠 창작 생태계를 연구하는 콘텐츠 전문 기업인 ㈜스토리미디어랩 대표 이사로 재직 중이다.
“아이들을 돌보다가 병이 옮은 부부”

금난수, 성재일기,
1579-02-12~1579-02-23

지난 연말부터 무섭게 번져나간 전염병은 금난수의 집에도 마수를 뻗쳐 집안의 여종들과 금난수의 딸들이 차례로 몸져눕게 되었다. 병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피접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병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난수의 집에서도 여종 두 명이 사망하였고, 금난수의 두 딸도 병세가 나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였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먼저 발병한 금난수의 막내아들 금각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집안의 아이들 명석(命石)과 연문(連文)도 앓아누운지 이미 이레가 다 되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을 돌보던 금난수의 아내가 몸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땀을 좀 낸 뒤에는 괜찮아진 것 같았으나 곧 다시 앓아누웠고, 금난수도 연이어 잠자리가 편치 않고 입맛도 없어지더니 결국 함께 앓아눕게 되었다.
거처하기 편하지 않은 재사(齋舍)에서 부부가 함께 앓고 있자, 아들들이 배행하여 금난수의 아내는 가마를 타고, 금난수는 말을 타고 동계서재로 거처를 옮겼다. 서재로 옮긴 뒤 아내는 입맛이 점점 돌아오고 차도가 있었으나, 금난수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밤에 땀을 좀 흘리고 나니 열이 잠시나마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세 아들들을 서재에서 내보내고 아내와 단 둘이서 병조리를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이 떠나고 나자 전염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어서인지 조금씩 몸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의 병으로 어린 아이를 남에게 맡기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0-03-28~

1740년 3월 28일, 어머니의 환후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아내의 병이 위독해져서 큰 근심이었다. 올해 들어 갑자기 병이 들더니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병으로 최흥원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병든 아내가 최흥원에게, 법흥댁이 젖먹이 아이를 길러주겠다고 하였다고 전하면서 고맙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아마도 아내는 자신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젖먹이 아이를 키울 방도를 그간 열심히 궁리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난밤 최흥원이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아버지는 둘째 제수씨를 부르더니 젖먹이 용장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아이를 제수씨에게 키우라 명하였던 것이다. 최흥원은 이 꿈을 꾸고도 행여 아내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도 놀랍고 괴이쩍은 생각을 숨길 수 없었다.
아! 아내는 정녕 세상을 버릴 것인가. 그래서 꿈에서 아버지께서 나오셔서 자신의 손주 걱정까지 하신 것인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해져왔다. 병든 아내에게 아이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몸을 추스르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아내가 병이 나서 의녀를 부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8-03-26

1608년 3월 26일,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지내고 있던 김광계는 바쁜 와중에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서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의 얼굴 색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아내는 아무 일도 없다며 집안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바깥일에만 몰두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드디어 아내가 몸이 아파서 일어나 앉는 것도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김광계는 의술에 뛰어난 집안 어른들께 여쭈어 보려고 했으나 아내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이날 결국 집사람은 의녀(醫女)를 불러 진맥을 받은 후, 침을 맞고 뜸을 떴다. 소식을 들은 노산 재종조부가 걱정이 되어 찾아 왔다.

“이시명에게 시집간 누이가 당홍역에 걸려서 죽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4-09-01~1614-10-16

1614년 9월 1일, 김광계는 인동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안음 형과 같이 예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일직(一直)에 사는 류실 누이 집에 들러 자고 가기로 했다.
누이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아 맛있게 먹은 후에 과거 시험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며, 오산서원을 구경한 이야기, 그리고 천생산성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 본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갑자기 매형이 돌아가신 후로 적적하고 무료하게 지내는 누이에게 세상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 들어와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전해 주었다.
김광계는 너무 놀라서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종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 달 27일에 당홍역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김광계는 류실 누이와 생질녀를 붙들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김광계는 어린 누이가 가여워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왜란 와중에 두 부모를 모두 잃고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자란 누이였다. 그래도 심성이 착하고 유순해 손윗누이들과 오빠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다가 이시명(李時明)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7년 만에 어린 자식을 둘을 남겨 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그 눈을 어찌 감았을까. 누이 얼굴이 떠올라 김광계는 오장(五臟)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눈도 붙이지 못했지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김광계는 깊은 달밤에 류실 누이의 집에서 나와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김광계는 아내를 보자마자 또 다시 통곡하였다. 아내는 이미 영해 누이의 부고를 들었고,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집에 계시는 할머니와 아픈 아우를 침락서당으로 피접을 보내 놓았다고 했다. 김광계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노산 재종조부가 와서 조문을 왔다. 다음날 아침에는 판사 재종숙이 와서 조문하고, 밥을 먹은 뒤에 여희·덕회 형, 그리고 김참 아재가 와서 조문하였다.
9월 4일 아침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노산 재종조부와 몇몇 사람들이 보러 왔다. 다음날 둘째 아우 이도(以道)가 부고를 듣고 예천(醴泉)에서 왔는데, 이들은 당장 영해에 갈 수가 없었다.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모두 조심스러웠고, 피접을 나가 있는 아픈 아우와 할머니에게 큰 일이 날까봐 마을을 떠날 수도 없었다. 제천 할아버지도 이질에 걸려 모두 염려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광계도 몸이 매우 아팠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문병을 다니거나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24일에도 영해(寧海)로 길을 나서려고 하였으나 병이 낫질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나마 26일이 되어 피접 나가셨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 오셨는데, 김광계는 이제야 할머니께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말씀드렸다.
영해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10월 15일이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서야 누이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조문객은 이미 아무도 없고, 빈소에 들어가니 붉은 만장과 혼백상자만 놓인 채 촛불이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모습에 김광계는 설움이 더욱 북받쳐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매부인 이회숙(李晦叔)과도 서로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 어린 남매를 보니 슬픔이 한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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